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추모하며

경실련을 시작으로 30년여 년 언론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는 이태복 장관을 선배 노동운동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봉오동 청산리 독립전쟁 승리의 주역 최운산 장군의 삶을 직접 전해드리면서 역사가 이태복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인연의 깊이가 달라졌다.

간도 제일의 巨富 최운산은 마적으로부터 조선동포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사병부대를 운영할 만큼 군사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한일병탄이 되자 자신의 소유지 봉오동을 독립군기지로 개발하고 무장독립군을 지속적으로 양성했다. 19193.1독립선언을 계기로 최운산의 사병부대는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전환되었다. 형 최진동 장군이 사령관을, 동생 최치흥이 참모를, 조카 최태여가 군자금 관리를 맡아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920년 상해 임시정부가 독립전쟁 원년의 해를 선포하고 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봉오동에 모여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했다. 이 통합군단이 봉오동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의 승리는 거저 얹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대에 필적할 만큼의 무기와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고난도의 군사작전을 결행할 능력이 있었기에 일본군 정규군과 격돌한 독립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봉오동 독립전쟁 후 일본군이 기록한 봉오동전투상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북간도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대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각 독립군 부대 별로 주둔지를 제공하고 무기와 식량, 군복을 지원한 최운산의 경제력이 있었다. 또한 10년 간 훈련 양성된 정예부대 <대한군무도독부>가 통합군단의 중심에서 전체 통합군을 단일 체계로 운영했기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독립운동사 연구는 그 부분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그동안 북간도 독립전쟁의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 인력이 부족하고 특히 무장투쟁사 연구는 더 취약했기 때문이다. 우연한 자리에서 이태복 선생님께 봉오동 독립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해드릴 기회가 있었고 장관님은 봉오동 독립군기지와 무장투쟁사가 그 중요도에 비해 지나치게 간과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하시며 깊이 공감하셨다.

도산 안창호평전을 시작으로 윤봉길평전 그리고 토정 이지함, 심산 이태중평전까지 여러 권의 평전을 집필하실 만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셨던 이태복 선생님은 논문이나 사료를 찾아 공부하는 것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곳곳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열정적인 연구자였다. 답사팀을 이끌고 북만주 밀산에 항일유적기념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통합군단의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에 대해 알게 되셨는데 봉오동의 최씨 4형제와 일가가 모두 무장투쟁의 선봉이었다는 사실을 사료를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기뻐하셨다. 이태복 선생님은 봉오동 청산리 독립전쟁사가 역사적 사실과 달리 마치 신화처럼 이해되는 문제점을 지적하시면서 연구해야 할 것은 많은데 연구자들의 관심도, 국가의 지원도 부족하다고 독립운동사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북간도 무장투쟁사 연구가 너무 미약하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창립식에 참석한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에서  여섯번째 ,흰색 상의 )

 

2016<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창립식에도 참석하셔서 후손들이 해야 할 몫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가끔 신림역 사무실로 찾아뵙고 새롭게 확인한 사료를 전해드리면 손녀가 직접 봉오동의 역사를 다시 정리하는 일을 시작했으니 일생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힘을 내라고 밥을 사주시며 격려해주시곤 했다. 그러던 중 2019년 최진동 장군이 친일 논란에 휩싸이자 역사 연구자의 한사람으로 이 사안을 깊이 살펴보셨고 계속 관심을 놓지 않으셨다. 당신이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살펴본 최진동 장군은 친일은 커녕 일생을 바친 무장투쟁조차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불운을 겪고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이태복 선생님은 후세대인 우리가 북간도 무장투쟁을 지휘한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을 이렇게 무례하게 대접하면 안 된다고 한탄하시기도 했다. 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의 잘못된 결정에 대해 구체적 사료를 통해 입증해 나가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시며 후손인 내가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학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인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신께서 보훈처 특별자문위원으로 친일에 대해 검증하는 논의에 참여하셨기에 그 조언이 더 구체적인 힘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무심하게 봉오동 독립전쟁을 재조명하는 내 곁에 다가오신 이태복 장관님은 선생님처럼 선배오빠처럼 힘내라고 툭툭 어깨를 두둘겨 주시더니 당신은 또 그렇게 무심하게 훌쩍 먼 길을 떠나셨다. 아직 의논하고 싶은 일과 하소연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을 모두 만나셨을 이태복 선생님,

독립투사 선배 동지들을 만나 반가우셨나요.

100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나눈 더 깊고 새로운 이야기에 속이 시원해지셨는지요.

당신의 부재를 미처 실감하지 못하는 저는 아직도 당신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뵙고 싶습니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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