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다만 그때와 장소를 모를 뿐이다. 죽음이 무섭거나 두렵게 느껴진 적은 없다. 어려서부터 늘 죽음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한겨레:온>에 올라온 김미경 필진의 글이 눈에 띄었다.  '<한겨레:온>필진들도 미리 부고를 써보면 어떨까?' 라는 글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부고문을 써보기로 했다.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나의 부고문을 써본다.

<드디어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늦었다. 진작 죽었어야 했다. 나는 사실 어렸을 때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했다. 나의 어릴 적 유일한 소원이 있다면 '지금 즉시 이 세상을 뜨는 것'이었다. 그런데 죽지 못했다. 자살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하늘에 소원을 빌었다. 잠들 때마다 빌었다. '제발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뜨지 말게 해달라'고. 그런데 다음 날이면 어김 없이 해가 떴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며 지냈다. 대략 5살때부터 8살까지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가 죽음이라는 게 그리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죽음이라는 희망'을 포기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조금씩 삶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그런 어린아이가 이제 환갑도 지나고 진갑도 지나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다면 나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 살지 않았는가 말이다.

어릴 적 소원은 이루지 못했으나 나이 들어 소원이 있었다.  나는 고대 한국의 선조들과 그들의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역사상 실재했던 단군과 환웅에 대한 역사가 복원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을 듯하다. 고대 한민족의 사상이 지구의 위기를 구할 원천이라고 말한다면 다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이야기인가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마음속으로 믿고 확신했다. 그 확신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했을 뿐이다.

페루 마추픽추 유적을 내려다 보고 있는  방랑자 (출처 : 한겨레 2023-07-22)
고대  유적을 내려다 보고 있는  방랑자 (출처 : 한겨레 2023-07-22)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건 아니다. 어릴 적 소원이 죽음이었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여  절망과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나마 죽음이라는 희망이 있어서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제는 진짜 죽음이다. 어릴 적 소원이 뒤늦게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늦었더라도 감사해야 할까. 아니다. 죽음을 편하게 맞이할 수는 있겠지만 죽음은 더이상 나의 소원은 아니었다. 죽기 전까지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집착은 없었다. 다만 한민족의 고대 사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만은 가득했다. 한민족 고대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 통일이 되고 만주 고토가 회복되면 고대 고조선의  역사가 복원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희망을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나의 부고문 결말이다.  어린 시절을 빼놓는다면 전체적으로 삶은 그리 나쁘진 않았다. 어릴 적 세상보다 갈수록 나아지는 세상이 아니던가. 앞으로 더욱더 나아질 한국 사회를 기대한다. 인류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하지만 다 잘될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살았고, 그런 믿음을 간직한 채 지구를 떠나고 싶다. 나의 마음은 죽음 이후에 기다리고 있을 저 세상에 벌써 가 있다. 육체와의 이별은 또 다른 정신세계와의 만남을 예고하기 있기에. 

- 다른 필진들이 시리즈로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키워드

#부고문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