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의열기념관> 전경(출처 : 하성환)  경남 밀양은 경북 안동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메카이다. 경북 안동은 이육사, 김동삼, 김시현, 이상룡을 배출했고  밀양은 김원봉, 윤세주, 한봉인, 최수봉 의열단원들을 비롯해 3대 대종교 교주 윤세복, 의열단의  정신적 지도자 황상규 등 70명이 넘는 항일독립지사들을 배출했다.
밀양 <의열기념관> 전경(출처 : 하성환)  경남 밀양은 경북 안동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메카이다. 경북 안동은 이육사, 김동삼, 김시현, 이상룡을 배출했고  밀양은 김원봉, 윤세주, 한봉인, 최수봉 의열단원들을 비롯해 3대 대종교 교주 윤세복, 의열단의  정신적 지도자 황상규 등 70명이 넘는 항일독립지사들을 배출했다.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1923)을 시대 배경으로 한 영화가 2016년 개봉한 『밀정』이다. 영화 속 주인공 조선총독부 경무국 이정출 경부(송강호 분)는 실존했던 황옥 경부를 연기했다. 또 다른 주인공 김우진(공유 분)은 의열단 베이징 지부 책임자 김시현을 연기했다.

『밀정』은 1920년대 의열단의 활약상을 매우 실감 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만큼 대중에게 좋은 역사교육의 장은 없다. 더구나 『밀정』(2016)은 750만 명이 본 영화였으니 더욱 그러하다.

물론 아쉬운 점이 있다. 시나리오 작가가 역사 고증을 좀 더 거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질 못했다. 왜냐하면 영화 자체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건의 핵심을 빠트린다면 대중의 역사교육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압록강 철교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총격전 정도나 경성역에 도착해서 일경과 벌이는 총격전 장면은 명백히 허구이다.

남성 중심의 위선적인 정조 관념에 저항하며 남녀평등을 부르짖은 1세대 페미니스트  정월 나혜석(출처 : 한겨레 고유리 기자) 그녀는 1923년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일명 황옥 경부사건) 당시, 중국 단둥시 소재 일본 부영사 부인으로 폭탄 국내 반입을 결정적으로 도운 인물이다.
남성 중심의 위선적인 정조 관념에 저항하며 남녀평등을 부르짖은 1세대 페미니스트  정월 나혜석(출처 : 한겨레 고유리 기자) 그녀는 1923년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일명 황옥 경부사건) 당시, 중국 단둥시 소재 일본 부영사 부인으로 폭탄 국내 반입을 결정적으로 도운 인물이다.

그러함에도 그 정도 장면은 영화의 재미를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923년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일명 황옥 경부사건)은 1세대 페미니스트 불꽃의 여자! 나혜석을 등장시키지 않고선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영화 전편 어디에도 중국 단둥시 일본 부영사 부인 나혜석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무척 아쉬운 영화였다.

다만 인상에 남았던 점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  황옥에 대한 해석이다. 역사학계 정설은 황옥을 일제의 밀정으로 보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선 항일정신을 간직한 독립운동가로 묘사하며 여운을 남긴다.

그렇다면 황옥 경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황옥은 황희 정승의 19대손으로 경북 문경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이강년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 전쟁을 목격하면서 성장했다. 황옥의 동생 황직연, 황정연을 비롯해 종질 송남헌(우사 김규식 선생 비서), 황의목, 김희중, 김사용이 모두 항일독립투사였다. 한 마디로 황옥 집안 자체가 항일운동가 집안이었다.

무엇보다 황옥은 동갑내기 의열단원 김지섭과 함께 대한제국 재판소 서기 겸 통역관보 시험에 동시에 합격한 동기생이다. 황옥은 의열단 베이징 지부 책임자 김시현과 의형제를 맺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황옥 경부사건(1923) 당시에 황옥과 김시현 둘 다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당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근무할 당시, 의열단원 유석현을 자신의 밀정으로 둘 정도로 담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상옥의 도피를 암암리에 도왔던 인물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사학계는 그동안 황옥 경부를 일제의 밀정으로 보는 게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일제는 거꾸로 의열단의 밀정으로 보았다. 1923년 황옥 경부사건 당시, 황옥이 징역 10년을 언도받은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실제로 김지섭, 황옥 경부가 함께 참여한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1923)은 엉뚱한 데서 작전이 실패했다. 의열단원 김재진이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경찰 김덕기에게 매수돼 작전의 전말을 밀고했기 때문이다. 친일경찰 김덕기는 수많은 항일투사들을 죽게 만든 반민족행위자로  최연, 노덕술, 하판락, 최운하의 죄상을 능가한다.  

나혜석의 도움으로 압록강 철교를 넘어 국내 반입에 성공했던 수십 개의 폭탄과 권총을 총독부 폭파와 친일파 처단에 단 한 개도 사용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일제 피검 당시, 의열단원들과 함께 황옥 경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바로 그 황옥 경부의 친손자가 황정하 열사(1960-1983)다. 황정하 열사는 경남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79년 서울대 치대 입시에서 수석 합격했으나 신체검사에서 색약으로 최종 불합격했다. 이듬해 재수 끝에 서울대 공대에 합격했고 80년대 초 성수동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했다.

 

민주열사 황정하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당시 시위를 목격한 다수 학생들은 <경찰이 밧줄을 흔들었다>고 했다. 한국일보는  <관계기관원의 제지를 뿌리치려다 추락했다>고 보도했다가 이튿날 <본인의 실수로 추락, 중태>라고 정정 보도했다. 전두환 군부정권의 보도 통제였다.  황정하 열사는 서울대 병원에서 1주일 뒤 순국했다. 전두환 군부정권은 곧바로 시신을 벽제화장터로 옮겨 화장했다. 180cm 가 넘는 큰 몸집을 지닌 스물세 살 청년이 6시간 만에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민주열사 황정하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당시 시위를 목격한 다수 학생들은 <경찰이 밧줄을 흔들었다>고 했다. 한국일보는  <관계기관원의 제지를 뿌리치려다 추락했다>고 보도했다가 이튿날 <본인의 실수로 추락, 중태>라고 정정 보도했다. 전두환 군부정권의 보도 통제였다.  황정하 열사는 서울대 병원에서 1주일 뒤 순국했다. 전두환 군부정권은 곧바로 시신을 벽제화장터로 옮겨 화장했다. 180cm 가 넘는 큰 몸집을 지닌 스물세 살 청년이 6시간 만에 한 줌의 재로 변했다.

그는 도시공학과 4학년 졸업을 앞둔 시점인 1983년 11월 8일, 학내시위를 주도했다. 일본의 재무장과 강대국 미국에 굴종적인 전두환 군부독재를 규탄하려는 시위였다. 한미일 삼각 군사 동맹체제를 강화하려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11월 11일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가 캠퍼스는 전경들이 쉽게 학내로 난입했을 뿐 아니라, 사복경찰(일명 짭새)들이 요소요소에 깔려 있었다. 심지어 대학도서관에도 서성거렸는데 눈에 띌 정도였다. 그 시절 시위는 시작한 지 불과 5분도 안 돼 끝날 정도로 한순간이었다. 그만큼 경계가 삼엄했고 캠퍼스는 얼어붙어 있었다.

시위 학생들은 경찰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을 향했다. 일부러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 확성기를 들고 순식간에 유인물을 흩뿌린 채 구호를 외쳤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보도 통제로 언론방송이 모두 망가졌고 지식인 사회 또한 침묵하던 시절이라 오직 순수한 열혈 대학생들만이 그렇게라도 투쟁했다.

중앙도서관 옆 민주열사 황정하 추모비(출처 : 하성환)
중앙도서관 옆 민주열사 황정하 추모비(출처 : 하성환)

황정하 열사는 중앙도서관 6층에서 밧줄을 타고 5층 난간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 순간 도서관 귀퉁이에 잠복근무 중이던 사복경찰이 눈치를 채고 “저놈 잡아라!”며 외쳤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6층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황정하 열사는 15m 아래 1층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뇌골절로 머리에서 피를 흘렸지만 경찰이 쏜 최루가스로 하얗게 뒤덮인 상태였다.

황정하 열사는 신림동 양지병원을 거쳐 다시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곳엔 서울대 의대를 진학한 황정하 열사 형이 있었다. 동생의 죽음을 가족이 맞아야 하는 비극의 순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재판소 서기는 통역관을 겸했다. 오늘날 법원 서기와 위상이 달랐다. 그만큼 일본인 판검사들의 판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였다. 게다가 대한제국기 재판소 서기 겸 통역관은 일제강점기 초기 총독부 칙령에 따라 판검사로 임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해방 직후에도 반복되었다. 일제강점기 법원 서기 겸 통역관들이 해방 직후 미군정 통치 시절, 판검사로 임용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90년대 김영삼 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두 차례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의 아버지 이홍규 검사가 대표 사례이다.

대한제국기 법원 서기 겸 통역관 시험에 합격한 김지섭과 황옥은 그 순탄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시밭길을 택했다. 한 사람은 의열단원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의열단의 밀정으로 독립운동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