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항일독립지사 '김립'에 대한 회상

- 김립에 대한 서훈 추서를 고대하며 하성환 주주통신원l승인2019.03.10l수정2019.03.1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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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백범 김구에 의해 처단된 항일독립지사 김립

백범 김구는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백범 김구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쉽지 않습니다. 분단된 현실 속에서 지나치게 과장되고 미화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백범일지』를 중심으로 백범 김구의 공과 과를 냉정하게 평가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먼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도상에서 보인 항일독립운동가로서 백범 김구의 과오를 냉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위인전기로서 『백범일지』는 재미있는 편입니다. 해방 후 1947년 국사원에서 처음 교열본이 나올 때 편집자의 윤문이 있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1994년 백범일지 원본이 공개된 뒤 『백범일지』를 춘원 이광수가 윤색해 주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시중에 20여 종류로 출간되었는데 윤문 탓에 마냥 재미로 읽기에는 10% 무거운 느낌을 던져줍니다.

우선 『백범일지』는 유서입니다. 10살 안팎의 어린 아들들(김인, 김신)이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는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편지형식으로 쓴 글이지요. 『백범일지』 상권 책머리에 유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범일지』 상권을 쓸 때 김구의 나이는 50을 훌쩍 넘긴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언제 일제의 촉수에 걸려 죽을지 모르는 엄혹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백범 김구는 현상금 액수에서 두 번째로 많은 거물로서 일제가 가장 잡고 싶어 했습니다. 『백범일지』 하권에 안전한 프랑스 조계를 벗어나 일본 경찰에 협조적인 영국 조계로 김구를 유인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백범 김구에게 내걸린 현상금은 60만원으로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00억이 넘었으니까요.

여기서 잠깐! 일제강점기 시절 현상금 액수에서 가장 많은 금액이 나붙었던 인물은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입니다. 100만원이었으니까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200-300억 정도 됩니다. 영화 『밀정』에서처럼 조선인 고등계 경찰 「하시모토」가 숱한 밀정과 끄나풀들을 거느리고 등장할 정도로 김원봉 체포에 혈안이 돼 있었던 것이 당시의 실상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현상금 1위인 약산 김원봉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제가 가장 잡고 싶어 했던 제1의 인물! 주재소에서 의열단임을 밝혔을 때 취조하던 일본인 순사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일이 발생하게 만들 정도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의열단의 상징적 인물! 항일애국지사 김원봉이 아직도 남과 북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하고 있다는 현실은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생존을 위해 황급히 도망치듯이 월북했습니다. 그것은 미군정 시절 백색테러의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북쪽으로 탈출한 후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하며 김일성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숙청돼 통분 끝에 감옥에서 자결합니다. 남쪽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북쪽에서는 김일성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하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은 보훈의 관점에서 그동안 너무도 옹졸했으며 또한 편협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백범일지』 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로서 강인우 경부(오늘날 경정에 해당, 경찰서장 총경 바로 아래 직급)는 백범을 체포하러 상해에 직접 잠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협박하거나 돈으로 매수하여 조선인 밀정에게 권총을 주어 살해하도록 음모를 꾸미는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들의 교활한 수법이 소개되기도 합니다.

젊은 날 백범은 의협심 넘치는 인물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18살에 황해도 동학 접주가 되어 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서 해주성을 공격하지요. 나아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복수로 일본군 첩보장교 쓰치다를 황해도 안악 치하포 주막에서 살해합니다. 『백범일지』 연구의 권위자이자 1997년 주해본을 펴낸 도진순 교수는 일본 육군 중위를 일본 외무성 자료를 참고해 일본 나가사끼현 대마도 이즈하라항 상인임을 밝혔습니다. 바로 그 쓰치다를 죽이는 장면이 2017년 10월에 개봉된 영화 『대장 김창수』에 나옵니다. 20-22살의 청년 시절, 사형수로서 인천감옥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주먹으로 때려죽이지만 『백범일지』에는 일본군의 칼을 빼앗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하여 죽입니다.

▲ 2017년 10월에 개봉돼 38만 명이 본 영화 <대장 김창수>의 한 장면(출처 : 네이버)

백범 김구 선생은 20대 초반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한 뒤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리소에 수감된다. 수형생활 도중 감옥에 있던 죄수들을 상대로 글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틈틈이 국문 강습회를 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로 베고 솟아나오는 피를 주먹으로 움켜쥐어 마시고 자신의 얼굴에 피 칠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떳떳하다고 방까지 붙이며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 대목은 백범 김구의 의협심과 기개를 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백범 김구는 식민통치의 왜놈들만 죽이는 게 아니지요. 김도순이라는 17살 나이어린 조선인 밀정도 처단합니다. 4년 전 출간된 코뮤니스트 항일여전사 『이화림 회고록』에는 밀정으로 의심되는 나이든 조선인을 50대의 백범 김구가 교살해 죽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죽인 뒤에 시체에 대고 일제의 끄나풀 짓을 하는 더러운 놈이라고 침을 뱉습니다.

문제는 일제의 앞잡이가 된 밀정들만 죽이는 게 아닙니다. 같은 항일독립운동가를 죽이는 데에도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백범기념사업회에서 매년 다량으로 배포하는 나남출판사 『백범일지』 에는 그 대목이 삭제된 채 간단히 처리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역사학자가 사실에 입각하여 알기 쉽게 풀이한 돌베개 출판사의 『백범일지』에는 상세히 소개돼 나옵니다.

왜 백범기념사업회 쪽에서는 나남 출판사를 고집할까요? 한국사회 최장기 스테디셀러이자 밀리언셀러인 책을 그것도 매년 수많은 중고등학교에다가 무료 배포하면서 말이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백범을 미화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겠지요. 첫째 아들 김인은 해방 5개월 전 충칭에서 병사합니다. 페니실린 주사 한 대를 놓아달라는 며느리의 간청에도 페니실린 주사약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며 임정 주석 백범 김구는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결국 독립운동가 김인은 28살 젊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쓸쓸히 숨을 거둡니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백범의 며느리 안미생은 해방 후 경교장까지 시아버지를 모시고 환국합니다. 그렇지만 돌연 종적을 감추고 미국으로 떠난 후 연락을 끊어버리지요. 둘째 김신 장군은 박정희 정권 때 교통부장관과 유신정우회 국회의원까지 합니다. 그 아들 김양은 이명박 정권 시절 국가보훈처장을 지냈지요. 그는 박근혜 정권 때 외국 방위산업체로부터 10억 원대 뇌물을 받은 방산비리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백범 가계는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백범의 손녀딸이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고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과 관련을 맺고... 제가 볼 땐 애국자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죽음! 그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먼저 나남출판사 『백범일지』에는 ‘김립’의 죽음에 대한 기술이 빠진 채 ‘김립’의 죄악상만 서술돼 나옵니다. ‘김립’이 러시아에서 받은 자금으로 광동(廣東) 출신 중국인 첩을 두고 향락에 빠진 인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 독립운동자금을 부당하게 유용한 매우 지저분한 공금횡령범으로 ‘김립’을 묘사합니다. 이는 ‘김립’의 처단을 언급하지 않은 채 항일독립지사를 살해한 이유를 합리화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한형권이 그 돈을 지니고 서베를린에 도착할 때에 맞추어 이동휘는 비서장 김립(金立)을 밀파하여 한형권을 종용해서 빼돌렸다. 그 금괴는 임시정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김립은 그 돈으로 북간도의 자기 식구들을 위해 토지를 매입했고 이른바 공산운동자라는 한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그 중 얼마를 지급했으며 자기는 비밀리에 상해에 잠복하여 광동(廣東)여자를 첩으로 맞아 향락에 빠졌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묻게 되자 이 씨는 총리 직을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주했다. 한형권은 다시 러시아 수도로 가서 통일운동을 하겠다며 이유를 설명하고 다시 20만 루블을 갖고 상해에 잠입하여 공산당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 주고 이른바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했다."

이 대목에서 나남출판사 『백범일지』는 사실에 충실하게 기술돼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백범 김구의 기억에 착오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1차 독립운동 자금 40만 루블은 서베를린 즉, 유럽을 거쳐 들어오지 않았고 시베리아 옴스크를 거쳐 들어옵니다. 2차 자금은 한형권이 유럽을 거쳐서 상해에 반입하지요. 아마도 백범 김구가 1차와 2차를 혼동한 데서 생긴 착오일 것입니다. 그리고 2차 독립운동자금을 수령하러 갔을 때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역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 즉,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이유를 설명하고'로 고쳐 기술해야 맞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 레닌이 혁명 초기 러시아가 불안정한 상태임에도 약소민족국가 독립을 위해 운동자금을 아낌없이 전해준 것은 약소민족의 식민지 해방을 지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김립’은 한국사에서 사라진 인물입니다. 분단이 낳은 비극이지요. 물론 해방된 지 73년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항일독립운동가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은 허다했습니다. 1910년대 초 연해주 즉,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인사회의 갈등이 노골화합니다. 기호파(경성파)-서북파(평안도/함경도) 또는 인물 중심으로 갈리면서 이상설의 심복이자 항일독립지사인 정순만 피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순만은 1906년 이동녕, 이상설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웠던 인물입니다. 헤이그 특사로 이상설이 유럽으로 파견될 때 연해주 한인과 미주 교포를 대상으로 모금해 1만8천원의 여비를 마련해 주었던 항일독립지사입니다. 이상설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워 1910-1911년 정순만이 암살 위기에 처하자 이상설은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며 지켜주기도 하지요. 그러나 정순만은 도끼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 대한광복회 부사령이자 만주 책임자 백야 김좌진 장군(출처 : 두산백과)

김좌진 장군은 아나키스트였다. 대한광복회가 북로군정서로 확대 발전되면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무관들과 함께 1920년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주석에 취임했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간 살육의 대표적인 사건이 아나키스트 김좌진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산리 전쟁의 주역 바로 김좌진 장군이지요.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간 살육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는 의열단 출신이자 일제로부터 세 번째로 현상금이 크게 나붙었던 정화암(본명 정현섭) 선생의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에 나옵니다. 이회영, 신채호를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한 정화암은 하얼빈-해림시-영안현을 중심으로 같은 항일투사들끼리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간 전개된 살벌한 살육전을 소상하게 적고 있습니다.

"해림을 중심으로 한족총련지역(필자 주 : 아나키스트 본거지)과 영안현을 중심으로 공산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경비를 돌던 교민이 20여 세 가량의 청년공산당원을 잡아왔다. 하얼빈쪽에서 공산당 본거지인 영안현으로 가려면 해림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가끔 공산당원들이 해림역에서 체포되어 오는 수가 있었다. 체포되어 온 사람들은 거의 사살해 버렸다. 자루에 산 채로 묶어 넣고 다리 위에서 얼음이 언 강 위로 떨어뜨려 익사시키는 방법, 땅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묶어 그 구덩이에 세워놓고는 흙으로 묻어 죽이는 방법, 넓은 벌판으로 데려가 도망치게 하고는 뒤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방법 등 서로가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공산당원이라고 잡혀온 그 청년도 순진하고 총명하게 생겨 아까웠다. 언제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청년을 설득하여 내 사람으로 만들어 볼 결심이었다. 그런데 내가 산시(山市)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사이 그 청년은 사살되어 버렸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잡혀 왔다."

아까운 목숨들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비극적 항일독립지사 ‘김립’의 죽음입니다. ‘김립’의 죽음 또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갈등에서 빚어진 민족적 비극이자 참극이었습니다. ‘김립’은 1910년대와 20년대 초를 대표하는 걸출한 항일독립지사이자 사회주의자입니다. ‘김립’의 죽음은 실제로 민족운동계의 크나큰 손실이었습니다.

▲ 1920년대 초반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부들 사진(독립기념관 소장)

이극로, 이동휘, 박진만, 김립(앞줄 왼쪽부터)김철수, 계봉우, 미상(뒷줄 왼쪽부터) 이극로는 1930-1940년대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지도자이고 이동휘는 한인사회당 위원장, 박진만은 한인사회당 모스크바 파견대표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레닌과 대담하며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자금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뒷줄 김철수는 김립 피살 직후 독립운동자금을 관리했던 인물로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역임한다. 계봉우는 김립의 절친이자 김립의 권유로 한인사회당에 가입한 역사학자이다.

‘김립’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의 최측근으로 임정 국무원 비서장(차관급)에 임명된 인물입니다. 국무원 비서장은 외무차장, 내무차장, 법무차장, 재무차장, 군무차장 등 각부 차장(차관)회의를 주재하는 위치이자 상해임정의 실질적 업무인 인사와 재무를 통괄했던 지위였습니다. 또한 ‘김립’은 1918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립일원이기도 하지요. 하바로프스크에서 창립 당시 이동휘는 위원장, 김립은 선전부장으로서 기관지 「자유의 종」 책임주필을 맡습니다. 한인사회당은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으로 확대 발전됩니다. 다른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과 갈등 끝에 빚어진 사건이 한국사 교과서에 소개돼 나오는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 사변)입니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에 참전하고 일본군과 백위파에 맞서 적색빨치산 부대에 참여했던 오하묵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었습니다. 오하묵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요. 반면에 박일리야도 적색빨치산 출신이자 사할린의용대 대장으로 상해파 고려공산당 군사위원이었습니다. 양대 파벌의 군권다툼으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 것이지요. 수백 명의 한인무장독립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항일독립운동사상 가장 끔찍한 참극을 빚습니다.

경무국장 백범 김구가 한 때 자신의 상관이자 혁명동지였던 ‘김립’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데엔 모스크바로부터 온 독립운동자금이 깊숙이 관련돼 있습니다. ‘김립’을 독립운동자금을 빼돌린 파렴치한 ‘공금횡령범’으로 본 것이지요. 따라서 상해 임정은 ‘김립’을 극형에 처해야 할 파렴치범으로 규정했고 실제로 그런 내용의 임정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임정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 외 이동녕, 노백린, 이시영 등 각부 총장들은 1922년 1월 26일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합니다. 그 포고문의 일부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국가 공금을 횡령하여 개인주머니를 살찌우고 같은 무리를 불러 모아 공산이란 미명 하에 숨어서 간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며 '그 죄가 극형에 처할 만하다'고 극렬히 성토합니다.

문제는 그 독립운동자금을 볼세비키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박진만, 한형권, 이한영 등 한인사회당 출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러시아어에 매우 능통했고 그런 이유로 한형권은 상해 임정의 대표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됩니다. 러시아 모스크바를 찾아가는 길목마다 한형권은 북을 울리며 태극기 물결 속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습니다.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국빈대우를 받으며 모스크바에서 외무차관 카라얀의 영접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당수이자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가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한 때문이었습니다.

한형권과 박진만은 러시아 볼세비키 권력자 레닌과 직접 대담하며 상해임시정부 인정과 함께 레닌으로부터 거액의 운동자금을 약속 받습니다. 박진만은 조선독립운동사에서 망각의 존재이지만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로서는 대단한 지위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코민테른에 조선의 상황을 보고하고 기관지에 투고하였으며 대중연설을 단행했던 인물입니다. 임정 특사 한형권과 함께 한인사회당 당원으로서 상해임시정부를 소비에트 러시아가 승인하도록 만든 주역이었습니다. 항일독립운동가 가운데 유일하게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던 거물이지요.

해방 후 한형권의 항일혁명가 『회상록』에 따르면 민족해방운동의 자금으로 200만 루블(오늘날 화폐가치로 2500억 원이 넘는 거액임)이라는 거액을 약속 받지요. 문제는 당시에 러시아 혁명 직후 내전 상태라 통화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금으로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금 궤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일단 40만 루블을 먼저 받고 남은 자금은 러시아 외무위원회 즉, 외무부에 맡겨두었습니다. 40만 루블의 금화는 모두 7궤짝인데 한 궤짝의 무게가 성인 남자 5명의 무게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 무거운 금을 시베리아 내전 상태를 뚫고 무사히 상해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지만 시베리아 지방은 차르 체제를 지지하는 백위파(반혁명파)가 통치하던 구역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주의 국가들조차 백위파에 가담하여 러시아 혁명군대인 적위대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지요. 항일독립운동가들은 그 내전 상태에서 안전지대를 경유하면서 지그재그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금 궤짝을 갖고서 말이지요. 당시 김립은 제국주의 열강이 주도한 파리강화회의보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에 주목했습니다. 세계정세의 흐름을 읽었던 김립은 1918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건합니다. 그리고 1919년 이동휘를 설득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를 종용합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과 외교관계를 열고자 고투했던 최초의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레닌으로부터 민족해방운동자금을 획득해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김립이야말로 3·1운동 전후 시기인 1918-1921년 국제정세의 흐름을 선구적으로 분석하면서 대러시아 외교채널을 열고자 맹활약했던 항일독립지사였습니다. 따라서 레닌의 독립운동자금은 약소민족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 지원된 것으로서 당연히 김립에 귀속된 것입니다. 나아가 조선에 대한 독립운동자금의 수용 주체는 김립을 위시한 한인사회당이었고 자금 사용처와 결산 보고의 주체 역시 한인사회당에 귀속된 책무였습니다.

2000년대 이후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코민테른 기밀문서들이 우리말로 번역돼 공개되면서 그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백범 김구는 경무국장 시절 자신의 휘하에 20여 명의 무장 경호원들 가운데 노종균, 오면직을 시켜 ‘김립’을 살해합니다. 1922년 2월 8일 상해 중국인 밀집지역에서 머리와 가슴에 12발을 쏘아 즉사시키지요. ‘김립’ 피살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는 제국주의 일본 외무대신 앞으로 「공산당 수령 김립 살해에 관한 건」이라는 기밀문서를 보낼 정도로 ‘김립’ 피살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돌베개 출판사의 『백범일지』에는 ‘김립’에 대한 내용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나옵니다. ‘김립’의 죽음에 대해 백범 김구는 ‘통쾌하다’는 세간의 평가와 함께...

"마침내 한(필자 주 : 한형권을 가리킴)이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러시아 최고지도자인 레닌 씨가 친히 맞이하며 독립자금은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고 물었다.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을 요구하였다. 레닌은 웃으면서 반문하였다.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으로 될 수 있는가?" 한은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조달한다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레닌은 자기 민족이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즉시 러시아 외교부에 명령하여 현금으로 200만 루블을 지급하게 하였으나 외교부는 금괴운반 문제 때문에 시험적으로 제1차 40만 루블을 한형권에게 주었다. 한이 시베리아에 도착할 시기에 맞추어 이동휘는 비서장인 김립(金立)을 밀파해 한형권을 종용하여 금괴를 임시정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서 빼돌렸다. 김립은 이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 그리고서 자기는 상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중략) 정부의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등 청년들에게 총살당하니 사람들이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노종균, 오면직은 백범 김구와 같은 황해도 출신 28살의 동갑내기 열혈 청년들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황해도 안악지국에서 활동했던 항일지사입니다. 1921년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건이 일제에 발각돼 상해로 망명한 상태였지요. 당시 상해 임정 경무국(경무국장 김구)은 김립을 처단할 방안을 세워두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노종균과 오면직이 상해로 망명해 오자 백범 김구는 이들을 비밀경호요원으로 채용하여 김립 처단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게 합니다.

② 국제정세에 탁월한 항일독립지사 '김립'의 항일운동

그러나 오늘날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립’은 『백범일지』의 표현처럼 지저분한 항일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김립이 피살되자 김립에 이어서 한인사회당 재정부장을 맡은 김철수는 모스크바 운동자금이 임시정부 공금이 아니라고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김철수는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강달영의 제2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뒤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역임한 인물입니다. 실제로 기밀 해제된 코민테른 보고서에는 모스크바 운동자금의 수령자와 정산 책임자를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억울하게 그리고 비극적으로 같은 동지들에게 살해당한 ‘김립’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김립’은 러시아 소비에트 정권과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만큼 국제정세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본래 ‘김립’은 1880년 함경북도 명천 태생으로 본명은 김익용(金翼容)입니다.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가명을 여럿 썼듯이 김립 또한 왕진덕, 이세민, 양춘산 등 가명을 썼습니다. 1922년 2월 피살 당시 중국 『차이나 선』지에선 처음에 김립을 40대 중국인 양춘산으로 보도했습니다. 김립이 중국인 국적을 취득한 상태였고 복장도 중국인 차림이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 '김립'임이 드러납니다.

'김립'은 동향 출신인 항일변호사 허헌과 일본 유학 시절 조선에 입헌군주국을 세워야겠다는 다짐을 이름자에 반영한 것입니다. 대한제국시절의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주권을 국민에게 귀속시키는 입헌공화제를 지향하는 시민혁명을 꿈꾸었던 것이지요. 김익용은 입헌의 앞 글자 ‘립(立)’ 을 따서 김립으로, 허헌은 입헌의 ‘헌(憲)’자를 따와서 허헌으로 이름지었습니다. 허헌은 가인 김병로, 애산 이인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항일변호사였지요. 조선공산당 사건을 전담 변호했으며 신간회 활동 당시 2기 신간회 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물론 '김립'과 함께 서북학회 활동도 같이 했던 인물이지요. 일제강점기 조선의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을 동시에 추구했던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이자 조선의 콜론타이! 바로 허정숙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 항일 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조선의 콜론타이 허정숙(출처 : 문화콘텐츠 닷컴)

허정숙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이자 서무부장을 맡아 광주학생운동 서울시위를 배후 지휘한 인물이다. 조선의용군 항일여전사였으며 해방 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초대 보건상에 취임한다.

'김립'은 1900년대 전국적인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공개적인 애국계몽단체인 「서북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해 활약하였습니다. '김립'은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과 정치학 등 근대학문을 공부한 뒤 1910년 2월 졸업합니다. 「서북학회」는 구한말 대표적인 교육구국운동단체이자 정부를 비판했던 정치결사체, 즉 정당의 역할을 수행했던 애국계몽기관입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 이갑(본명 이휘선)이 「서북학회」 총무였고 안창호, 유동렬, 김립, 윤해 등 모두 지략이 뛰어나고 말을 잘하는 청년논객들의 정치조직으로서 항시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1910년 한일병탄 직전 '김립'은 어느 날 홀연히 「서북학회」 핵심 활동가들인 이갑, 안창호 등과 함께 해외망명을 단행합니다. '김립'은 윤해, 이갑과 함께 인천으로 가서 산동반도 청도를 경유해 상해로 망명하고 안창호는 황해도 어느 어촌에 숨었다가 목선을 타고 망명합니다.

김립은 망명 후 1910년 8월'한일합방'에 반대하는 항일운동단체 「성명회」 활동에 이상설, 유인석과 함께 참여합니다. 그리고 1911년 초 「간민교육회」에 참여하여 북간도 국자가에 「길동기독학당」을 설립해 학감 겸 법률정치 담당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이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 이종호와 함께 항일운동단체 「권업회」를 창설하고 총무와 전형위원을 맡습니다.

1910년-1911년 당시 연해주 한인교포사회는 어느 지역 출신인가에 따라 파벌이 나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항일독립투쟁의 명망가 이름을 따서 파벌이 형성되기도 했지요. 김립은 이동휘, 신채호, 안창호 등과 함께 이갑을 수장으로 하는 이갑파에 속했습니다. 「서북학회」 활동을 함께 했던 인물들이지요. 그 외에 의병장 출신의 홍범도, 유인석, 이범석이 속한 이범윤파, 그리고 연해주 한인사회에 오래 전에 정착하여 재력가로서 민족교육과 언론 활동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문창범이 속한 최봉준파, 마지막으로 분파 싸움 끝에 피살된 정순만파가 존재했습니다. 연해주 항일독립운동 1세대인 헤이그 특사 이상설은 정순만과 형제 간 만큼 가까웠지만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1912년 '김립'은 이동휘, 이상설과 함께 한인교포 자녀를 위해 항일민족교육기관인 「광성학교」와 「길성학교」를 세웁니다. 특히, 「광성학교」는 북간도 용정의 「명동학교」와 함께 대표적인 항일민족교육의 본산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지요. 적극적으로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다보니 「명동학교」 다음으로 일제가 가장 주목했던 학교였습니다. 1913년에는 왕청현 라자구 대전자에 독립군 무관학교인 「동림무관학교」를 창설해 청년투사들을 길러냅니다.

'김립'은 「동림무관학교」 시절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또 교관으로 독일군 장교를 채용합니다. 1916년 김립은 러시아 영토에서 항일운동을 모색하던 중 제정러시아 당국에 독일 스파이혐의로 체포됩니다. 독일군 장교 채용이 빌미가 된 사건이지만 1917년 2월 혁명 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됩니다. 석방 직후 김립은 연해주 혁명의 중심도시인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이한영과 함께 출판사 「보문사」를 설립하고 편집주임을 맡습니다. 그리고 「문덕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아 활동합니다.

이어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면서 김립은 러시아 혁명에 주목합니다. 김립은 세계정세 속에서 러시아 혁명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식민지 상태인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러시아 혁명 정부에 크나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김립'은 연해주 한인 청년들을 규합해 적위대와 연합하여 항일빨치산 활동을 전개합니다. 김립은 연해주 극동지방 혁명의 중심지인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하여 1918년 1월 분열된 러시아령 한인사회 통합에 매진합니다. 그 결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개최를 합의하고 부회장으로 선임됩니다. 그리고 1918년 4월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을 역임합니다.

이 때 만난 인물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인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한인 2세로서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하고 우랄지역 노동자 조직에 깊숙이 관여했던 김알렉산드라는 극동지방 혁명의 중심도시 하바로프스크 시 당서기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러시아 볼세비키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여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인물입니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보편적 이념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연해주 조선인 독립운동세력 간에 형성된 고질적인 파벌과 분열을 극복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운동을 한 단계 성숙시킨 사회주의 혁명가였습니다.

▲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실천한 한국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출처 : 네이버)

김알렉산드라는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에 능통한 한국인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 혁명 여성으로서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했다. 사회주의 정당으로선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으며 반혁명파(백위대)에 체포, 처형될 당시 극동지방 혁명의 중심도시 하바로프스크 시 당서기로 활약 중이었다. 200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시베리아와 연해주는 혁명을 옹호하는 적위대(혁명군대)와 반혁명세력인 백위대 간 내전 상태가 한동안 지속됩니다. 그 내전의 와중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주의 세력들은 1918년 8월 이후 자국의 군대를 시베리아에 출병시켜 러시아 반혁명 세력인 백위대를 지원합니다. 시베리아를 비롯한 연해주 볼셰비키와 「한인사회당」은 반혁명파인 백위대와 제국주의 일본군과 맞서 싸우면서 부득불 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크 시에서 철수합니다. 적위대-백위대 시베리아 내전 당시 불행히도 탈출 과정에서 김립, 유동렬, 이한영,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모두 체포됩니다. 김립, 유동렬 등은 중국인 상인이라고 둘러대고 석방될 수 있었지만 김알렉산드라는 스스로 볼셰비키이자 하바로프스크 시 당서기임을 당당히 밝히고 처형당합니다.

한편, '김립'을 위시한 이동휘, 박진만, 한형권, 이한영 등 한인사회당 핵심세력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처리문제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약소민족의 독립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요. 한 마디로 상해 임정의 이승만, 김구와 달리 영미 제국주의 서구열강의 탐욕을 일찌감치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김립은 대소 외교 즉, 러시아 볼세비키 정부와 관계 개선을 시도합니다. 그 와중에 「한인사회당」 간부회의에서 상해 임시정부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정합니다. 여기에도 김립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실제로 「한인사회당」 당수 이동휘는 상해 임시정부 참여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인사회당」 전략기획가 김립의 설득에 당 차원에서 참여하게 됩니다.

‘김립’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정세에 매우 밝았고 독립운동방략에 치밀했으며 조선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깊이 사고했던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전후한 시기 ‘김립’은 제국주의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의 침략성을 몸소 겪으며 국제정세를 읽었던 인물입니다. 그 결과 러시아 적위대(혁명파 군대)와 연대해 적색빨치산 활동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후원을 받는 백위대(반혁명파 군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하지요.

나아가 1918년 「한인사회당」 창당 이후 파리강화회의 등 제국주의 열강에 호소하기보다 피압박 약소민족해방에 앞장선 러시아 볼세비키 정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합니다. 1919년 11월 이동휘와 함께 상해 임정에 참여하는 것도 '김립'의 깊은 정세분석의 결과에 따른 조직적 결정이었습니다. 특히 3・1운동이 무참히 진압된 이후 모스크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 박진만, 박애, 이한영을 「한인사회당」 전권대표로 파견해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적극적으로 호소합니다. 그만큼 국제정세에 밝았으며 국내 조직 활동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실제로 1920년을 전후한 시기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김립’의 위상은 매우 컸습니다. 일제의 첩보자료에도 ‘김립’을 '공산당 수령'으로 또는 '배일흥한(排日興韓)'의 대표적 인물로 일제 사찰의 표적이었습니다. 「한인사회당」 당원으로서 이동휘와 의형제를 맺었던 역사학자 계봉우는 '상해 정계에서 김립을 능가할 인물은 없었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너무도 아까운 인물을 죽인 것이지요. 실제로 임시정부는 김립과 한형권을 죽이려고 비밀경호요원들을 중심으로 테러단을 만들어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고 김립을 살해하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한형권이 베를린 주재 소련대사관을 거쳐 2차 자금으로 가져온 20만 루블을 빼앗기 위해 의열단 김상옥을 사주해 항일독립지사 윤해를 죽이려 했습니다.

윤해는 '김립'과 함께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서북학회」에서 활동하다 망명한 항일독립투사이자 코뮤니스트입니다. 국외망명 후 해외 독립운동기지가 가장 먼저 건설된 북간도 지역에서 '김립'과 함께 조선인학교 설립을 통해 민족교육운동을 펼쳤습니다. 1910년대 「간민교육회」 부회장, 1920년대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 주필을 역임한 항일독립지사이지요. 파리 유학 후 1921년 말 상해에 도착했을 때 윤해는 임시정부 해체와 함께 새로운 중앙정부 창설을 주장합니다. 이른바 창조파의 주요 일원으로서 상해 임정이 수명을 다했다는 판단 아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실질적으로 주도합니다. 1922년 9월 총격을 받았지만 부상을 입은 채 목숨은 부지합니다. 1923년 당시 임정 해체를 주장하는 창조파의 거두로서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국민대표회의는 조선독립운동 역사상 한국-중국-만주-러시아-미국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들이 대표성을 띠고 광범위하게 참가한 최초의 회의이자 거족적인 회의였습니다. 대표성을 띠는 가장 규모가 큰 대회였던 만큼 조선 민족 전체의 역량을 집중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망명지 이국땅에서 고립 분산된 채 고군분투하던 항일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사회주의 좌우 이념을 떠나서 국민대표회의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요.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원동지부 역시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를 통해 개조파-창조파 논쟁에 깊숙이 개입합니다. 실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한 운동단체 대표들의 이념적 성향을 보면 사회주의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2000년대 이후 공개된 러시아 코민테른 문서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상해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인지 해체시키고 다시 임시정부를 재탄생시킬 것인지 논쟁이었습니다. 그 분열된 틈을 임시정부를 고수하자는 임정고수파가 고개를 들지요. 개조파 맹장은 상해파 고려공산당 윤자영이었고 창조파 맹장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윤해, 한명세 등이었습니다. 임정고수파는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이었지요. 민족주의의 거두 안창호와 진보적인 대중지도자 여운형 모두 상해임시정부의 문제점에 통감합니다. 그리하여 조선 민족 전체의 의사를 대표할 수 있는 각 지역, 각 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거듭 촉구합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거의 70여 회에 이를 정도로 회의를 소집하여 논쟁을 벌입니다. 그렇지만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 그리고 무장투쟁노선과 외교독립노선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암투와 분열로 세월을 보냅니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6개 월 동안 그들 숙식비의 대부분이 러시아 볼세비키 정권에서 지원한 독립운동자금으로 충당합니다. 한형권이 2차 자금으로 가져온 돈에서 충당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임시정부의 분열 앞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정권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외교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게 됩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개조파-창조파 논쟁에서 초기 창조파의 노선에 지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분열된 채 창조파들만의 자파세력으로 국민위원회를 구성하자 코민테른은 정부 승인을 거부합니다. 그러곤 창조파들마저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강제 퇴출되고 말지요. 이후 상해 임정은 개조파가 장악하여 박은식을 2대 임시대통령으로 결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시킵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좌절되면서 항일독립운동 역량은 전체적으로 집중, 강화되지 못한 채 독립운동전선은 더욱 분열되고 상해 임정은 일개 노쇠한 군소운동 단체로 전락합니다.

김립의 비극적 죽음이 가져온 독립운동 전선 상의 분열이자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립을 죽인 직접적인 세력은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이지만 그들에게 살해 명분을 제공한 자들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였습니다. '김립을 극형으로 처단해야 할 인물'이라고 발표한 상해 임정의 포고문은 사실이 아님에도 이를 처음 퍼뜨린 세력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적수였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었기 때문입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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