- 봉오동전투 주역 최운산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정상규 작가가 2020년 펴낸 한의사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신홍균 군의관  독립운동 이야기 표지(출처 : 하성환)
정상규 작가가 2020년 펴낸 한의사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신홍균 군의관 독립운동 이야기 표지(출처 : 하성환)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한의사는 모두 8명이다. 2020년 11월, 여덟 번째로 대한민국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뒤늦게 추서한 분이 신홍균이다.

그는 항일무장투쟁 3대 대첩 가운데 봉오동전투(1920)와 대전자령전투(1933)에 직접 총을 들고 무장 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물론 한의사였기에 독립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부상병 치료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일본군과 교전 상황에선 앞장서서 총을 들고 무장 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대전자령전투(1933. 6. 30)는 조선 주둔 19사단에서 차출된 1,600명이 넘는 ‘간도파견군’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대전자령전투 당시 한국독립군은 3일 동안 100km를 행군한 뒤, 협곡 양쪽 유리한 지점에 참호를 파고 매복에 들어갔다. 일본군이 협곡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매복에 들어갔다.

그러나 와야 할 일본군은 오지 않고 참호를 파고 매복에 들어간 6월 28일 아침부터 큰비가 내렸다. 폭우 속에 오히려 일본군은 출병을 연기했다. 빗물이 독립군 참호 속으로 고이면서 허리춤까지 찰랑거렸다. 지청천이 이끈 한국독립군은 6월 30일 일본군이 골짜기로 들어올 때까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견뎌내야 했다.

100km 고된 행군 끝에 탈진 상태에서 참호를 파고 매복에 들어갔으나 정작 일본군은 오지 않고 폭우가 쏟아진 탓이다.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르고 전투식량마저 바닥나자 독립군 사기는 극도로 저하됐다. 지청천 장군은 참호를 돌며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한계에 다다른 분위기였다.

그 순간 군의관 신홍균은 숲속으로 들어가 목이버섯을 다량으로 채취해 병사들에게 대용식품으로 건넸다. 목이버섯은 가을장마가 끝나고 숲속에 자라는 검정 버섯인데 빗물에 씻어 소금으로 버무리면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병사들은 목이버섯으로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 냈고 4~5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실로 군의관 신홍균이 기지를 발휘하면서 빛을 보았던 전투였다.

전투에 참전한 한국독립군 조경한이 대전자령전투를 회상하며 쓴 시에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어 여기에 일부 소개하고자 한다.

“(중략) 해와 달 뜨고 지기를 세 차례이건만/기다리는 이리떼는 아직도 보이지 않네/바닥난 군량은 굶주림을 더하고/장맛비 차가움, 뼛속에 스며든다/검정 버섯 따다가 소금 절여 먹어 보니/요기도 되려니와 치풍도 된다누나/어여쁘다. 이 기방 누구에서 나왔느냐/그는 바로 군의관 신굴(申矻)이다.(하략)” - 정상규, 신민식(2021). 「신홍균 한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의사학회지』 제34권 제1호. 41쪽.

신굴(申矻)은 군의관 신홍균이 사용한 다른 이름으로 신흘(申屹)이라고 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신흘, 신굴, 신홍균은 같은 인물이다.

항일무장투쟁 3대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전투(1933.6)는 일본군 살상 규모에선 130명이 넘는 정도로 봉오동전투(1920.6), 청산리전투(1920.10)에는 미치지 못한 전투였다.

그러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 측면에선 봉오동전투(1920), 청산리전투(1920)와 비교해도 가장 많았다. 전투식량을 비롯해 기관총, 소총, 탄약, 대포, 전투화가 그야말로 풍족했다. 물론 한중연합군이 승리한 역사상 의미 있는 항일전쟁이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컸다. 그러나 노획한 전리품 분배 문제로 중국군과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22년, 1940년 9월17일 충칭시내 자링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가 열렸다. 당시 국무령 백범(오른쪽)과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백산 이청천(지청천) 장군(왼쪽)이 단장에 나란히 서 있다.(출처 : 김자동, 한겨레 신문 2010년 3월 3일 자료 사진)  지청천은 한국무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인물이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일본군을 탈출하여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3,500명에 이르는 독립군 무관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고 서로군정서를 지휘했으며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 한국독립군 사령관으로 1933년 6월 30일 대전자령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한민국 22년, 1940년 9월17일 충칭시내 자링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가 열렸다. 당시 국무령 백범(오른쪽)과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백산 이청천(지청천) 장군(왼쪽)이 단장에 나란히 서 있다.(출처 : 김자동, 한겨레 신문 2010년 3월 3일 자료 사진)  지청천은 한국무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인물이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일본군을 탈출하여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3,500명에 이르는 독립군 무관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고 서로군정서를 지휘했으며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 한국독립군 사령관으로 1933년 6월 30일 대전자령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한중연합군은 석달 뒤 동녕현성(1933.9)전투에서 패퇴한 뒤, 중국군 참모장이자 코뮤니스트 주보중은 지청천을 비롯해 한국독립군 330명이 넘는 병력의 무장을 강제 해제하고 구금했다.

일제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지청천 장군에게 ‘민생단’ 혐의를 들씌워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자 군의관 신홍균은 대책을 숙의하던 중 분노하며 열변을 토했다.

“내 나이 오십이 넘도록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처자를 버리고 만주에 와서 돌아다니다가 김소래 선생을 만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은 불행히 공산도배에게 (‘민생단’ 혐의로) 학살되었고 그분이 남긴 뜻에 따르고자 지청천 장군 휘하에 들어와 섬겨왔는데 또 장군을 잃게 되었으니 내 살아서 무엇하랴! 이로써 목숨을 끊겠노라.” - 앞의 글 43쪽. ( ) 안 내용은 글쓴이 주

‘민생단’ 혐의를 들씌운 뒤 공개 총살당한 소래 김중건 선생에 대한 슬픔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가슴 깊이 맺힌 원한을 격한 심정으로 토로했다. 그리곤 몰래 손에 한 움큼 쥐고 있던 아편을 갑자기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민생단’ 혐의를 들씌운 음모에 죽음으로써 항거하고자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조경한을 비롯해 독립군 병사들이 비눗물을 강제로 먹여 토하게 했다. 두세 시간이 지나자 신홍균 군의는 의식을 되찾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군의관 신홍균이 자결로써 항거한 이 사건 직후, 지청천 장군은 구금 상태에서 무사히 석방됐다. 실제로 신홍균 군의는 중국군 병사와 한국 독립군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질병을 치료했다. 그만큼 한중연합군 내에서 신홍균 군의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다. 한국 독립군 장교들을 구금했을 때 신홍균 군의를 함께 구금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군의관 신홍균은 원종교 대진단 단장으로 500명을 통솔해 사도하자전투(1933.3), 동경성전투(1933.4), 대전자령전투(1933.6)에 참전했다. 그런데 한의사로서 신홍균 군의가 일생을 바쳐 항일무장투쟁에 발 벗고 나선 데엔 봉오동전투 주역 최운산 장군과의 묘한 인연과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경험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최진동 사령관 통행증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봉오동 독립군 기지는 보안이 철저해 일제 밀정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군사 요새였다. <대한민국> 2년 6월이란 표현과 <대한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이란 표현이 특히 눈에 띈다.
최진동 사령관 통행증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봉오동 독립군 기지는 보안이 철저해 일제 밀정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군사 요새였다. <대한민국> 2년 6월이란 표현과 <대한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이란 표현이 특히 눈에 띈다.

한의사 신홍균이 독립운동 대의를 위해 처자식을 거느리고 동만주(북간도)로 건너온 시기는 항일강점 직후인 1912년 9월이었다.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봉오동사관학교 최운산 장군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일제 밀정이 넘쳐나던 시기라 최운산 장군 부대인 「도독부」와 접촉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떤 날은 신홍균 혼자 「도독부」 대원을 접선했던 산속 수풀을 헤매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은 주막에 앉아 「도독부」 대원을 무작정 기다린 적도 있었다.

한의사 신홍균이 봉오동 최운산 장군과 만나기까진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일제 밀정의 촉수에 걸려들지 않고 일본군 감시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만주로 건너온 지 3년째인 1915년 4월에 이르러서야 꿈에 그리던 최운산 장군과 마주할 수 있었다. 1915년 4월은 마침 봉오동 산 중턱을 개간해 독립군 훈련 장소로 연병장을 만들던 중이었다.

우선 최운산 장군은 한의사 신홍균이 훈련 중 다친 병사들을 치료해 주기를 요청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세균 감염으로 피부가 괴사 되는 ‘봉와직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훈련 중 부상을 입고 상처가 곪아 염증으로 붓고 걷기조차 힘들어했다.

그러자 한의사 신홍균은 고통받는 병사들을 대황과 황금치자를 빻아 만든 대황고와 탕약으로 염증과 어혈을 풀어주는 탕을 열 첩 넘게 달여서 먹였다. 병사들은 빠르게 회복돼 정상을 되찾았고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한의사 신홍균이 처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최운산 장군은 “꼭 필요한 사람이 중요한 시기에 찾아와 주어 너무도 큰 힘이 된다”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렇게 봉오동 「도독부」 시절 군의관 겸 최운산 장군 참모로 독립운동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연병장을 만들기 위해 벌목한 나무로 커다란 병영 막사 3개 동을 짓고 독립군 병사들 숙소로 사용했다. 그리고 일본군 습격에 대비해 3,000평 규모 크기로 토성을 쌓기 시작했다. 토성 두께가 1m에 달해 일본군 포탄에도 견딜 수 있게 튼튼히 쌓았다. 토성 귀퉁이엔 포대를 쌓고 대포를 설치했다.

한의사 신홍균은 연병장과 토성을 쌓는 공사 감독관이 되어 달라는 최운산 장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최운산 장군의 풍모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토성 쌓기 공사가 거의 끝나면서 한의사 신홍균은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군사훈련에 임했다. 체력을 다지는 초급 훈련부터 소총을 다루는 고급 훈련과정까지 모두 이수했다. 밤이 되면 병사들이 탈진할 정도로 훈련과정은 속도감 있게 빠르고 훈련 강도 또한 높았다.

서른 중반이 된 나이에 열댓 살이나 나이 어린 스무 살 전후 청년들과 고된 훈련을 마치면서 신홍균은 최운산 장군이 지닌 강직하고 굳건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우리가 힘을 내야 조선이 힘을 내지 않겠소!” 라고 격려하며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끌어모으는 신비한 힘이 최운산 장군에겐 있었기 때문이다.

연변 박물관에 있는 최운산 장군 사진(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으로 북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앞두고 <한국사> 교과서에 반드시 기술해야 할 것이다.(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연변 박물관에 있는 최운산 장군 사진(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으로 북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앞두고 <한국사> 교과서에 반드시 기술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의사 신홍균은 ‘의술도 좋지만 전투에 임하고 싶다’는 포부를 최운산 장군에게 피력했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은 전투에 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술이 지닌 중요성을 잊지 않기를 거듭 강조했다. 그즈음 총기 오발로 오발탄이 독립군 청년 허벅지에 박히는 총기 사고가 발생했다. 허벅지에서 파편을 꺼내며 한의사 신홍균은 최운산 장군이 자신에게 한 말을 되뇌었다.

한의사 신홍균은 다른 병사들처럼 훈련 단계에만 머물고 일본군을 타격하지 않는 최운산 장군 처사에 일부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독립군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병사 치료에 열중하는 틈틈이 영어, 러시아어 공부에 매진했다. 최운산 장군이 자신에게 보내는 독립군 동지로서 두터운 신뢰에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와 자주 무기를 거래하는 최운산 장군을 보좌하면서 몸을 쓰는 것과 달리, 머리를 쓰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최운산 장군은 자신이 독학으로 공부한 러시아어 낡은 공책을 건네주며 격려했다.

영어는 일본어로 된 영어 교재를 건네받았다. 훈련은 일주일에 두 번 참여하는 것으로 하고 작은 방에서 외국어 공부에 몰두했다. 모두 최운산 장군이 베푼 작은 배려였다. 훗날 러시아와 무기 거래를 할 때 한의사 신홍균은 최운산 장군을 따라 동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의사 신홍균은 봉오동을 1년 만에 떠났다. 유격대 전술로 일본군을 타격하기를 갈망했건만 최운산 장군은 생각이 달랐다. “아직 사과를 베어 물기에는 여물지 않았다”며 “무모한 행동으로 떠돌이 생활을 할 순 없다”고 판단했다. 여전히 튼튼한 요새 속에서 동포들을 지키고 훈련에만 매진한 최운산 장군과 생각을 달리한 탓에 신홍균은 봉오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16년 4월 봉오동을 떠난 한의사 신홍균은 원종교를 창시한 소래 김중건을 만나 의기투합했다.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행동하는 독립군이 되고자 맹세했다. 원종교 부흥과 동시에 독립운동 방략을 함께 논의했다. 그리고 군사훈련을 통해 청년들을 담금질했다. 한의사 신홍균이 나중에 독립군 부대인 대진단 단장을 맡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봉오동을 떠난 지 3년 만에 한의사 신홍균은 1919년 4월 최운산 장군을 다시 만나러 갔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은 탓이다. 무엇보다 3‧1운동 이후 봉오동 골짜기로 애국 청년들이 밀려들어 왔고 무기 거래에서 러시아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 더욱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최운산 장군 요청으로 일본군의 날카로운 감시를 피해 돌고 돌아서 신홍균은 열흘을 걸려 장백현에서 봉오동까지 걷고 또 걸었다. 봉오동에서 최운산 장군을 해후했을 땐 감격 그 자체였다.

최운산 장군 집무실엔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극기가 벽에 걸려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 최운산 장군 형제들은 「도독부」를 「대한군무도독부」로 개칭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군대로 재탄생해 있었다. 무장된 정예병력만 670명이 넘었다.

늘어난 애국 청년들을 무장시키기 위해선 더욱 많은 무기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해 들어와야 했다. 한의사 신홍균은 무기 구입을 위한 군자금 요청을 예상하고 지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홍균 예상과 달리, 최운산 장군은 무기 구입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량의 무기공급처를 모색하는 게 급선무였고 실제 무기 거래 과정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인물이 절실했다. 촉수를 번뜩이는 일제 밀정을 따돌린 채, 거액이 오가는 무기 거래 현실에서 신뢰할 만한 인재가 절실했던 탓이다. 한의사 신홍균은 그제서야 최운산 장군이 ‘간도 제1의 거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했다고 회고했다.

<북간도 무장 독립군의 무기와 최운산>을 주제로 2019년 6월 14일에 개최된 최운산 장군 제4회 학술세미나 포스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최성주) <봉오동전투> 승리 주역은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몸소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었다. 
<북간도 무장 독립군의 무기와 최운산>을 주제로 2019년 6월 14일에 개최된 최운산 장군 제4회 학술세미나 포스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최성주) <봉오동전투> 승리 주역은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몸소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석현 토지를 급매로 내놓아 거금 5만 원을 마련했다. 체코군과 무기 거래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당시 탄약 한 발이 1원이었는데 1원은 오늘날 12,000원이 넘는 화폐가치를 지녔다. 총기 한 정이 최소 100원에서 최대 300원을 치러야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다시 말해 적게는 총 한 정 구입에 1백 20만 원이었고 많게는 3백 60만 원에 달했다. 따라서 최운산 장군이 토지 급매로 마련한 5만 원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5-6억 원에 달하는 거금인 셈이다. 무려 신식 소총 200정을 넘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당시 거래는 거래자 두 명만 만나 거래가 이뤄졌는데 두 명이 거래 대금을 확인한 후, 이상 없으면 불빛으로 신호를 주었다. 그러면 대기하던 인원들이 무기를 운송하는 방식이었다.

무사히 무기 거래가 끝나자 최운산 장군은 한의사 신홍균에게 만주에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을 대통합시킬 것을 언급하며 자신감을 내 비췄다. 그리고 막대한 군자금이 시급히 필요한 만큼 함께 모연 활동에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한의사 신홍균은 최운산 장군과 함께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모연 활동에 열정을 바쳤다.

국내 모연 활동 도중 한의사 신홍균에게 느닷없이 비극이 찾아왔다. 일본군이 신홍균 집을 덮쳐 우연히 형님 집을 찾아왔던 동생 신동균을 살해하고 압록강에 수장시켜 버렸다. 7살, 10살 어린 조카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 헌병대가 저지른 잔학한 만행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신홍균은 오열했다. 1919년 10월 17일자 일기엔 당시 심정을 애절하게 토로했다.

“신동균, 내 동생아,

못난 형을 두어 네가 생을 채우지 못했구나. 내 이날의 아픔을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으리 라! 이 형이 못나, 동생을 세상에서 떠나보내 버렸으니 그 원한은 내 꼭 갚아주리라.”

- 정상규(2020). 『대전자령전투, 어느 독립군의 일기』. 아틀리에북스. 90쪽.

동생을 살해하고 압록강에 수장시킨 일제 헌병대 만행은 한의사 신홍균이 항일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두 번째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단체들은 대부분 최운산 장군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주둔지와 사관연성소가 있던 서대파와 십리평은 오롯이 최운산 장군이 제공한 일부 사례다.

재정 지원에도 불구하고 무장단체가 대통합을 이루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봉오동전투를 앞두고 1920년 5월 19일 국민회, 신민단, 군무도독부를 포함해 6개 무장단체는 예상과 달리 18개 항에 합의했다.

그리고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를 탄생시켰다.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고 참모장은 최운산 장군, 참모는 한의사 신홍균과 최치흥, 이태범, 의무원장은 박영, 제1연대장 김좌진, 제2연대장 홍범도 , 제3연대장 오하묵, 대대장은 최태례, 최도례가 맡았고, 이천오, 강상모, 강시범, 조권식이 제1중대부터 제4중대 중대장을 맡았다.

결전을 앞두고 최운산 장군은 노령 방면에서 천 명이 넘는 운반 인원과 우리 독립군 측에서 200명이 넘는 운송반을 조직해 추가로 모신나강 소총, 맥심기관총, 탄환을 들여왔다. 최신식 무기 구입은 독립군들 사기를 크게 북돋웠다. 그러나 무기 구입 비용으로 너무 많은 거금을 썼기에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들은 조밥에 파가 약간 들어간 된장국 식사를 하며 이리떼를 쓸어버릴 각오로 결전을 다졌다.

독립군 군복은 중국 군복과 비슷한 모양새였는데 최운산 장군 아내 김성녀 여사와 독립군 부인들이 봉오동 중촌에서 밤새 러시아에서 들여온 재봉틀을 이용해 군복을 만들었다.

독립군 군의관 신홍균은 최운산 장군으로부터 5월 26일 일본군 출병 날짜를 전해 들었다. 이미 봉오동 주민들을 대피시켰고 「대한북로독군부」 기지가 있던 봉오동 상촌은 전시체제로 돌입했다.

봉오동전투를 앞두고 군의관 신홍균은 의무부대와 보급부대를 맡았다. 나아가 일본군 진입로가 훤히 보이는 요충지에 교통호 참호를 파고 기관총을 배치해 매복하는 일을 맡았다. 신홍균 스스로 기관총을 잡고 싶었으나 최운산 장군이 만류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 당시 <대한 북로 독군부> 독립군들이 썼던 피묻은 태극기(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 당시 <대한 북로 독군부> 독립군들이 썼던 피묻은 태극기(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1920년 6월 7일 결전의 날! 최진동 사령관은 봉초봉에서 일제히 사격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그렇게 봉오동전투는 일본군 사망자만 500명이 넘고 부상자도 그 이상에 달할 정도로 대승이었다.

물론 우리 독립군 측 사망자도 적지 않았다. 신민단 17명을 비롯해 최소 수십 명이 산화했고 총상환자도 적지 않았다. 고막을 다친 환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퇴각하던 일본군은 봉오동 마을 민가를 향해 총을 난사해 어린이를 포함해 마을 주민 수십 명이 원통한 죽음을 맞았다.

우리 독립군 측 사망자가 다수 발생한 연유는 전투 도중 퇴각한 홍범도 장군이 내린 전술 오류에서 발생했다. 그 일로 일본군 퇴각 지점을 맡아 목숨을 걸고 사수했던 신민단 단원 17명전원이 전멸했다. 10대 후반 청년들이었다.

이 일로 봉오동전투가 끝난 뒤 열린 「대한북로독군부」 지휘부 평가 회의에서 최진동 사령관은 ‘항명죄’에 해당한다며 끝까지 싸우다 억울하게 죽은 젊은 독립군들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참을 수 없다며 분노했다. 홍범도 연대장에게 죽음으로써 책임질 것을 촉구했다.

그러자 신민단 단장 김규면 역시 동조 발언을 하며 홍범도 장군이 위치를 지키지 않고 ‘도망쳤다’고 비판했다. ‘도망’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홍범도 장군은 분노했다. 유격대 전술에 익숙한 홍범도 장군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법일 뿐 ‘도망친 게 아니라’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책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출처 : 최성주) 봉오동 전투의 주역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선생(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이 오랜 기간 자료를 수집해 봉오동 전투의 실체를 가족사와 함께 밝힌 책이 최근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되었다. 한국근대사, 바로 독립운동사에 소중한 자료이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책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출처 : 최성주) 봉오동 전투의 주역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선생(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이 오랜 기간 자료를 수집해 봉오동 전투의 실체를 가족사와 함께 밝힌 책을 최근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하였다. 한국근대사, 바로 독립운동사에 소중한 자료이다.

결국 도량이 넓은 최운산 장군이 나서서 중재를 시도했다. 홍범도 장군을 대신해 지휘부 독립군 대장들에게 머리를 숙였고 홍범도 장군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자고 호소했다. 게릴라식 전술이 잘못된 판단이고 그 일로 인해 아까운 젊은 목숨들이 산화한 건 맞지만 독립전쟁을 치르는 마당에 홍범도 장군 같은 인물을 스스로 내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군의관 신홍균은 최운산 장군의 발언을 듣고도 그 당시 회의에서 정신이 어지러웠다고 회고했다. 최운산 장군은 지도부 평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신홍균에게 이렇게 되뇌었다.

“홍범도 스스로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일 것이오. 필시 다음번 전투에서는 그 상처를 극복하려고 온 힘을 다할 것이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는 걸지도 모르겠소‧‧‧.” - 정상규(2020). 앞의 책. 113쪽.

실제로 홍범도 장군은 넉 달 뒤 일제와 맞붙은 청산리전투(1920. 10)에서 김좌진 장군 이상으로 용맹스럽게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군이 가장 피하고 싶은 부대로 홍범도 부대를 꼽을 정도였다.

한의사 신홍균! 그는 생애 전부와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30대 중반 나이에 스무 살 전후 청년들과 함께 연병장을 북북 기면서 군사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군과 전투 상황에선 스스로 총을 들고 봉오동전투(1920)와 대전자령전투(1933)에서 이리떼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해방 후 대한민국은 75년간 항일독립투사 신홍균을 잊고 살았다. 겨우 2년 전 젊은 역사학도가 발굴한 노력에 힘입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뒤늦게 추서했을 뿐이다.

한의사 출신 항일독립투사 신홍균 무덤이 해방된 지 75년에 이르도록 만주 목단강 근처에 방치돼 있었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봉분만 덩그마니 남아 아무런 표지석도 없이 75년 동안 방치된 독립유공자 무덤은 대한민국 보훈 행정이 처한 그간의 민낯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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