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교과서 서술의 문제점 분석

홍범도 장군을 <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기존 이범석의 <우둥불>(1971)과는 상반된 내용으로 조금 진전된 서술이다. 그러나 여전히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의 틀에 갇혀 있다.(출처 : 금성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187쪽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홍범도 장군을 <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기존 이범석의 <우둥불>(1971)과는 상반된 내용으로 조금 진전된 서술이다. 그러나 여전히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의 틀에 갇혀 있다.(출처 : 금성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187쪽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홍범도 장군은 1910년 전후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포수 출신 독립군으로 국권 상실 시기에 일제와 맞서 치열하게 싸웠던 항일독립지사였다. 부인과 아들을 비롯해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극 속에서도 초지일관 항일투쟁을 견결하게 실천했다. 소련공산당 당원으로 훈장을 받았고 홍범도 장군을 기려 그의 이름을 따 거리 이름을 지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봉오동 전투 = 홍범도」로 인식하는 데엔 상당한 문제가 남는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활동을 재개해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창립에도 관여했다. 나아가 볼세비키 적군과 함께 백위대에 맞서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 이후 항일무장투쟁을 재개하기로 하고 1919년 10월에 훈춘 지역으로 부대를 이끌고 들어왔다.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 독립군이 동만주 왕청현 봉오동에 들어온 것은 1920년 5월 중순경으로 「봉오동 전투」의 중심 부대가 될 수 없었다.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를 중심으로 안무의 국민회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6개 부대가 연합한 통합부대 <대한 북로 독군부>가 결성된 것은 5월 19일이었다. 그로부터 18일이 지난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발생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 당시 <대한 북로 독군부> 독립군들이 썼던 피묻은 태극기(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 당시 <대한 북로 독군부> 독립군들이 썼던 피묻은 태극기(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봉오동 전투」승리 부대인 <대한 북로 독군부>의 무기와 군수물자는 모두 최진동 장군의 큰동생 최운산 장군이 사재를 털어서 제공한 것이다. 이는 러시아 연해주 체코 병단 무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최운산 장군의 활약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대한 북로 독군부> 수천 명 군인들을 먹이고 입혔으며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단언하건대 북간도 제1의 거부이자 대지주 최운산 장군이 없었다면 수천 명 독립군들의 병참보급과 신식 무기 구입 그리고 군사훈련은 애초 불가능했다. 봉오동 전투 당시 대한 북로 독군부가 보유한 무기 실태를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독립군들이 보유한 무기류는 대포 10여 문, 기관총 수십 정, 수류탄 수천 개, 장총 1000여 정, 권총 수백 정이었고 수만 발에 이르는 실탄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따라서 봉오동 전투의 실상은 우리 사회 대중의 인식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수십 년 동안 대중의 역사의식을 지배해온 교과서가 미친 영향 탓이다. 따라서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현행 <한국사> 교과서를 분석해 그 서술상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

첫째,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질적 부대인 「대한 북로 독군부」를 기술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봉오동 전투 = 홍범도」신화를 의도적으로 조장하려는 게 아니라면 마땅히 봉오동 전투의 실체를 밝히는 게 역사학자들이 수행해야 할 본업이기 때문이다.

둘째,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기술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이는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에 의해 육성된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 군대였던 「대한 군무도독부」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과제와 직결된다.

<봉오동전투> 승리 주역은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몸소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었다. 2019년에 열린 4차 학술대회 포스터(출처 : 최운산 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
<봉오동전투> 승리 주역은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몸소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었다. 2019년에 열린 4차 학술대회 포스터(출처 : 최운산 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

셋째,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배후인 북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에 대한 기술 여부이다. 최운산 장군은 북간도 항일무장투쟁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던 걸출한 역사적 인물이다. 이미 4차례 학술대회를 통해 드러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운산에 대한 언급은 8종 교과서 어느 곳에도 없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나머지 두 가지 관점에서 교과서를 해부해 보고자 한다.  씨마스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만이 유일하게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 북로 독군부>를 언급하고 있다.

씨마스 출판사 <한국사>는 8종 교과서 가운데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 <대한 북로 독군부>를 언급한 유일한 교과서이다.(출처 : 씨마스 <한국사> 195쪽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씨마스 출판사 <한국사>는 8종 교과서 가운데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 <대한 북로 독군부>를 언급한 유일한 교과서이다.(출처 : 씨마스 <한국사> 195쪽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나머지 교과서는 대동소이하다. 특히 금성출판사와 천재교육, 그리고 지학사 교과서 서술은 역사의 진실에서 크게 벗어나 있음을 발견한다. 지학사 교과서 서술을 살펴보자.

“3‧1운동 이후 많은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만주지역에 오면서 50여 개의 크고 작은 독립군 단체가 결성되었다. 독립군은 수시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일본 군대와 경찰,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다. 독립군의 잦은 국내 진입 작전에 시달리던 일제는 독립군을 공격하고자 1920년 6월 추격 부대를 편성하여 훈춘 인근의 봉오도으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부대는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여 계곡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제는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만주에 파견하였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하여 백두산 기숡의 화룡현 청산리 일대로 이동하였다. 1920년 10월, 독립군은 추격해 오는 일본군에 맞서 백운평, 어랑촌 등지에서 6일간 10여 차례의 치열한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청산리 대첩)” - 정재정 외(2021). 『한국사』. 서울 : 지학사. 316쪽.


8종 교과서 모두 <홍범도>를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홍범도>를 우선적으로 배치하여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지학사 출판서처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부대”가 핵심 내용으로 기술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 북로 독군부>에 대한 언급 자체가 아예 없는 형편이다. 이는 「봉오동 전투」를 공부한 오늘날 10대 – 20대조차 30대 이후처럼 「봉오동 전투 = 홍범도」로 각인될 가능성이 매우 짙다. 여전히 심각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지학사 『한국사』교과서에선 김좌진 사진을 노골적으로 게재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청산리 전투」 당시 촬영된 것으로 추정하는 사진으로 알려진 자료이다. 뒤에서 바짝 긴장한 채 도열한 병사들 앞에서 다리를 꼬고 위엄있게 앉은 이를 <김좌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진임이 이미 역사학계에서 거론된 바 있다.

왜냐하면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복장이 일본군과 비슷했는데 사진 속 독립군 복장은 전혀 일본군 복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청산리 전투」를 언급하면서 <김좌진> 장군을 크게 부각시키기 위한 취지에서 사진을 게재한 것으로 「청산리 전투 = 김좌진」신화를 부추기는 데 일조한 측면이 크다.

「봉오동 전투」의 핵심 주력부대인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다. 실체가 빠진 역사 서술이 아닐 수 없다. 오로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부대>라고 기술했을 뿐이다. 엄밀히 분석해 보면 이런 역사 서술 형태야말로 「봉오동 전투」의 실체를 왜곡시키는 가장 위험한 서술방식이라 생각한다.

오늘날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 신화와 개인 영웅사관을 조장해 온 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과거 낡은 서술행태를 그대로 재연,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종 <한국사> 교과서를  <대한 북로 독군부> 와  <군무도독부> 서술 여부  두 가지 기준으로 분석한 도표(출처 : 하성환)
8종 <한국사> 교과서를 <대한 북로 독군부> 와 <군무도독부> 서술 여부 두 가지 기준으로 분석한 도표(출처 : 하성환)

요약하건대 씨마스 출판사에만 「대한 북로 독군부」가 기술돼 있다. 나머지 7종 교과서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통합부대 「대한 북로 독군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음으로 「대한 북로 독군부」의 핵심부대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정식 군대인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에 대해 기술돼 있는 교과서는 5종(미래엔, 비상, 해냄에듀, 씨마스, 동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봉오동 전투」의 실체를 모르고 기술한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씨마스는 최진동에 대한 기술은 없고 군무도독부만 서술돼 있는데 이 또한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다. 최진동 장군은 「대한 북로 독군부」사령관이자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핵심 인물 중 핵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북간도(동만주) 제1의 거부이자 「봉오동 전투」를 막후에서 승리로 이끈 주역은 최운산 장군이다. 그런데 최운산 장군에 대한 서술이 전무한 것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부분으로 <2022 교육과정 개정> 시에 반드시 반영해야 할 내용이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3,500명을 길러낸 우당 이회영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형제들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기려서 건립한 우당기념관 전경(출처 : 하성환)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3,500명을 길러낸 우당 이회영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형제들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기려서 건립한 우당기념관 전경(출처 : 하성환)

서간도(남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3,500명 독립군을 길러냄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 이회영 형제들이었다. 그렇다면 북간도(동만주)에서 봉오동무관학교를 세워 670명 독립군을 길러내고 봉오동전투 당시 2000-3000명에 이르는 독립군들을 무장시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운산 형제들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서술하는 게 지극히 마땅한 일일 것이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당시 독립군 한 명을 양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선 조선인 10가구가 희생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1920년 일제가 자행한 만행, 「경신대학살」은 그런 역사적 연유를 안고 있다.

이젠 더 이상 「봉오동 전투」를 <홍범도> 중심으로 서술하거나 홍범도가 「봉오동 전투」의 핵심인물인 것처럼 서술하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 「봉오동 전투」승리 주역은 홍범도가 아니라 최진동-최운산-최치흥이기 때문이다. 4차례 학술세미나와 그를 반영한 영상물이 공영방송을 통해 이미 소개됐다. 「봉오동 전투 = 홍범도」신화를 벗겨내고 ‘준비된 독립전쟁’ 「봉오동 전투」의 실상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어느 날 포수 출신 홍범도 장군이 등장해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게 아니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1912년부터 1920년까지 670명 독립군 정예부대를 실전처럼 훈련시키며 최신형 무기로 무장한 ‘준비된 전쟁’이었다. 더구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당시 중대장, 소대장을 비롯해 중간 간부들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음은 기존 연구 결과로 밝혀진 사실이다.

「청산리 전투」 역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승리 주역으로 주목 받을 일은 아니다.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의 연장전인 셈이다. 따라서 「청산리 전투」에서 북로군정서 출신 이범석의 저서 <우둥불> 내용과는 정반대로 용맹을 떨친 홍범도와 최진동, 최운산의 활약에 대해 좀 더 진전된 연구가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 1970년대 남북 체제 경쟁 속에서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된 아나키스트 김좌진 장군을 정치적으로 부풀려 활용한 측면이 매우 크다. 코뮤니스트와 아나키스트는 한국 사회 대중의 역사인식처럼 사촌 간도 아니고 비슷비슷한 사상도 아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지사들이 항일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다양한 사상을 수단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 제도권교육에선 아나키스트로서 죽어간 신채호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김좌진과 사촌동생 시야 김종진 둘 다 아나키스트 항일 독립운동가였음도 잘 가르쳐 주질 않는다. 그저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된 김좌진 장군으로, 그리고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떠올리게 할 뿐이다. 김좌진을 살해한 코뮤니스트 청년 박상실은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소속 독립군으로 일본군과 교전 끝에 전사했다.

그렇게 코뮤니스트와 아나키스트 간 독립운동 노선상의 헤게모니 다툼과 살상이 잔혹할 정도로 진행되었다. 이젠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신화에서 벗어나야 하듯이 「청산리 전투 = 김좌진」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21세기는 더 이상 국뽕 수준의 역사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는 시대는 아니지 않는가?

역사의 진실을 바로 보는 눈을 길러주는 것은 건강한 역사의식을 간직하는 첫걸음이다. 비록 굴곡진 근현대사를 안고 있는 한국 사회이지만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청산리 전투 = 김좌진」방식으로 영웅의 기록으로만 기억하게 할 순 없다. 그런 낡은 방식보다 지금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역사전쟁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가 새롭게 다시 쓸 수 있음을 알게 해야 한다. 역사교육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고 글쓴이는 생각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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