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지우기 - 오사카에서 동지들을 만나다

내가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두 번째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갇힌 것은 1977년 봄. 수감자가 많아 잘 때는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야 했는데 복도 건너편 같은 크기의 방에는 앳돼 보이는 처녀 김영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가슴에 빨간딱지를 붙이고 독방살이 하고 있었다. 가슴에 노란 딱지를 붙인 나와  김영희는 같은 나이 또래로 ‘요시찰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졌으므로 곧바로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거문도 간첩단 사건으로 부모, 오빠 등 가족 5명이 들어와 있었다. 해방 후 아들을 데리고 북으로 올라갔던 인물 좋았던 큰아버지. 1976년 가을 그의 아들(사촌오빠)이 동료 2명과 함께 배를 타고 늦은 밤 거문도의 작은아버지 집을 찾았다. 태어나 처음 만난 사촌오빠는 바로 집을 나섰는데 잠시 뒤 일행 중 한 명이 사촌오빠를 포함해 일행을 사살한 뒤 자수했고 일가족 5명은 간첩죄로 곧바로 붙잡혔다. ‘분단의 비극’이라고 짤막하게 말하고 쉽게 끝낼 수 없는 많은 사연 중의 하나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양심수, 사상범들의 근황을 찾을 기회에 그녀를 수소문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녀를 생각하면 ‘젊은 여성이 빨간딱지 낙인을 매단 채 대한민국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가는 한숨만 쉬어질 뿐이었다. 그러던 그녀를 2021년 카톡방에 뜬 영상 속에서 만났다. 815 특집으로 KBS가 제작한 다큐인사이트 ‘스파이’편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그녀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류영수의 아내가 되어 오사카에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리나케 수소문하여 몇 달 후 그녀가 재심 문제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번 만나기도 했지만 이번에 버킷리스트에 오사카여행을 집어넣은 이유 중 하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만난 김에 오사카에서 박정희 비자금 폭로 북 콘서트 7회차를 열어도 될 것이었다.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 조국이 버린 사람들은 군사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살인적인 고문을 하고 조작질하며 거짓말로 국민을 공포에 몰아넣고 이간질했던 사건의 희생자들이다. 결정적으로 북을 혐오하게 만들고 분단의 골을 깊게 파기 위한 끔찍한 대역범죄의 희생자들이다. 다행히 수십 년 후의 재심에서 그들은 무죄선고를 받았고 김영희를 포함한 가족 5명 역시 지난 9월 1일 무죄판결을 받았다. 45년 만에 벗은 가시 박힌 멍에다.  

일제가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 끌고 간 재일동포 1세들은 대개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사람들이었다. 해방 후 귀국하지 못한 그들은 2세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만들었고 한국은 그들을 모른 척했지만, 북한은 어려운 형편에도 그들의 뜻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꾸준히 도와주었다. 재일동포들에게는 사상의 자유가 있으니 조총련이든 민단이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고 김일성 자서전이든 박정희 자서전이든 마음대로 읽고 판단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솔직히 항일운동했던 김일성과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을 잡던 박정희 중에 누구를 존경하게 될까.

그들은 한국의 박정희와 전두환이 얼마나 악독한지 알지 못한 채로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안고 고국으로 유학을 왔다가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낚여 패대기 채였다. 독재자들에게 납북귀환 어부와 재일교포는 마음대로 주물러 천하의 악랄한 간첩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만만한 먹잇감이었다.

류영수는 부산대학원 화학과에 유학을 왔다. 광주 보병학교 교장에게 남북협상을 위한 제언을 했다가 곧바로 체포되고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까지 엮여 곤욕을 치렀다. 무기 징역형을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 김영희를 몇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7년 후 감형이 되어 출소한 류영수는 4년 전 먼저 출소한 김영희를 찾아가 바로 청혼을 했다. 김영희의 일터로 찾아가 근처 다방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보며 기다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를 ‘나사 빠진 사람’으로 여겼던 김영희도 차츰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피차 분단의 고통을 심하게 겪었던 터라 김영희를 향해 일편단심으로 돌진한 류영수의 노력은 아름다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고통과 사랑은 KBS 다큐인사이트 ‘스파이’편과 ‘간첩과 섬 소녀’ 편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곧 영화로도 만들어진다니 아무쪼록 많은 국민이 군사독재자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이 남북관계를 얼마나 꼬이게 만들었는지 우리의 암울했던 현대사를 제대로 보게 되기를 희망한다.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한 청년 류영수의 때 묻지 않은 아이디어를 놓고 무기징역에 처해야 한다고 설레발을 쳤던 검사, 판사, 대한민국 정부. 그 사건이 1970년대의 일이었는데 2022년 여전히 대한민국의 통일부 장관은 북한을 자극하는 대북 전단을 금지하는 법이 위헌이라고 소송을 내고 대통령은 북한을 대한민국의 주적이라고 설레발을 친다.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남북관계가 호전되었다가 수구 정부가 들어서면 다시 돌아가는 것은 미국이 과거 군사 독재자들 뒤에서 든든한 뒷배 노릇을 했으며 지금도 분단 기득권 세력의 뒷배가 되어 영구 분단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건 평화어머니회를 만들어 평화운동을 시작한 2015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초등교과서에서 삭제해 버린 분단고착세력들, ‘민족’이라는 개념은 전혀 안중에 없는 적폐 지도자들, 자국 땅에서 거부당하는 치명적인 생물실험실을 한국 내 군기지 안에서 비밀리에 마음 놓고 운영하는 미국군부….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험준하기 짝이 없다.

오사카에서 함께 만난 전설적인 인물 이철과 민향숙 부부, 기자 은퇴 후 기록영화를 찍고 있다는 니시무라(西村秀樹)씨와 함께 한 북 토크도 역시 보람되었다. 수년 전 일본의 평화헌법 9조가 노벨평화상을 받게 하자는 운동을 일본과 한국의 시민들이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 운동을 다시 추진하자는 의견도 나누었다. 일본의 평화헌법이 미국의 군사주의자들에 의해 무용지물로 전락하지 않기를,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의 시민들과 한국의 시민들이 함께 아시아의 평화를 일구어 세계로 평화를 확산시킬 수 있게 되기를….

NPD 박정희의 엄청난 비자금이 현재에도 경제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지만  국내의 기레기들은 애써 눈을 감고 있다.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제대로 된 민주정당이 들어선다면 반드시 박정희비자금환수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다.
NPD 박정희의 엄청난 비자금이 현재에도 경제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지만 국내의 기레기들은 애써 눈을 감고 있다.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제대로 된 민주정당이 들어선다면 반드시 박정희비자금환수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다.

 

오로지 북을 증오하게 하기 위해, 분단을 굳히기 위해 그리하여 안정적으로 길게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미국을 등에 업은 박정희와 전두환은 엄청나게 많은 간첩사건을 조작해 대었다.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소설 감이고 영화 감이다. 가장 최근의 판결인 김영희 사건도 추가로 집어넣어 부부에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이 더러운 역사를 교과서에 넣어 두고두고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로지 북을 증오하게 하기 위해, 분단을 굳히기 위해 그리하여 안정적으로 길게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미국을 등에 업은 박정희와 전두환은 엄청나게 많은 간첩사건을 조작해 대었다.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소설 감이고 영화 감이다. 가장 최근의 판결인 김영희 사건도 추가로 집어넣어 부부에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이 더러운 역사를 교과서에 넣어 두고두고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참 반가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동네 풍물 선생님의 사망 소식이 문자로 들어왔다. 함께 할 일이 많은 재주 많은 동지인데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내 앞길 역시 어찌 알 수 있으랴. 종전선언 평화협정 이끌어내기, 가짜 유엔사 해체, 박정희비자금 환수법 제정,  평화어머니 공동체와 명상공동체 마을만들기...

부지런히 버킷리스트 지우기에 속도를 내야겠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고은광순 주주  koeunks1@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