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 인생의 남자를 물어온 친구 에리카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

2008년 9월 큰마음을 먹고 나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향한 곳은 북미 제일 동부 Newfoundland에 있는 Memorial 대학교다. Memorial 대학은 외국인에게 굉장히 저렴한 학비와 훌륭한 생물학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대학이다. 하지만 대학교가 시골에 있고 기후가 춥기로 유명해서 외국인이 없기로도 유명하다.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하여 나는 이 대학에서 생물학 학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어렸을 적 나는 겁이 없었고 어떻게 보면 깊이 생각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가서 열심히만 하면 무엇이든 되겠지... 라는 초긍정 마인드로 머나먼 낯선 땅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도착해 보니 대학가 주변은 예상했던 대로 허허벌판이었고 9월임에도 바람은 세찼고 날씨는 쌀쌀했다.

기숙사 역시 동양인이 한 명도 없었다. 백인이 90%였다. 기숙사에서 곧바로 나는 낯선 존재가 되었다. 능통하지 못했던 영어와 다른 문화 때문이었을까. 백인 친구들은 끼리끼리 뭉치고 굳이 나와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았다. 기숙사 침대에서 “내가 여기를 왜 왔지..” 하며 몰래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던 중.. 생물학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왕방울만큼 크고 푸른 눈을 가진 에리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에리카는 한국 문화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내가 설명해 주는 한국 얘기를 큰 눈을 뜨고 열중해서 들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지산, 난 언젠가 한국에 가서 살 거야”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에리카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캐나다 문화에 어눌한 나를 재밌어하며 도와주고 싶어 했다. 사교성이 남달랐던 에리카 덕분에 나는 기숙사 친구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었고 대학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해 겨울(오른쪽이 에리카 )
그해 겨울(오른쪽이 에리카 )

그해 겨울방학, 2주 동안 딱히 갈 곳이 없던 나를 에리카는 자기 집으로 흔쾌히 초대해 주었다. 에리카의 집은 Nova Scotia에 있었다. 2주 동안 나는 에리카 가족과 함께 지냈다.

선함은 유전인가 싶을 정도로, 에리카 가족은 나를 입양된 딸처럼 대해주었다. 크리스마스트리 밑엔 나의 이름이 써진 선물들이 가득 있었으며 온갖 가족 파티에 나를 데리고 가 딸처럼 소개했다. 처음으로 완전히 외국 생활에 녹아든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느꼈던 따듯한 가족애도 느낄 수 있었다. 에리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린 친구라기보다 자매같이 대학 생활을 했다. 일 년 뒤 기숙사에서 나와 에리카와 집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같이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운동도 하며 보냈다. 신기하게도 대학 생활 내내 우린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에리카와 나(왼쪽은 대학 시절, 오른쪽은 서울에서) 
에리카와 나(왼쪽은 대학 시절, 오른쪽은 서울에서) 

고생 끝에 캐나다 학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년 반 뒤 에리카는 당연한 일정이라는 듯 한국에 영어를 가르치러 왔다. 1년을 계획하고 왔던 에리카는 한국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3년 동안 한국에 있었다. 에리카는 우리 가족과 한 가족이 되었고, 한국문화에 빠져들어 한국어도 능통하게 하기 시작했다. 3년이 지나자, 에리카는 캐나다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서운함, 슬픔,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에리카는 친구 이상 가족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집 제사에도 참여한 에리카 
우리집 제사에도 참여한 에리카 

2017년 6월 10일 우리는 에리카가 한국을 떠나기 전 송별파티를 했다. 그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일이 펼쳐지는 줄도 모르고...

나, 에리카, 미국인 친구 캔딜, 이렇게 셋이 처음엔 간단한 저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다 밤이 깊어져 우린 이태원으로 향하게 되었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7시, 이태원 거리에 서있었다. 해는 이미 밝게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게 창피해 이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취기가 있던 에리카는 갑자기 나와 캔딜을 위해 남자를 찾아보겠다고 소릴 질렀다. 캔딜은 한국인을 사귀고 싶어 했는데, 키가 176cm 꺽다리라 자기와 어울리는 키 큰 한국남자를 찾기 어렵다며 불평하던 터였다. 그런데 바로 우리 눈앞에 남자 세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꺽다리 캔딜과 잘 어울릴 거 같은 키 큰 남자였다.

에리카는 순식간에 남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남자 셋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에리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뛰어가 “저희랑 감자탕 먹을래요?”라고 물었다. 남자들은 백인 여자가 대뜸 한국말로 감자탕을 먹자고 하는 말에 눈을 댕그랗게 뜨고 놀라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다 곧 흔쾌히 좋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캔딜을 위해 점찍어 둔 키 큰 남자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발랄하고 귀엽게 생긴 남자 한 명 그리고 진지하고 묵직해 보이는 남자 한 명과 우리는 감자탕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감자탕집으로 가는 길. 묵직해 보이는 남자를 자세히 보니 눈가에 푸른 점이 있었다. 난 멍이 든 건지, 아닌 뭐가 묻은 건지 궁금해 푸른 점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솔직히 취기가 있어 찔렀던 거 같다). 남자는 이 이상한 여자는 누구지 하는 표정으로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더니 모반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곤 처음 보는 사람이 이런 걸 물어보는 건 처음이라며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우린 정말로 감자탕을 먹었다. 발랄한 친구는 네이버 인사과에 있다고 했고, 묵직한 친구는 기아자동차 디자이너라고 하며 자신이 디자인한 그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솔직히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직종을 처음 접했기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림을 보고 질문도 했다. 묵직한 친구는 신이 나서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이버 친구는 자기도 이런 설명을 처음 듣는다며 웃기 시작했다.

감자탕 먹은 날 아침 
감자탕 먹은 날 아침 

그렇게 에리카가 소원하던 감자탕을 먹고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너무 아쉬웠고 슬픔이 몰려왔다. 에리카와 한국에서의 마지막 아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내가 소리를 대뜸 질렀다. “우리 앞에 있는 한강에 가서 맥주 한잔할까?” 그때 시각은 아침 9시였다. 놀랍게도 모두 다 좋다고 했다. 묵직한 남자는 한강으로 가는 길에 자꾸만 내 옆에 붙어서 걷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에리카랑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 자꾸 에리카 곁으로 갔다. 그날 한강 날씨는 정말 완벽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햇볕은 적당히 따스했다. 사람들은 벌써 한강에 나와 아침 조깅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때부터 너무 피곤해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즐거웠던 기억은 있다. 한 11시쯤 우린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때 당시, 활발한 네이버남, 묵직한 기아남과도 마지막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다음 주 기아남에게서 연락이 왔다. “토요일 커피 한잔할래?”.

난 사실 그 주 토요일에 선약이 있어 거절했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에리카는 이 얘기를 듣고는 나를 단호하게 다그쳤다. “지산,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말고 한번 데이트를 해봐! 내가 볼 때 재밌을 거 같은데? 자동차 디자이너란 직업은 너무 쿨하구~ 새로운 직종을 갖고 있는 사람이잖아”. 에리카는 본인의 공백을 묵직남이 대신해 주길 바랐던 걸까? 에리카의 설득에 못 이겨 그 다음주, 나는 그와 첫 데이트를 했다.

아직도 첫 데이트는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내가 있는 근처로 나를 픽업하러 왔고, 커피를 사놓았다며, 수줍게 커피를 권했다. 그리고 그가 알아본 동네로 향했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쿠스쿠스와 후무스를 파는 특이한 지중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는 엄청나게 긴장했는지, 잘 먹지도 못하고, 말도 좀처럼 꺼내질 못했다. 그런 어눌하고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오히려 귀엽기도 하고 더 호감형으로 다가왔다. 맥주 한잔하고 조금 더 편해진 분위기에서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정말 신기하게도 서로 다르면서도 가치관이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첫 데이트를 시작으로 우리는 매 주말 만났다. 그는 재밌고 특별한 데이트로 나를 설레게도 즐겁게도 해주었다. 다양한 미술 전시회도 소개해 주고, 작품 하나하나 정성스레 설명도 해주었다. 아는 친구가 옥상 영화 이벤트를 한다며 옥상에서 단둘이 영화도 보았다. 재즈 음악을 좋아한다며 재즈 콘서트에도 갔다.

그렇게 우린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그가 좋아질수록... 마음 한편에는 불편함이 자꾸 쌓였다. 사실 1년 전부터 외국으로 박사과정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개월 연애 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박사과정을 가기 위해 지원서를 넣고 있는 중이고, 합격하면 내년에 외국에 가게 될 수도 있다고... 그는 말을 잊지 못했다.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슬픈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내가 내린 결정을 지지하며 장거리 연애도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캐나다 밴프에서. 이때도 에리카와 함께했다. 
캐나다 밴프에서. 이때도 에리카와 함께했다. 

그렇게 2018년 4월 나는 캐나다로 갔다. 정말 고맙게도 그는 장거리 연애를 꿋꿋이 버텼고... 나를 변함없이 지지하고 응원했다. 일 년에 3번씩 캐나다에 놀러 왔다. 놀러 올 때마다 선물 한가득에, 한국에서 먹을수 있는 음식들을 엄마새처럼 갖다 주었다. 그런 장거리 연애를 4년 5개월 하고 드디어 2022년 9월, 우리는 캘리포니아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이지산 주주  jeesanlee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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