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 김구의 비서 이화림은 왜 망각의 인물이 되었을까

중국 연변 지역이나 조선족 사회에서 이화림(1905~1999)은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역사 교사들조차 이화림을 잘 모른다. 『한국사』 교과서 어디에도 이화림은 없다. 이런 역사 왜곡 현상들은 분단 상황이 초래한 결과다.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사회에서 코뮤니스트는 금기어였고 심지어 여성 코뮤니스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중으로 차별받은 탓이다.

항일 독립투사 이화림은 유관순만큼 널리 알려야 할 역사 속 인물이다. 물론 교과서에도 당연히 상세하게 기록해야 할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 군산과 청진에서 어린이집 교사를 하다가 중국 망명 후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0년대 ‘한인애국단 3인방’이 바로 이봉창, 윤봉길, 이화림이다.

그런데 온 국민이 이봉창, 윤봉길은 알아도 이화림은 모른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학교 교육을 통해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코뮤니스트이고 1905년생 동갑내기이지만 1980년대 후반 널리 알려진 님웨일즈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달리 30년이 지나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여성’이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2023년 1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17,644명 가운데 여성은 607명으로 3%를 조금 넘어섰다. 독립유공자 포상이 최초로 시행된 1949년부터 2017년까지 여성 독립유공자는 297명이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가부장제 틀을 조금 벗어나기 시작했다. 2017년까지 2%에도 미치질 못했는데 2018년 여성 60명이 서훈을 추서 받으면서 2%를 넘어섰다. 2019년에는 114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면서 크게 늘었고 2022년 3월 1일 현재 여성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인물은 567명으로 3%를 넘었다.

일제강점기 300만 명에 이르는 항일 독립운동가 가운데 순국한 인물이 15만 명이 넘는다. 그동안 서훈 심사대상자로 3만 명이 올라왔다. 그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인정받은 인물은 2023년 1월 현재 17,644명이다. 여성은 607명으로 겨우 3.4%이다.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는 보훈 행정조차 가부장제 틀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심사기준을 적용한 탓이다. 그런 측면에서 국가보훈처는 형식적 심사기준에 집착하기보다 항일운동의 내면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성의 내조 없이 남성의 독립운동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대부분 독립운동가로 보는 게 상식에 걸맞다. 특히 망명지 만주나 중국 관내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부인들이 그러하다. 독립운동가 가족들끼리 혼사가 이뤄진 측면이 컸고 부인의 내조 없이 독립운동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화림과 이혼한 조선의용대 총무조장 리집중(본명 이종희). 리집중은 의열단원으로 북경에서 김창숙, 류자명의 지시를 받고 밀정 김달하(이대 총장 김활란의 형부)를 처단한 인물이다.(출처 : 독립기념관)
이화림과 이혼한 조선의용대 총무조장 리집중(본명 이종희). 리집중은 의열단원으로 북경에서 김창숙, 류자명의 지시를 받고 밀정 김달하(이대 총장 김활란의 형부)를 처단한 인물이다.(출처 : 독립기념관)

이화림 역시 항일 독립운동가 김창국, 리집중과 두 번 결혼했고 두 번 이혼했던 인물이다. 다만 이화림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추서 받지 못하고 있는 결정적 이유는 6‧25 전쟁 당시 의사로서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참전한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두 번에 걸쳐 서훈 추서를 불허했다.

그러나 항일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으로 평가해야지 해방 후 이념의 잣대나 정치적 이해관계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항일독립운동사를 왜곡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항일독립운동사를 협소하게 만드는 매우 옹졸하고 잘못된 태도이다.

항일 독립운동에는 좌우가 따로 없다. 따라서 항일독립운동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정립하기 위해서도 민족주의-사회주의라는 이념의 틀을 넘어서야 한다. 나아가 해방 후 남쪽 정권에 참여했느냐 아니면 북쪽 정권에 참여했느냐를 심사기준으로 고집하는 것 또한 매우 적절치 않다. 이젠 냉전적 사고에서 조금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화림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일본으로 무사히 폭탄을 반입하도록 도운 실질적 조력자였다. 밤새 고민 끝에 이봉창 의사 팬티에다 수류탄 주머니를 달아 주었고 이봉창 의사가 처형당했을 때 크게 오열했던 인물이다. 게다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감행한 홍커우 공원 투탄 사건 때도 부부로 위장해 함께 식장 근처까지 이동했던 인물이다.

1932년 12월 19일 오사카로 압송된 뒤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 형틀에 묶이는 모습(윗쪽 사진)과 처형 직후 양미간에 붉게 피가 배어 나온 모습(출처 : 매헌 윤봉길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 사진을 글쓴이가 찍은 것임)
1932년 12월 19일 오사카로 압송된 뒤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 형틀에 묶이는 모습(윗쪽 사진)과 처형 직후 양미간에 붉게 피가 배어 나온 모습(출처 : 매헌 윤봉길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 사진을 글쓴이가 찍은 것임)

거사 직후 윤봉길 의사 역시 오사카로 압송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당했다. 십자가 형틀에 두 팔을 묶고 양미간 중앙을 정조준해 총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일제는 윤봉길 의사 시신을 쓰레기 하치장에 던져버렸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이화림은 또다시 크게 오열했다.

그런 이화림을 백범 김구는 왜 『백범일지』에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봉창, 윤봉길은 『백범일지』(돌베개)에서 19쪽 - 나남출판사는 이봉창, 윤봉길 두 개의 장으로 나눠 21쪽 - 에 걸쳐 소상히 기록으로 남겼음에도 백범 자신의 비서였던 이화림을 왜 철저히 외면했을까?

백범 김구는 밀정을 처단할 때 이화림과 함께 힘을 합쳐 처단했음에도 이화림을 왜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상하이 시절 이화림은 주변 사람들에게 ‘김구의 연인’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백범 김구가 가장 신임했던 인물이다. 백범 스스로 자신의 최측근으로 인정했던 인물임에도 왜 『백범일지』에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코뮤니스트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구는 코뮤니스트를 아주 싫어했다. 자신의 제자이자 상해 임정 경무국 경호원이었던 오면직을 시켜 머리와 가슴에 12발을 난사해 상하이에서 김립을 잔혹하게 처형한 인물이 김구였다. 김립은 상해 임정 당시 국무총리 이동휘의 비서장으로 김구의 직속상관이었다. 그는 항일변호사 허헌의 절친이자 당대 국제정세에 가장 능통했던 코뮤니스트 항일 독립지사였다.

돌베개 출판사 『백범일지』에는 김립 처형 소식을 전해 듣고 백범은 ‘통쾌하다’고 했을 정도로 코뮤니스트를 극도로 싫어했다. 김구 스스로 이화림에게 “코뮤니스트로 살아갈 거면 아예 인연을 끊겠다”고 단언했다. 그런 연유로 『백범일지』 어디에도 이화림에 대해 한마디 언급이 없다.

이화림은 평양 출신으로 본명은 이춘실이다. 그녀는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뛰어든 오빠들 영향으로 14살 어린 나이에 3‧1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군산과 청진에서 유아원 교사를 하면서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비밀 지하활동을 하던 중 오빠들처럼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 망명 당시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 김두봉의 주선으로 임시정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한인애국단 3인방 시절, 이화림은 ‘이동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초 임정은 극도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때라 이화림은 스스로 나물을 재배해 팔고 닥치는 대로 삯빨래와 수놓기를 하면서 생계를 감당해 나갔다.

이화림이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든 배경에는 어머니의 지지와 힘이 절대적이었다. 어머니는 항일 독립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딸을 위해 다음과 같은 시(詩)를 써주면서 격려했다.

“나는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고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리라!

비록 내가 죽을지라도

나의 영혼은 영원히 인간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내가 조국을 위해 죽는다면

일백 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

백골은 땅에 묻혀도

영혼은 항시 존재하기에

일편단심으로 그 뜻은 변치 않으리!”

이화림은 혁명 도시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법학과 간호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1935년 늦가을, 의열단의 영혼이자 정신적 지도자 석정 윤세주가 혁명 도시 광저우를 방문해 항일무장투쟁 촉구 연설을 했을 때 이에 감동했다. 그 연설에 감명받은 이화림은 스스로 조선민족혁명당 본부가 있던 난징으로 가서 가입했던 인물이다.

조선민족혁명당 당원들은 뒷날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최초의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의 주축을 이룬다. 임정 산하 군사 조직인 한국광복군이 1940년 9월에 창설되었으니 그보다 2년 앞서 1938년 10월 10일에 창설된 군대가 조선의용대다.

중국 무한에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 최초로 조직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 임정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서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 주력부대(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지역 태항산으로 이동하고 조선의용대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다. 제1열에서 맨 앞줄 오른쪽 여성이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딸 김위다. 김위는 조선의용대 제2지대 항일여전사로 김학철이 청년 시절 짝사랑했던 인물이다. 오른쪽 2번째 여성이 <조선의 콜론타이>로 불렸던 항일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북한 초대 보건상 허정숙이다. 네 번째 인물이 의열단장 김원봉, 다섯 번째 깃발을 쥐고 있는 키 큰 인물이 이화림의 두 번째 남편이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리집중이고 여섯 번째 인물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정신적 지도자 석정 윤세주이며 일곱 번째 인물이 김산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성숙이고 여덟 번째 인물이 허정숙의 남편이자 북한 초대 재정상 최창익이며 열한 번째 인물이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 동기이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으로 뒷날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 박효삼이다.
중국 무한에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 최초로 조직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 임정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서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 주력부대(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지역 태항산으로 이동하고 조선의용대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다. 제1열에서 맨 앞줄 오른쪽 여성이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김필순의 딸 김위다. 김위는 조선의용대 제2지대 항일여전사로 김학철이 청년 시절 짝사랑했던 인물이다. 오른쪽 2번째 여성이 <조선의 콜론타이>로 불렸던 항일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북한 초대 보건상 허정숙이다. 네 번째 인물이 의열단장 김원봉, 다섯 번째 깃발을 쥐고 있는 키 큰 인물이 이화림의 두 번째 남편이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리집중이고 여섯 번째 인물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정신적 지도자 석정 윤세주이며 일곱 번째 인물이 김산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성숙이고 여덟 번째 인물이 허정숙의 남편이자 북한 초대 재정상 최창익이며 열한 번째 인물이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 동기이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으로 뒷날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 박효삼이다.

이화림은 조선의용대(뒤에 조선의용군) 항일여전사로서 박차정처럼 일본군 진지 50m 근방까지 침투해 치열하게 선무공작과 전투를 수행했던 항일독립군이다. 해방 직전 김무정 장군의 권유로 옌안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이자 중국 관내 보건의료 공무원으로서 인민에 봉사했다. 한국전쟁 당시엔 의사이자 위생소 소장으로 참전했다가 미군 폭격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1960년대 후반 문화혁명 당시 반혁명분자로 낙인돼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검약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모은 돈을 조선족 어린이 문학 작가들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 1999년 임종 직전엔 자신의 전 재산을 조선족 학교에 기부할 정도로 민족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다.

중국에선 1994년에, 한국에선 2015년에 번역 출간된 <이화림 회고록>(출처 : 차이나하우스, 한겨레 윤형중 기자)
중국에선 1994년에, 한국에선 2015년에 번역 출간된 <이화림 회고록>(출처 : 차이나하우스, 한겨레 윤형중 기자)

이화림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중국인이 쓴 기록을 중국으로 유학을 갔던 박경철 연구자가 2015년 『이화림 회고록』으로 번역, 출간하면서부터다. 이제 역사학계와 역사 교육계에서도 이화림을 연구하고 기록해 대중의 기억 속에 남겨야 한다. 그 일이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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