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22(토)에 혁신학교 학생들과 4차 <역사문화기행>을 다녀왔다. 올해 들어 네 번째 <역사문화기행>이다. 학생들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서 1차 ~ 3차 <역사문화기행>은 어쩔 수 없이 여름방학에 집중적으로 돌아다녔다.
맨 처음 다녀온 곳이 안산 「416 기억 교실」이다. 당일은 32도가 넘는 폭염이었지만 학생들과 무려 15,000보 이상을 걸었다. 학생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걸 보곤 한 편으론 미안했다. 그렇지만 방학이 아니면 어떻게 시간을 낼 수 있을가 생각하면 이런 날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두 번째 <역사문화기행>으로 다녀온 곳이 「조선어학회 항일기념탐」, 「주시경 마당」, 「일본군 위안부 수요시위」, 「성프란치스코 교육원 평화의 소녀상」, 그리고 백범 김구가 피살된 「경교장」이었다.
「경교장」에서 김구의 큰아들이자 독립운동가 김인 선생이 스물여덟 살 젊은 나이에 처연하게 죽어간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안중근 의사 조카이자 김구의 며느리인 안미생과 관련된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너무 더워서 냉면을 먹고 싶어 했는데 학교 예산이 부족해 멋진 음식점으로 들어가질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서울 시내 음식은 왜 그리 비싼지 학교 예산으론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그나마 경향신문사 근처 정동길 입구에 있는 큰 음식점에서 냉면을 주문받는데 냉면 가격이 무려 11,000원이다. 아무리 물가가 올라도 그렇지 냉면 한 그릇 가격이 11,000원이라니! 이런 세상을 살자니 은근히 뿔이 난다. 가격만큼 아이들이 만족했으면 무더위 속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서울 음식이 만족을 주는 경우는 드물 거라는 생각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역사문화기행>은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숨진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공사 중이라 아예 건물 안으로 들어가질 못했다. 그냥 바깥에서 학생들에게 설명하자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멀리 경기도 시흥에서 전철을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2시간 거리를 찾아왔는데 관람이 불가하다니 보통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모두 미리미리 연락하여 확인하지 못한 글쓴이의 불찰이었다.
대신 효창공원으로 가서 <3의사 묘>를 참배하고 학생들에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를 소개해 주었다.
특히 백정기 의사는 의열단원으로 무척 용모가 출중했는데 그에 관련된 어느 소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네 번째 <역사문화기행>은 경복궁과 서촌 일대를 돌아다니며 아이들과 함께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순댓국을 좋아해서 교사인 나도 마음이 놓였다. 맨 먼저 한국 사회 최대의 NGO <참여연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옥상에 올라갈 수 없어서 아쉬웠다.
<참여연대> 옥상에선 청와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인데 그렇질 못했다. 아무리 NGO 활동이라지만 NGO 활동가들도 주말엔 쉬어야 하니까.
<우당기념관>이 토요일엔 일찍 문을 닫기에 곧장 <우당 이회영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 또한 무슨 변고란 말인가? 9개월 전에 다른 장소로 이동했단다. 아이들에게 <신흥무관학교>와 영화 『암살』, 그리고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해주면서 많은 사진 자료를 함께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허탈했다. 그저 안내 팻말이 뜯긴 공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또한 사전에 미리 점검하고 확인하지 못한 교사의 불찰이다. 며칠 전에 예약하고자 전화를 두어 번 걸었을 때 받질 않길래 좀 불안했지만 공간 자체를 이동할 거라곤 감히 상상하질 못했다. 아무튼 아이들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오늘 4차 <역사문화기행>의 핵심 견학 장소인데 그렇질 못해 미안하고 허탈했다.
일단 아침을 먹지 못하고 온 학생들도 적지 않아서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순댓국과 설렁탕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근처 <무궁화동산>을 찾았다. <무궁화동산>은 궁정동 소재인데 박정희 피살 공간이다. 이곳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 상징 인물인 청음 <김상헌 집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인 <노덕술의 집터>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런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돼 연행되는 사진을 설명하니 아이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다며 반가워했다. 그렇다! 맨 앞에 끌려가는 놈이 바로 일제강점기 고문으로 스무 살 남짓 독립운동가를 무려 3명씩이나 죽인 고문귀 노덕술! 바로 그놈이라고 강조하며 설명해 주었다.
<무궁화동산>을 나와서 경복궁 궁내로 들어갔다. 조선의 정궁이 어떻게 다른지 아이들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던 공간을 설명해 주고 명성황후가 일본 정치깡패들에게 살해된 장소 <건청궁> 내 <옥호루>로 이동해 설명해 주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곱게 입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도 맑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청와대 앞길을 통해 한참을 걸어서 종로구 누상동으로 향했다. 윤동주 시인이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을 썼던 하숙집으로 갔다.
생각 없이 길을 걷다 보니 윤동주와 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던 제1세대 천재철학자 박치우를 아이들에게 언급한다는 걸 깜빡했다. 박치우는 윤동주와 숭실중학교 시절, 교수와 학생 사이로 인연을 맺었던 절친한 사이였다.
박치우는 해방 직후 남로당 박헌영 비서로 월북한 뒤 강동정치학원 부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직접 남하하여 빨치산 활동 와중에 군경토벌대에 사살된 비운의 지식인이었다.
연세대 <문우회> 3총사이자 기숙사에서 함께 시작(詩作) 활동과 비평을 했던 강처중 역시 남로당 언론 분야 간부였다가 이승만 정권에서 <정국은 간첩 사건>에 엮여 처형당한 비운의 친구였다. 강처중이 아니었으면 윤동주가 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고 ‘윤동주’라는 이름의 시인이 세상에 알려질 수도 없었다. 그만큼 강처중은 윤동주가 한국문학사에서 빛을 발하고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운 친구였다. 그런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주질 못한 게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주말을 맞아 젊은 연인들과 가족 단위 탐방객들이 많았다. 주변 소소한 상점들과 공방에서 풍기는 멋이 상당히 운치 있어 좋았다. 좀 더 올라가니 <수성동 계곡>이 나온다. 이름자 그대로 계곡 물소리가 맑게 들리는 수성동(水聲洞) 계곡인데 오늘은 계곡물이 없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산행을 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질 못해 못내 아쉬웠다.
학교장으로 퇴직한 숲 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니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참으로 잔인한 인물이란 생각이 든다. 조카 단종만 죽인 게 아니라 그전에 자신의 친동생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였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수성동 계곡에 단풍이 물들면 무척 아름다울 거란 생각을 하면서 시계를 보니 4시가 가까웠다. 16,000보 넘게 걸었던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제5차 <역사문화기행>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피살된 혜화동 로터리에서 시작해 서울 성곽길을 걷고 이란 출신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로 견학을 갈까 싶다. 아니면 연세대와 서울대 캠퍼스 투어를 하면서 민주화운동사에 대한 인물들 이야기를 들려줄까 고민 중이다.
아이들과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 그게 가장 큰 고민거리다. 10명 학생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날짜를 정하는 게 마냥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5차 <역사문화기행> 예정일에 우리 학교 다른 문화행사와 겹쳐서 부득불 참석을 못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 같아 조금은 걱정이 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