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과 봉오동 독립전쟁 다시 보기 1

異名: 만익(萬益), 문무(文武), 고려(高麗), 명길(明吉), (), (), ()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은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사의 숨은 영웅이다. 봉오동을 위시한 도문, 석현, 서대파, 십리평, 양수천자 등 10여개 지방을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러시아군에 소와 곡물을 대량으로 수출한 무역업자로 연해주 독립군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콩기름공장, 제면공장, 양조장, 두병공장, 성년공장, 비누공장을 비롯한 여러 생필품공장을 운영한 기업가였다.

북간도 왕청현 소재 봉오동에 신한촌을 건설하고 동포들을 불러들인 최운산은 자신의 마을 봉오동을 항일 무장 독립투쟁을 위한 독립군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사병부대를 운영하던 최운산은 1912년 중국 장작림군에서 뽑아온 100여 명의 군인들과 독립군이 되기 위해 모여온 애국청년들을 <봉오동사관학교>에서 훈련시키며 독자적으로 독립군부대를 조직했다. 봉오동에 모인 독립군의 수가 점점 늘어나 수백 명에 이르자 1915년 봉오동 숲을 벌목해 대형 연병장을 만들고 베어낸 나무도 세 동의 대형 막사를 지어 독립군을 양성했다. 최운산 장군은 이 모든 군자금을 자비로 감당했다.

최운산 장군 형제들은 1919326일 왕청현 백초구, 518일 양수천자에서 독립선언식을 개최하는 등 북간도지역 3.1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운산 장군이 운영하던 사병부대 <도독부>(670명 규모)를 모체로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군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사령관 최진동)를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식량, 무기, 군자금을 모두 지원하여 자신의 소유지 왕청현 서대파에 <북로군정서>(총재 서일),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소장 김좌진)를 창설했다.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원년을 선포한 19201월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위해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현재가치 약 150억원)에 매각해 체코군단의 무기를 구입해 봉오동에 결집한 독립군을 모두 무장시켰다. 최운산의 자금력과 인적 네트워크 덕분에 러시아군과 체코군에서 신식 무기를 계속 사들여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완전무장한 독립군 통합군단이 일본군대를 대파할 수 있었다. 1910~1940년 당시 간도 지역에서 최운산 장군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은 독립운동단체나 애국지사가 거의 없었다.

19205월 최운산 장군이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을 지원하여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사령관 최진동)가 창설되었다. 통합군단의 중심에 10여 년 간 봉오동에서 훈련·양성된 정예부대 <대한군무도독부>가 있었다. <대한군무도독부>19201월부터 수십 차례(일제문서 36, 독립신문 72) 국내진공작전을 벌였다. 봉오동의 독립군이 두만강변의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자 일본군은 북간도 무장독립군들의 근거지 봉오동으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쳐들어왔다. 그러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일본군보다 성능이 좋은 신형무기를 구입하고 봉오동 산위에 참호를 구축해 매복전을 준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했다. 최운산 장군과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두었다.

최운산 장군이 한일병탄 직후 무장독립군부대를 창설해 훈련 양성하며 지속적으로 확대시킨 오랜 노력이 역사적 결실을 거둔 것이다. 19206월과 10,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천명한 민족자결의 빛나는 표상이 되었다. 최운산 장군은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라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전투 등 여러 무장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생 동안 무장투쟁에 모든 재산을 소진하고 194575일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한 최운산 장군은 모두 여섯 차례의 옥고와 모진 고문을 치르면서도 뒤로 물러섬 없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에 평생을 바쳤다.

최운산 장군은 시대를 뛰어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이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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