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조성된 서울대 <민주화의 길> 표지석(출처 : 하성환)
2009년 조성된 서울대 <민주화의 길> 표지석(출처 : 하성환)

지난 토요일 5차 <역사문화기행>은 글쓴이가 혁신학교에서 준비한 마지막 행사였다. 2009년 조성된 서울대 ‘민주화의 길’과 연세대 이한열 열사가 피격된 장소를 돌아보았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역사문화기행>은 늦은 오후 신촌 네거리 근처 이한열 기념관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계속 걷기만 했던 아이들이 힘들어했다.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경기도 시흥에서 서울까지 이동했으니 무리였으리라! 더구나 아이들은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듯했다. 서울대 정문 편의점에서 아주 가벼운 간식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출발했다.

서울대 4월 학생혁명기념탑(출처 : 하성환) 기념탑 뒷면에  김치호 군 일기  <오늘도 나는 정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글귀가 있다.
서울대 4월 학생혁명기념탑(출처 : 하성환) 기념탑 뒷면에  김치호 군 일기  <오늘도 나는 정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글귀가 있다.

먼저 서울대 4월 학생혁명 기념탑을 들렀다. 4월 학생혁명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 80%가 참여했다. 경찰이 쏜 흉탄에 고순자(응용미술과 3년), 박동훈(법학과 2년), 안승준(경제학과 3년), 유재식(체육교육과 2년), 손중근(국어교육과 4년), 김치호(수학과 3년) 6명이 희생됐다.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3학년 김치호 군이 실천한 거룩한 희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4월 19일 오후, 김치호 군은 고교생 10명과 함께 결사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소방차를 앞세워 경무대로 진격했다.

경찰은 1, 2차 저지선을 뚫고 진격하는 학생들과 밀고 밀리는 공방을 계속했다. 일제히 총탄이 빗발치면 학생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경무대로 진격했다. 경무대 진격 시위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계속되었다. 그 시간 내내 경찰의 총격으로 총상환자가 속출했다. 김치호 군은 경찰이 쏜 총탄에 하복부를 관통당했다. 총탄은 간과 갈비뼈를 손상시키며 출혈이 적지 않았고 상태가 심각했다.

그럼에도 김치호 군은 후송 책임을 맡은 수도육군병원 김용규 군의관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어린 고교생을 먼저 이송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수술 차례가 돌아왔을 때도 번번이 어린 중고생들에게 양보했다. 결국 뒤늦게 수술을 받은 김치호 군은 이튿날 아침 6시 순국했다. 김치호 군은 4월 19일 아침, 운명의 날을 앞두고 일기장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오늘도 나는 정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4월 19일은 4월 혁명 당시 100명이 넘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날이다. 그날이 화요일이었기에 세상은 ‘피의 화요일’로 부른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비(출처 : 하성환)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비(출처 : 하성환)

사회대 쪽으로 오르는 길에 김세진 열사(미생물학과 4년)와 이재호 열사(정치학과 4년) 추모비가 학생들을 맞았다. 1986년 전두환 폭압 정권에 맞서 신림 네거리에서 분신 항거한 열사들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주고 인문대 쪽으로 이동했다. 최우혁 열사(서양사학과 84년 입학, 87년 의문사)와 박종철 열사(언어학과 3년) 추모비가 중앙도서관 가는 길목에 있었다.

군부대 쓰레기 소각장에서 의문사한 최우혁 열사 추모비(출처 : 하성환)
군부대 쓰레기 소각장에서 의문사한 최우혁 열사 추모비(출처 : 하성환)

최우혁 열사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데모에 나서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병무청을 찾아가 군입대 영장을 앞당기려 했던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순간, 글쓴이 스스로 마음이 먹먹했다. 최우혁 열사는 부모님 앞에서 자신은 “군대 가면 죽는다”고 소리쳤다. 결국 군입대 몇 개월 만에 군부대 쓰레기 소각장에서 의문사했던 막내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어머니는 충격 속에서도 군의문사에 항거하며 투쟁했지만 “내가 아들을 죽였다”고 자책하다 몇 년 뒤 한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SPC 그룹을 비판하는 노동당 소속 서울대생 대자보(출처 : 하성환)
SPC 그룹을 비판하는 노동당 소속 서울대생 대자보(출처 : 하성환)

중앙도서관을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피 묻은 빵’ SPC 기업에 분노하는 대자보를 마주했다.

고교생 작품을 탄압한 현 정권의 위선을 비판한 서울대학생들 대자보(출처 : 하성환)
고교생 작품을 탄압한 현 정권의 위선을 비판한 서울대학생들 대자보(출처 : 하성환)

이어서 자유를 수없이 외치면서도 자유를 통제하는 ‘윤석열차’ 대자보를 마주했다.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며> 서울대 학생들이 부착한 대자보(출처 : 하성환)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며> 서울대 학생들이 부착한 대자보(출처 : 하성환)

그리고  ‘10‧29’ 참사를 대하는 현 정부의 위선과 무능을 비판하는 대자보도 마주했다.

1988년 5월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조국통일>을 절규하고  미국을 비판하면서 산화한 조성만 열사 추모비(출처 : 하성환)
1988년 5월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조국통일>을 절규하고 미국을 비판하면서 산화한 조성만 열사 추모비(출처 : 하성환)

우리 일행은 중앙도서관을 지나 88년 5월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조국 통일을 절규하며 할복 투신한 조성만 열사(화학과 84년 입학) 추모비를 찾았다.

1983년 중앙도서관 난관에서  전두환 군부정권 규탄 시위를 주도하던 황정하 열사는 경찰에 쫓겨 추락, 산화했다.(출처 : 하성환)
1983년 중앙도서관 난관에서 전두환 군부정권 규탄 시위를 주도하던 황정하 열사는 경찰에 쫓겨 추락, 산화했다.(출처 : 하성환)

이어서 시위 도중 경찰에 쫓겨 중앙도서관에서 추락해 산화한 민주열사 황정하(도시공학과, 83년 순국) 추모비와 89년 노동운동을 하다 산화한 노동해방열사 조정식(82년 물리학과 입학) 추모비도 찾았다. 민주화운동과정에서 700명이 넘는 서울대생들이 퇴학당하고 투옥되었다. 정학 처분을 비롯해 희생된 학생들만 4,000명이 넘는다.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죽임을 당한 학생들은 19명이다. <민주화의 길>은 꽃 같은 나이에 원통하게 죽임을 당한 젊은 넋들을 기리기 위함이다.

80년대 군부정권의 폭압에 항거하다 스러진 꽃다운 젊은 넋들을 추모하며 우리 일행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연세대로 향했다.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 동상(출처 : 하성환) 친일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인물 동상이 버젓이 대학 캠퍼스에 있다. 이런 뒤집힌 풍경은 낯설지 않다. 고려대(김성수), 인덕대(박인덕), 이화여대(김활란), 서울여대(고황경), 상명대(배상명)를 비롯해 여러 대학 캠퍼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막힌 풍경이다.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 동상(출처 : 하성환) 친일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인물 동상이 버젓이 대학 캠퍼스에 있다. 이런 뒤집힌 풍경은 낯설지 않다. 고려대(김성수), 인덕대(박인덕), 이화여대(김활란), 서울여대(고황경), 상명대(배상명)를 비롯해 여러 대학 캠퍼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막힌 풍경이다.

연세대 백양로 길을 따라 걷다가 길 안쪽에 백낙준 동상을 발견했다. 윤동주 시비로 향하던 발길을 멈추고 학생들과 함께 백낙준 동상 앞으로 다가갔다. 초대 총장 백낙준은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던 인물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백낙준(출처 : 하성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백낙준(출처 : 하성환)

그는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서 김성수, 김활란, 최규동과 같이 한국 교육을 좌지우지했던 친일 인사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엔 친일사학자 이병도(서울대), 신석호(고려대)와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전두환 정권 시절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된 인물이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라 학생들에게 우리 현대사의 뒤틀린 한 단면을 들려주었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였던 핀슨홀을 배경으로 (출처 : 하성환) 윤동주 시비에 새긴 <서시>는 전 국민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시다. 연세대 교수였던 참교육자 성래운 선생이 윤동주 시비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였던 핀슨홀을 배경으로 (출처 : 하성환) 윤동주 시비에 새긴 <서시>는 전 국민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시다. 연세대 교수였던 참교육자 성래운 선생이 윤동주 시비를 세웠다.

그리고 곧장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윤동주가 묵었던 기숙사 핀슨홀을 찾았다. 핀슨홀 앞엔 성래운 선생이 세운 윤동주 시비가 우뚝 서 있었다. 다시 백양로 길을 따라 내려오던 중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연세대 정문 바닥에 새긴 이한열 피격 장소 추모 동판(출처 : 하성환)
연세대 정문 바닥에 새긴 이한열 피격 장소 추모 동판(출처 : 하성환)

연세대 정문에 다다르자 우리들은 이한열 열사가 피격돼 쓰러진 장소에 새긴 추모 동판을 찾았다. 그리고 바닥에 새긴 추모 동판 글씨를 함께 읽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한열 열사  추모 동판을 둘러싸고 함께 기념 사진을(출처 : 하성환)
이한열 열사 추모 동판을 둘러싸고 함께 기념 사진을(출처 : 하성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임을 되새기며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신촌 네거리 골목길을 돌고 돌아 이한열 기념관을 찾았다.

이한열 기념관을 배경으로(출처 : 하성환)
이한열 기념관을 배경으로(출처 : 하성환)

일본 고교생들조차 우리나라로 테마 여행(일제식 용어 : 수학여행)을 와서 단체로 찾는 견학 장소가 된 이한열 기념관은 마침 토요일 휴관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굵어진 빗줄기 사이로 귀갓길을 재촉했다.

우리 학생들이 민주주의자로, 그리고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길 빌면서...

박토를 딛고 이 땅에 민주주의가 단단히 뿌리내리길 또한 빌면서...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