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동 장군의 손녀와 그 가족들

2022년  11월 만 91세의 당고모(최경주)를 만나러 하와이에 다녀왔다. 1932년 생, 최진동 장군 자식들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분이다. 해방 직전 서울로 내려와 살다가 70년대 초 두 동생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의류 사업에 성공해 경제적 여유가 생긴 1980년 중반에 중국을 방문하고 최진동 장군의 업적을 밝히려고 애쓰기도 했다. 당시 만나게 된 연변 역사학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멀리서 경제적 지원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최진동 장군에 대한 친일 왜곡이 조장되는 등 오히려 부작용이 더 컸다. 오래도록 애태우다 나이 들어 이제 기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던 때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봉오동과 북간도 무장투쟁사를 재조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2016년 당고모의 간절한 요청에 하와이로 날아갔다.

동생 최은주와 함께 하와이에 가서 7년만에 최경주 당고모를 다시 만났다.  

그때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45일간 집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로 묻고 답했다. 고모는 만주와 서울, 그리고 하와이로 이어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녀가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잘 알지 못했을 진산 최씨 가족사를 알려주고, 최진동 최운산 형제의 독립운동사를 사료로 확인해 주었다. 며칠간의 대화를 통해 오랜 세월 시공을 초월해 지냈어도 서로 알고 있는 것이 똑같을 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당고모를 만난 이후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낸다. 아흔이 넘은 당고모는 늘 궁금한 것도 많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대부분 전화로 소통하지만 노인성 청각장애가 있어 보청기를 사용해도 진지한 대화가 어렵고 답답하다. 그래서 통화의 끝은 언제나 자신을 만나러 하와이로 와달라는 간절한 부탁이다. 한국으로 나오고 싶지만 아흔을 넘긴 자신이 움직이기 힘드니 젊은 우리가 오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91세의 노인이 혼자서 마트에 가서 장을 잔뜩 보고 돌아왔다.

밀린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하와이로 날아갔다. 코로나가 일상화 되고 해외여행이 가능해진 2022년 겨울 고모가 같이 오라고 신신당부하는 여동생과 함께 당고모 집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하와이는 노인들의 천국인 것 같았다. 무릎 관절이 나쁜 고모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지만 엘리베이터가 곳곳에 있고 가까운 쇼핑센터에서 혼자 장보기도 하면서 건강한 노년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조지아에서 돌아온 큰아들 세영이 뇌경색으로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다. 50대 후반의 환자 아들과 90대 노인 어머니가 서로 도우며 생활하고 있었다

당고모는 이제 최진동 장군의 역사를 찾겠다고 혼자서 애를 태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덕분인지 그동안 많이 차분해지고 생각이 정리되어 있었다. 7년 전 처음 만났을 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한마디라도 더 나누려고 집 안에만 머물렀는데 이번엔 대화에 지칠 때면 가끔 집 근처 알라모아나 해변에 나가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알라모아나 해변
알라모아나 해변

아흔이 넘은 노인의 기억을 되짚으며 대화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함께 간 동생과 함께 어린 시절 최진동 장군과 함께 살았던 도문에 대한 기억과 삼촌 최운산 장군이 살던 봉오동과 작은엄마(김성녀 여사)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후처의 자식으로 태어나 본처의 자식들로 인한 설움, 부모를 잃고 만주를 떠나 서울에 정착해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했으나 6.25로 모든 걸 잃고 다시 시작하느라 고단했던 서울의 생활, 하와이로 이민 와서 살며 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역사를 찾기 위한 노력까지, 만주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그녀의 90년의 여정을 7년 만에 다시 들었다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미국인들이 큰 명절로 지내는 추수감사절이 끼어있었다. 덕분에 돌아가신 최진동 장군의 막내아들 인국 당숙의 가족들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결혼하고 집을 떠난 당숙의 세 딸은 첫째와 둘째가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에, 막내가 하와이에 살고 있었다. 혼자 살고 있는 친정엄마를 위해, 세 딸이 추수감사절에 연례행사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온다고 한다.

첫 만남에 6촌들이 함께 어깨를 걸었다. 뒷줄 왼쪽부터 인국 당숙의 둘째 안젤리나, 셋째 훼라, 필자, 고모 아들 세영, 동생  은주와 6촌 첫째 레이라니, 앞줄에 당고모와 당숙모
첫 만남에 6촌들이 함께 어깨를 걸었다. 뒷줄 왼쪽부터 인국 당숙의 둘째 안젤리나, 셋째 훼라, 필자, 고모 아들 세영, 동생  은주와 6촌 첫째 레이라니, 앞줄에 당고모와 당숙모

올해 가족파티에 고모와 아들 세영이, 그리고 한국에서 날아간 우리가 함께 했다. 미국 문화인 추수감사절 파티에서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초면의 6촌들을 만난 것이다. 세 명의 6촌은 이태리계. 필리핀계,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했고, 각각 2~3명의 자식들을 둔 40~50대 중년이다. 첫째는 주정부의 고위직 공무원이고 두 동생도 자기 일을 있는 전문직 여성으로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생활이 안정되어 보였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둘째 에드위나의 별장에 대가족이 모였다. 중국계인 당숙모의 친척 몇 명도 함께 했다. 우리가 먼저 도착하고 첫째와 셋째의 가족이 파티음식을 준비해서 도착했다. 칠면조 요리는 셋째가, 라자냐와 샐러드는 둘째가, 첫째는 와인과 몇 가지 음식을 가져왔다. 세 딸이 마련한 음식으로 맛있고 풍성한 잔칫상이 차려졌다.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놀다가 내가 아침이슬을 불렀다.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놀다가 내가 아침이슬을 불렀다.

저녁식사 후 노래를 좋아한다는 셋째의 남편이 가져온 휴대용 스피커와 노래방 기계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분위기가 더 편안해졌다. 동생들이 한국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해 내가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부르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말은 전혀 모르는 육촌들과 부족한 영어로 대화하려니 무척 답답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어색함은 서로를 소개하며 금방 떨쳐버렸고, 독립투사인 최진동, 최운산 형제의 후손인 우리들은 같은 증조할아버지를 모신 아주 가까운 친척이란 것을 확인하며 반가움을 나누었다.

동생과 나는 6촌 동생들과 가족사와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북간도 무장 독립전쟁의 의미와 할아버지 최진동, 최운산 형제의 삶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미친 긍정적 영향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첫 만남에 100년의 가족사를 모두 전해줄 수는 없었지만 봉오동 사진과 구글어스로 확인할 수 있는 독립군기지 봉오동의 현재 모습도 보여주었다.

6촌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 자신들의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독립전쟁의 영웅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미국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군인에 대한 예우가 아주 특별하다고, 만약 미국이라면 우리 가족 모두가 정부로부터 굉장한 존경과 배려를 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머리를 끄덕이며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서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겨우 100년이 지났을 뿐인데 북간도의 신한촌 봉오동에 무장독립군기지를 건설한 최진동과 최운산, 최치흥, 최명철 사형제의 후손들은 고향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첫째 최진동의 손자들은 연변, 한국, 미국에, 그리고 우리 5남매를 비롯한 둘째 최운산의 손자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아쉽게도 북한에 살고 있는 최운산의 셋째 딸과 고종사촌들의 소식은 지금 알 수가 없다. 셋째 최치흥의 손자 중 몇 명은 한국에서 일하고 있으나 셋째와 넷째 최명철의 손자 대부분은 중국 연변에 살고 있다.

셋째 훼라의 남편이 셀카로 찍은 6촌 동생들과 그 가족들
셋째 훼라의 남편이 셀카로 찍은 6촌 동생들과 그 가족들

지난했던 대한민국의 역사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놓았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우리 집안의 가족사로 인해 후손 모두는 각자의 인생에서 주어지는 여러 굴곡들과 간난신고를 견디며 살아가야 했다. 지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눈앞에 닥친 죽음을 피해 고향을 등지기도 했고, 타향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해외로 이주하기도 했다. 한 부모 한 형제의 후손들이 삼대 만에 한국, 중국, 북한, 미국, 네 나라의 국민으로 흩어졌다. 국적과 언어가 달라지고, 각자의 경험과 이상이 달라졌다

어린 시절 나는 명절이면 고향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피난민인 우리 가족은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외가나 친가로 떠나는 이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사랑이 많은 부모님과 할머니가 계셨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새 옷을 입었지만 고향에서 돌아온 이웃들이 들려주는 귀향길의 고생담마저도 늘 부러웠다.

 
하와이를 떠나는날  공항 가는 택시를 기다리며  서운한 마음을 사진에 담았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하와이를 떠나는날  공항 가는 택시를 기다리며  서운한 마음을 사진에 담았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우리 부모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시련과 아픔을 겪지 않았다면 매일이 잔칫집 같았다는 봉오동 최운산 장군 집의 넓은 마당에서 함께 모여 놀았을 우리였다어쩌면 그때 만났어야 했던 6촌들이었다. 손녀들인 우리는 누구에게나 베풀기 좋아하고 늘 음식을 넉넉히 마련하는 손이 큰 할머니 김성녀 여사의 잔소리를 들으며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함께 만두를 빚고 순대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남편의 이름을 따라 모두 다른 성을 가진 6촌들에게,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국적을 갖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우리의 DNA에 독립투사 할아버지들의 삶이 각인되어 있음을 잊지 말자고 이야기했다. 부모 세대의 힘들었던 세월이 우리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가도록 이끌었지만 이젠 우리가 다시 만나고 함께 역사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와 능력의 한계를 실감하는 요즘이다. 초면의 6촌에게 우리가 그분들의 삶을 드러내는 후손이 되자고 손을 잡는 일이 큰 위로였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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