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40호(2023년 여름)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조인승 할아버지의 ‘외침’

(9월 1일은 지진으로) 집이 위험하다고 해서 아라카와荒川 둑으로 가니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1일 저녁에는 불이 타들어오기에 요쓰키四ツ木 다리를 건너 동포 14명과 함께 있었다. 그곳에 소방단원 4명이 와서 밧줄로 우리를 염주알 꿰듯이 묶고는 말했다. “우리는 이 자리를 뜨지만 밧줄을 끊으면 죽이겠다!” 가만히 있으니 밤 8시경 건너편의 아라카와 역(현재 야히로八広 역) 방면의 둑이 소란스러웠다. 조선인을 죽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다음 날 5시경, 소방단원 4명이 다시 와서 데라시마寺島 경찰서로 가기 위해 요쓰키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 3명이 끌려와 일반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살해당하는 것을 우리는 옆 눈으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다. 그때 내 발에도 쇠갈고리가 와서 박혔다. 다리는 시체로 가득했다. 둑에도 장작더미가 쌓여 있듯이 여기저기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1)

위 인용문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고故 조인승曺仁承 할아버지의 눈물 어린 증언 내용이다. 1923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불과 반년 정도에 지나지 않은 21세 청년이 체험한 조선인 학살 현장에 대한 증언이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버거운 학살 상황,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느꼈을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또 학살당한 자를 향한 살아남은 자의 회한은 어느 정도였을까? 왜 이런 학살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누가 학살을 주도했을까? 학살 책임 문제는 밝혀졌는가?

이후 조인승 할아버지는 학살의 기억이 꿈에 나타날 때마다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학살 장면의 목격’이라는 치유하기 힘든 트라우마로 여생 내내 몸서리쳤음에 분명하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과 그 장면의 목격이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파괴한 것이다.

2023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만행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00년을 되새기는 일은 단지 숫자를 기억하자는 이벤트가 아니다. 일본에 배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나, 정치적 논란을 일으켜 힘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것도 아니다. ‘학살’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직시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야만’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기억함으로써 한 사건으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100년을 맞이하면서, 억울하게 죽임당한 조선인 학살 정황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명료히 하고, 학살의 진상과 책임 소재를 재인식하기 위해서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치열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일본 사회에서 체험해야 했던 극단적 차별과 배외주의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역사를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숨겨진 사료의 발굴, 학살의 실태 조사와 유골 발굴, 추모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려는 눈물겨운 노력도 이루어졌다. 재일조선인이 주축이 되었지만 양심적인 일본인 연구자와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정황의 진실이 점차 드러났다.

조인승 할아버지의 증언도 학살을 기억하려는 연대운동의 성과였다. 체험자와 목격자의 증언(검증을 거친)의 ‘힘’은 강렬하다. 연구서와 논문이 미처 전하지 못하는 역사적 진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정파적 입장에 따라 진실 수용 여부는 왜곡될 여지도 있지만, 연구와 증언 등은 학살의 정황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은 엄연한 사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을 바라보는 최근의 상황은 크게 우려스럽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로 조선인 학살 자체를 부정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사 수정주의의 대두와 함께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망각하려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대응과 인식도 문제다. 한국에는 미디어 보도 등을 통해 몇 장의 조선인 학살 사진 등이 알려져 있고, 자경단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인 학살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일본 사회에 조선인 학살을 둘러싼 진상과 책임 소재 규명을 제대로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관동대지진 문제는 군대 위안부와 강제 동원 피해 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조선인 학살을 다루는 연구자가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를 잘 말해준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진실 규명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관동대지진 100년을 기억한다는 것은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피해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삼 일본 군대와 경찰, 자경단의 야만성을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반일 의식에 바탕을 둔 과도한 민족주의에 동조하기 위함도 물론 아니다. 조선인 학살문제는 근대 이후 제국과 식민지라는 부조리한 과거사의 모순을 드러낸다.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한일 양국이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고 부조리한 과거를 거울삼아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이런 의미에서 조인승 할아버지의 ‘외침’은 여전히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문제에 좀 더 천착해야 한다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이제라도 할아버지의 외침에 대해 한국 사회가 응답해야 한다.

1923년 9월 1일의 기억 방식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관동지방 남부에서 발생했다. 그 규모는 M 7.9, 진원은 사가미만相模灣 서북부(동경 139.3도, 북위 35.2도)로 계측되었다. 지진은 오다하라小田原와 네부카와根府川 방면이 가장 격렬했지만, 도쿄와 요코하마는 지진에 의한 화재가 겹쳐 최대 피해를 당했다. 도쿄는 3일 아침까지 화재가 계속되었다. 지진에 의한 피해는 사망자 99,331명, 부상자 103,733명, 행방불명 43,746명, 가옥 전파 128,266호, 가옥 반파 126,233호, 소실 가옥 447, 128호, 유실 가옥 868호이며 이재민은 약 340만 명에 달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지정해, 이날이 가까워지면 언론계와 행정기관이 각 가정에 피난 용구, 긴급 식량의 준비와 점검을 홍보하고, 재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날을 자연재해의 공포를 상기하는 날로만 지낼 수 없다. 이날은 지진과 화재의 공포보다 벌건 대낮에 공공연한 살인으로 충격을 준 날이었다. 지진과 화재에 의한 극심한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어디선가 흘러나와 계엄령이 발포되었으며, 이후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조선인 대량학살이 자행된 인재의 날이었다.

1923년 9월 1일은 그동안 어떻게 기억되었을까? 지금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연구는 학살의 실태와 그 배경을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기존 연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재일조선인 연구자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점과 ‘관동대지진 ○○년’처럼 기념할 만할 시점마다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조선인 학살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40주년을 맞이한 1963년 무렵이었다. 자료집 간행을 계기로 관련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핵심 연구자는 재일 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이었다. 강덕상은 일련의 논문과 저서, 자료집을 통해 유언비어의 진원지와 학살의 진상을 밝혀냈다. 연구가 진전되면서 유언비어의 발생 원인을 둘러싼 논쟁도 이루어졌다. 논쟁은 유언비어의 ‘자연발생설’과 ‘의도적 날조설’로 구별된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체화한 일반 대중이 유언비어에 편승하기도 했다는 점과 그 배후인 관헌의 존재가 드러났다. 조선인의 체험담과 목격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활동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학살을 경험한 일본인들의 증언과 자경단 사건의 실상 등이 밝혀졌다.

관련 연구의 진전과 더불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이른바 ‘3대 테러 사건’의 하나로 바라보려는 시각을 둘러싼 논쟁도 촉발되었다. 이 논쟁은 시오다 쇼베에塩田庄兵衛와 이마이 세이이치今井清一가 조선인 학살을 가메이도 사건亀戸事件, 아마카스 사건甘粕事件과 동일한 위치에 놓는 것에 대한 강덕상의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이 논쟁은 조선인 학살문제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강덕상의 주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사건은 민족문제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일본사에서는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사건, 가메이도 사건, 오스기 사건을 병렬해 3대 테러 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또 일본인 사이에는 동북 지방 사투리를 말하는 사람이 죽었다, 또는 중국인이 죽었다, 오키나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해 일본의 대외 관계 또는 아시아인 차별의 문제로서 이런 사건을 배외주의 일반으로 확대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반대한다. 이는 시야를 역사적으로 확장시키는 일이 아니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그 본질이 다르다. 조선인 사건을 다른 사건과 병립시키는 것은 역사적 의의와 사실을 손상시키고 관헌의 은폐 공작과 한 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오스기 사건, 가메이도 사건은 관헌에 의한 권력범죄, 밀실범죄, 일본 민족 내부의 계급문제다. 이에 반해 조선인 사건은 관민일체의, 더욱이 일반 민중이 가담한 민족범죄다. 그리고 일본인 일부, 중국인, 오키나와인의 문제는 일본과 조선과의 모순에 의해 일어난 파생적인 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일본의 배외 내셔널리즘의 희생이 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을 결코 동일하게 논해서는 안 된다.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조선인 학살은 명백한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강덕상은 조선인 학살의 성격을 명료하게 지적했다. 즉 “조선인 학살은 일본 관민일체의 범죄이고, 동원된 민중이 직접 학살에 가담한 민족적 범죄이자 국제문제”라며, 다른 사건과의 차별성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강덕상은 “관동대지진 당시 왜 계엄령이 공포되고 군대가 출동했는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며, 계엄 행위를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사와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조선인 학살은 계엄령 아래 자행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시각을 제시한 것이다.

조선인 학살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문제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동시에 조선 민중의 해방투쟁과 분리해서는 그 역사적 자리매김이 어렵다. 학살과 식민지 지배, 민족해방 투쟁의 고양은 인과 관계로 얽혀 있다.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사건은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이를 지탱한 일본 민중이 ‘강력한 적=조선 민중’을 두려워한 데서 발생한 집단 살인이자 민족 범죄였다. 한일 간의 부조리한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돌출한 또 하나의 잔혹한 사건이었다.

특히 강덕상은 계엄령 발포에 주목했다. 계엄령이란 내란 또는 전쟁 때 발령된다. 강덕상은 “왜 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계엄령이 발령되었고, 내란을 일으킨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강덕상은 ‘계엄령은 조선인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조선인 학살문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동대지진 당시 왜 계엄령이 내려졌는지를 생각할 때, 학살사건의 전제로서 30년에 걸친 전사, 즉 갑오 농민군과의 전쟁 그리고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강점에 반대해 전국을 선혈로 물들였던 7년에 걸친 의병전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이런 전쟁을 체험하면서 조선에 대한 ‘적시敵視’사상을 형성해왔다. …… 관동대지진 당시의 학살은 우연히 일어난 조선 민족의 비극이 아니다. 조선 민족해방 투쟁의 국제화를 배경으로 하는 침략과 저항이 만들어낸 민족 대결이다. 이것이 ‘위법’적인 계엄령 발포의 진상이다. 계엄령은 조선인에 대한 몰살 선언과도 같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문제를 1923년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한정하면 안 된다. 그 이전부터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벌인 일본의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다,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전쟁의 연속 과정에서 이루어진 학살이었다.

강덕상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연구는 관련 연구의 방향성을 명료화한 기념비적 업적이다. 하지만 많은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학살문제는 해명해야 할 영역이 여전히 많다. 무엇보다 희생자에 대한 조사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정확한 희생자 통계도 불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앞으로 동아시아라는 화두에 편승해 학살을 둘러싼 한⋅중⋅일 공동 심포지엄 등이 자주 열릴 듯하다. 관동대지진이라는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 학살에 대해 중국인을 포함한 연구 시야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는 환영할 일이다.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을 규명하면 학살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 방향은 강덕상이 강조한 ‘사건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조선인 학살문제는 일본인과 중국인 학살문제와 달리 식민지 지배의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눈에 비친 학살의 정황

관동대지진 피해 지역에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였을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데 유용한 귀중한 단서가 남아 있다. 요코하마에서 어느 소학생이 쓴 작문이다. 도쿄에서도 지진 재해의 체험을 담은 아이들의 작문이 정리, 출판되었지만, 복자伏字로 처리되는 등 어른의 시각으로 수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요코하마에서는 손으로 쓴 작문이 네 곳의 소학교에서 발견되었다. 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관동대지진이라면 도쿄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진원지에 더 가까운 요코하마의 피해는 더 심각했다. 당시 44만여 명이던 요코하마 인구의 92퍼센트가 재해를 입었고, 피해 가구는 95퍼센트에 달했다. 괴멸이라고 할 만했다. 도쿄는 각각 58퍼센트와 63퍼센트였으니 요코하마의 피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현청이나 시청은 기능을 잃었고, 교통도 통신도 끊겼다. 7개 경찰서 중 6곳이 무너지거나 소실되었다. 주둔하는 군부대도 없었기에 공공의 치안을 유지할 수 없었다. 치안 공백 지대가 된 요코하마는 가장 빨리 유언비어가 퍼지며 학살이 시작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요코하마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조선인 박해에 초점을 맞추어 작문을 읽어보자. 지진 이후 며칠간의 모습과 분위기가 전해진다. 먼저 지진 당일인 9월 1일의 상황에 대한, 미나미요시다南吉田 제2소학교 6학년생의 글이다.

순경이 조선인이 칼을 들고 올 것이니 찾아오면 죽이라고 말하고 갔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나는 형과 칼을 들고 대나무 숲에 가서 곧고 튼튼한 대나무를 잘라 죽창 3개를 만들어 왔습니다. 맞은편에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조선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날이 밝아서 형, 아버지, 저 이렇게 셋이서 밑으로 내려가 보니 사람이 죽어 있었어요.

지진 당일 밤의 정황이 여러 작문에 남아 있다. 잊을 수 없는 밤이었을 것이다. 미나미요시다 제2소학교 6학년생의 또 다른 작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으악 하고 외치는 소리. “조선인이다”, “선인이 공격해왔다”는 숨 가쁜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놀라서 도끼를 높이 들었다. 아직 꿈만 같아 다시 물었지만 역시 진짜였다. 주위는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체격이 건장한 남자들은 저마다 대나무를 잘라 막대기를 만들거나 머리띠를 두르는 등 대비에 급급했다. 이제 부모나 형제의 신변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살아 있으면 또 누구와도 만날 수 있지만, 만약 죽으면……. 산 위에 있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은 그저 조선인이 오지 않기를 신에게 바라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여자아이들까지도 짧은 막대기를 들었다. 그리고 조선인이 언제 올까 하며 나랑 엄마는 서로 껴안고 다른 사람들과 구석에 숨죽이고 있었다.

땅땅 총소리가 났다. 남자들은 암호를 정하거나 (조선인이) 오면 한 방에 물리치겠다고 힘쓰고 있다. 만약에 지거나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안감은 한층 높아졌다. 낮에는 꿈같은 무서운 지진을 만났고 또 화재도 만났다. 구사일생으로 이 산으로 도망쳤는데 밤에는 또 조선인 소동이다. 우리는 얼마나 불운한 것일까.

반짝반짝 별이 빛나고 있다. 불길이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 와 하고 기뻐하는 소리가 났다. 물어보니 조금 전에 여러 사람이 나서서 조선인을 겨우 말리고 왔다고 한다. 이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모두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 하고 주위는 깊은 산처럼 조용했지만, 이제 조금은 활기가 돌아왔다. 아직 다리가 떨려서 변소에 갈 수도 없다. 기세 좋은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동쪽 하늘은 희미해졌다. 아아 불안한 하룻밤이 밝았다. 자, 기운을 내서 부모님들을 찾으러 가야겠다.


여기에 기록된 유언비어는 조선인이 개인적으로 범죄나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의미가 아니다. 조선인이 “집단으로 습격해온다”는 것을 전제로 “만약 지게 되면 어떻게 하나”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총성이 울려 전장을 연상케 하는 긴박함도 담겨 있다. 다음은 이시카와石川 소학교 고등과 2학년생의 작문이다.

건너편 산에서 남자가 막대기를 들고 “조선인이 오면 때려죽여라”고 소리쳤다. 그다음에는 피투성이의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옆 사람에게 조선인이 무엇을 했느냐고 묻자,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거나 곳곳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면서 밑으로 내려가 아주머니 집에서 여동생과 나를 잠자게 했다. 아버지는 아저씨와 둘이서 집 앞에서 막대기를 들고 기다렸다. “왔다, 왔다!” “야, 야!”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엄마와 여동생, 이라고 아주머니와 함께 집 안에 있었다. 그러다 날이 밝았다.

고토부키寿 소학교 5학년생의 글이다.

밤이 되자 여기저기서 조선인 소동이 일어나 나는 죽창을 들고 주위를 돌아다녔다. 저쪽에서는 조선인을 죽이고 만세, 만세를 외치고 있다. 또 건너편에서 조선인이 있다고 말하자, ‘땅’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열심히 주위를 지키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 조선인이 있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네’ 하고 소리치며 곧바로 조선인을 해치웠다.

이들 작문을 통해 “조선인이 온다,” “무기를 들어라,” “죽여도 좋다”가 조선인 학살을 일으킨 유언비어의 세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의 작문은 지진 발생 첫날부터 이 세 가지가 갖추어졌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살해당한 조선인의 모습을 담은 글도 있다. 다음은 고토부키 소학교의 다른 5학년생의 작문이다.

드디어 밤이 왔습니다. 그러자 조선인이 300명 온다느니 3,000명 온다느니 해서 크게 당황했습니다. 7시 무렵 걷다 보니, 조선인이 나무에 묶여 죽창에 배를 찔리고 톱으로 잘려 있었습니다.

미나미요시다 제2소학교 6학년생의 작문이다.

잠을 자려는데 석유통이 펑 터졌다. 조금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조금 지나자 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목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저놈을 죽여버리라고 소리치고 있다. 철봉을 들고 가서 보니, 조선인 셋이 많은 사람한테 얻어맞아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지진 이틀째의 정황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아이들은 길었던 밤을 보내고 2일 아침을 맞았다. 고토부키 소학교 고등과 2학년생은 파출소 앞에서 묶여 있는 조선인을 목격했다. 작문에는 “파출소 앞에 가자 조선인이 전신주에 철사로 꽁꽁 묶여 있었고, 반팔을 입은 사람에게 쇠막대로 맞고 있었다. …… 강에 가자 불에 탄 사람과 쓰러진 조선인이 저쪽으로 굴러가다가 이쪽으로 굴러왔다. 그때마다 악취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거리에서 밤을 보낸 고토부키 소학교 고등과 1학년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다음 날, 아직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보니 남자들이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어젯밤에 조선인이 왔으니 이제 잠들지 말라고 했다. 이쪽으로 왔으니까 분명 조선인일 거라고 했다. 가까이에서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니 많은 남자가 조선인을 때려죽이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아이들이 품었던 공포심은 증오로 변해갔다. 2일 대낮에 학살이 공공연히 이어졌다.

날이 밝자 선인이 잡혔다고 해서 보러 갔더니 큰 사람이 전봇대에 묶여 있었다. 그 선인이 불을 지르려는 것을 발견해 붙잡았다고 한다. 옆집 형은 큰 대나무 막대기로 머리를 때렸다. 나도 때렸다. 나는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 힘들었다. (이시카와 소학교 고등과 2학년생)

길옆에 2명이 쓰러져 있었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곁에서 보았다. 머리는 갈라져 피투성이였고, 셔츠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모두 대나무 막대기를 쿡쿡 찌르면서 “지긋지긋한 놈이다. 이놈이 어젯밤 날뛰던 놈이다”라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침을 뱉고 가버렸다. (고토부키 소학교 고등과 1학년생)

나카무라 다리中村橋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가보니 선인들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이번에는 강물 속으로 던져졌다. 그러자 헤엄쳤다. 일본인이 잇달아 쫓아가 양안에서 한 명씩 뛰어들어 도끼로 머리를 쿡쿡 쳐서 끝내 죽이고 말았다. 집에 돌아왔다. 선인이 죽었다고 해서 보러 갔더니 머리가 열 군데 정도 잘려 있었다. 또 목이 바로 옆에 잘려 있었다. (미나미요시다 제2소학교 6학년생)


점심 무렵이 되자 조선인들이 습격해왔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빠르게 전해졌다. 조선인 소동은 갈수록 심해졌다. 암호로 산과 강 이름을 말하고 일본도를 빼들었다. 도끼나 창을 든 사람들은 살기를 띠었다. 보는 것만으로 대단했다. 간밤에 재향군인을 조선인으로 잘못 알고 죽였다는 것과 북쪽에 불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때 산 위에서 “누구든 빨리 오세요. 조선인이 세 명이 있어요. 응원. 응원”이라는 젊은 남녀의 목소리도 들렸다. 살기등등한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갔다. 곧바로 “우물을 경계해주세요”라는 소리도 들렸다. (고토부키 소학교 고등과 2학년생)

2일 밤, 요코스카横須賀에서 파견된 해군 부대가 요코하마에 상륙했다. 처음 도착한 군부대였다. 이를 목격한 아이들은 이렇게 적었다.

병사들은 “조선인들이 난동을 부려 온 것이다”고 말했다. 그 병사가 지나가자 탕탕 총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우와’라고 선인의 떠드는 소리. 무서웠다. 귀에 총소리가 울렸다. “만세, 만세, 만세”라는 목소리. 아 이겼구나. 기뻤다. (고토부키 소학교 고등과 1학년생) 

극심한 혼란은 사흘이 지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한 조선인이 귀에서 옷깃 부분까지 잘려 살이 터져 나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상한 말로 엉엉 울다가 경찰에 붙잡혀 갔다. 많은 사람에게 심한 곤욕을 치러 마침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 또 무서운 밤이 왔다. 그러자 망을 보는 사람 여럿이 등불을 꺼달라고 말했다. 조선인 60명이 단체를 이루어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선인이 구슬을 던지니 문을 닫으라고도 말했다. 무섭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시카와 소학교 고등과 2학년생)

3일은 점심 무렵부터 이웃 사람들이 칼이나 창, 쇠몽둥이를 들고 다녀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리노우치堀之内 쪽에서 한 사람을 데리고 요란하게 떠들며 나카무라 다리 위로 갔다. 그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많은 사람이 조선인을 다리 위에서 칼로 베거나 쇠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결국에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미나미요시다 제2소학교 6학년생)

4일이 되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미안해요, 이해해주세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호주머니를 조사해보니 독약이나 성냥과 종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놈들은 죽여버려야 한다며 칼로 베라고 했다. 때리고 발로 차서 눈 위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일어나려고 했다. 다리와 손을 묶고 학교 언덕에서 질질 끌고 와서 구루마 다리車橋에서 내팽개쳐버렸다. 그래도 아직 올라오려고 했다. 다 같이 돌을 던지고 나니 죽고 말았다. (이시카와 소학교 고등과 2학년생)

작문 중에는 “4일과 5일은 조선인의 일뿐이어서 무섭지 않았다”(미나미요시다 제2소학교 6학년생)고 적은 것도 있다. 아무튼 생생한 내용의 작문이다. 정말 현실감이 느껴진다. 유사한 광경이 여러 글에 등장한 것도 눈에 띈다. 어린이의 눈에 비친 조선인 학살은 당시의 참혹한 장면을 부분적으로 묘사했다.

어린이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인 학살을 집단적 정신이상이 일으킨 해프닝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일본 사회에 내포된 모순이 분출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런 사실과 연유를 따지지 않았고, 없었던 일로 잊어버리기를 원했다. 그 결과 이제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사태가 야기되었는지 파악하거나 규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망각 속에서 학살 부정론이 머리를 드는 것이다.

학살의 망각, 그리고 다시 기억하기

지금 일본 사회에는 역사 부정론이 급격히 힘을 얻고 있다. 이런 경향을 이해하려면 역사 수정주의의 움직임과 넷우익과의 관련성을 살펴봐야 한다. 1990년대 이후의 사회경제적 위기감이 팽배해진 상황을 틈타 일본에서는 역사 수정주의가 전면에 대두되었다. 이들은 교과서가 근현대사 부분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지배, 전쟁 책임 문제 등을 과도하게 강조해 전체적으로 일본의 ‘어두운’ 면만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국가에 대한 일본식 ‘애국심’을 강요하며,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국민 만들기’로 지지 계층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기존 우익 인사들만이 아니라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의 역사 인식에 직접 영향을 미쳐 온라인상에서 혐한⋅배외주의를 유포하는 넷우익Net右翼을 만들어 냈다. 역사 수정주의는 지식인 계층이 주도하는 시민운동이고 넷우익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일본 사회에서 전개된 1990년대 이후의 변화양상을 반영했다는 측면에서는 근원적으로 상통한다. 혐한과 배외주의 운동은 일부 계층의 일탈행위로만 간주할 수 없다. 넷우익의 선전에 따라 역사 부정론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시민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역사 부정론을 표방하는 세력이 최근에는 제국 일본이 자행한 부조리를 지적하는 위안부 연구자를 비롯한 양심 세력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 역사 부정론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도 작동하는데, 대표적인 예는 넷우익의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와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의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사 송부 거부 사태다.

그들은 관동대지진 당시 6,000여 명이라는 조선인 희생자는 과장된 것이고, 설령 조선인이 살해당했다고 해도 이는 정당한 방어행위였다고 강변한다. 따라서 추도식에 추도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그동안 추도식은 한일 양국의 시민들에 의한 학살에 대한 반성과 추모의 상징으로, 조선인 학살의 역사를 교훈 삼아 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하자는 의미에서 보수적인 도지사들도 추도사를 보내왔다. 그러나 고이케 유리코는 2017년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에 추도사 송부를 거부했다.

자경단 등에 의해 6,000여 명이 살해됐다는 추모비는 잘못된 것이고 일본인 또한 나쁘지 않다는 것이 역사 부정론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우익단체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을 방해할 목적으로 추도식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위령제를 개최했다. 집회에는 “6,000여 명이라는 거짓말에 우호는 없고 사과는 필요하지 않다”는 선전 간판도 세웠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의 ‘불령행위’에 자경단이 정당하게 방어한 것이라고 외친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혐한과 배외주의 운동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주변국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주변 국가에 대한 적의를 발동시켜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으로 전화하려는 것이 그들이 노리는 프레임이다.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부정도, 추모에 대한 거부감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역사 부정론이 팽배한 일본 사회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기억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을 맞이해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연구의 심화와 함께 다양한 활동이 요청된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일 간의 역사문제를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조선인 학살이라는 야만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후대에게 전승할 것인가?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거나 일본 정부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학살당한 6,000여 조선인의 죽음을 그냥 묻어두는 것은 역사가 저지르는 또 다른 범죄행위다. 그동안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외롭지만 꾸준하고 힘 있게 문제를 제기해 온 재일조선인과 양심적인 일본인의 운동을 거울삼아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남한 그리고 더 나아가 북한도 연대해 일본 정부에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1923년 9월 1일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자세가 남⋅북한과 일본의 양심 세력이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다. 조선인 학살의 실태와 기억을 사회화시키고 전승하는 일이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이하는 출발점이다. 남⋅북한과 재일조선인 사회, 그리고 일본 시민사회의 새로운 연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1) 関東大震災時に虐殺された朝鮮人の遺骨を発掘し追悼する会, 『風よ 鳳仙花の歌をはこべ』(教育史料出版会, 1992).

이규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전공은 동아시아 속의 한일관계사이며,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를 거쳐 현재 전북대학교 고려인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재)동농재단 강덕상자료센터 센터장으로 역사 문헌을 바탕으로 근대 일본과 일본인의 한국 인식과 상호 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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