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분단 상황은 대한민국 사회를 정상 국가에서 끊임없이 멀어지게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집권 12년 동안 인권을 유린하고 의회민주주의를 철저히 짓밟았습니다. 김원일이 쓴 『마당 깊은 집』(1988)은 전후 50년대 시민의 일상이 어떻게 짓밟혔는지 어린아이의 눈으로 묘사한 소설입니다. 군경을 앞세운 이승만 철권통치의 민낯을 관찰자 시점으로 빼어나게 잘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피난 온 시민들을 항시 감시하고 새벽녘에 느닷없이 군홧발로 집안으로 쳐들어와 때리고 연행하는 장면이 바로 그렇습니다.

올해 작고한 최일남 작가가 쓴 『거룩한 응달』(1982)이나 조정래가 쓴 대하소설 『한강』(2002)에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오히려 정체성을 숨기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삶이 묘사돼 나옵니다. 해방된 자주독립 국가로서 정상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보다 역사 정의가 실종된 반공 국가의 일그러진 민낯을 스스럼없이 보여줍니다. 그 시기 검찰은 군 특무대(방첩대)에 밀려 권력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 검찰은 무소불위 중앙정보부에 빌붙으면서 몸집을 불리기 시작합니다.

50년대 말 이승만 철권통치 아래 고문 조작한 진보당 사건과 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무소불위의 중앙정보부가 고문 조작하고 검찰 공안부 검사들이 기름칠해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들(출처 : 리학효 제천 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이 보내준 자료를 글쓴이가 갈무리하였음)
50년대 말 이승만 철권통치 아래 고문 조작한 진보당 사건과 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무소불위의 중앙정보부가 고문 조작하고 검찰 공안부 검사들이 기름칠해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들(출처 : 리학효 제천 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이 보내준 자료를 글쓴이가 갈무리하였음)

이른바 검찰 공안부가 1963년에 서울지검에 등장하면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공안사건에 기름칠을 해줍니다. 그러면서 독재 정권 통치의 유용한 도구로 귀여움을 한껏 받습니다. 급기야 70-80년대 유신 정권과 5공 정권 검찰 공안부는 검찰의 ‘썩은 꽃’이 되어 최단 승진 코스로 주목을 받습니다.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이 신직수, 김기춘, 김원치, 정형근입니다.

신직수는 박정희 눈에 들어 36살에 검찰총장이 되고 47살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됩니다. 중정부장 당시 각종 공안사건을 조작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지요. 2차 인혁당 사건(1974)과 민청학련 사건(1974)은 그가 중정부장 재임 시에 자행한 극악한 인권 탄압이었습니다.

김기춘은 신직수와 함께 유신 헌법 초안을 만드는 데 일조하면서 36살 젊은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라는 권력 고위직에 오릅니다. 그만큼 공안검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잡혀 온 민주화 인사에게 "쥐도 새도 없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무죄로 판명난 70년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사건들과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들(출처 : 리학효 제천 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이 제공한 사진을 글쓴이가 갈무리하였음)
무죄로 판명난 70년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사건들과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들(출처 : 리학효 제천 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이 제공한 사진을 글쓴이가 갈무리하였음)

김기춘은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1988) 검찰총장이 되었을 때 민주화 운동가들을 '무좀'에 비유했던 인물입니다. 무좀약을 발랐을 때만 잠깐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나 사회 요소요소를 좀 먹는 존재로 진보 인사들을 비하했습니다. 그러면서 군부 독재체제 수호를 위해 검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인물입니다.

김근태씨 고문사건과 관련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현장검증이 실시된 1990년 12월10일 김씨의 부인 인재근씨(맨 오른쪽) 등 재야인사들이 대공분실 입구에서 ‘고문경찰관 처벌하라’는 플래카드를 압수하려는 사복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김근태는 검찰청 복도에서 기적적으로 아내 인재근을 만나 고문을 폭로한 그 힘으로 검찰에서 묵비권을 고집하며 버틸 수 있었습니다. (출처 : 글과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김근태씨 고문사건과 관련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현장검증이 실시된 1990년 12월10일 김씨의 부인 인재근씨(맨 오른쪽) 등 재야인사들이 대공분실 입구에서 ‘고문경찰관 처벌하라’는 플래카드를 압수하려는 사복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김근태는 검찰청 복도에서 기적적으로 아내 인재근을 만나 고문을 폭로한 그 힘으로 검찰에서 묵비권을 고집하며 버틸 수 있었습니다. (출처 : 글과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김원치는 85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시절,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자행한 김근태 고문 사실을 외면한 채, 안기부와 공조했던 공안검사입니다.

무죄로 판명난 80년대 간첩조작사건들(출처 : 리학효 제천 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이 제공한 사진을 글쓴이가 갈무리하였음)
무죄로 판명난 80년대 간첩조작사건들(출처 : 리학효 제천 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이 제공한 사진을 글쓴이가 갈무리하였음)

그는 80년대 서울대 깃발 사건(1985), 민청련 김근태 의장 구속수사(1985), 삼민투 사건(1985), 서울대 자민투 사건(1986) 등 수많은 학생운동 조직 사건을 국가보안법으로 다루었던 레전드급 공안검사였습니다. 조작에 능했던 사상 검사 오제도를 계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쓴 책, 『신국가보안법』은 국가보안법 관련 서적의 교과서로 취급할 정도였습니다.

정형근은 80년대 안기부 대공수사국 수사단장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 은폐, 조작하는 데 깊이 관여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89년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방북한 서경원 의원(평화민주당)과 보좌관 방양균 씨를 직접 고문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90년대 중반 이후엔 부산을 지역구로 하여 총선에 출마해 신한국당(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진형구(한동훈 장인), 고영주, 황교안 또한 공안몰이 정치검사였습니다. 특히 진형구는 조폐공사 노사분규(1998) 당시, 파업 유도 혐의로 1999년 구속된 인물입니다.

1981년 용공 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을 소재로 2013년 12월 18일 개봉한 영화 <변호인> 포스터 갈무리한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2017년 5월 15일자 사진을 글쓴이가 수정해 갈무리하였음) 부림 사건 당시 고영주 검사는 담당 수사검사였습니다.
1981년 용공 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을 소재로 2013년 12월 18일 개봉한 영화 <변호인> 포스터 갈무리한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2017년 5월 15일자 사진을 글쓴이가 수정해 갈무리하였음) 부림 사건 당시 고영주 검사는 담당 수사검사였습니다.

고영주는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부림 사건(1981) 당시, 담당 수사 검사였습니다. 부림 사건은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던 대학생과 교사들을 ‘반국가단체 고무 찬양’ 등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기소한 80년대 부산지역 최대 용공 조작 사건입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거나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떠들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공안검사 황교안은 ‘미스터 국가보안법’으로 불릴 만큼 대표적인 공안검사입니다. 그는 박근혜 정권 시절 법무부 장관으로서 헌법재판소에 위헌 정당 심판을 청구하여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인물입니다. 2014년 합법 정당을 해산시킨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사건으로 그 자체가 역사의 후퇴이자 민주주의 몰락을 함축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2015년 10월 24일 박근혜 정권 <한국사 교과서> 국정제 저지 2차 항의집회(출처 : 하성환)
2015년 10월 24일 박근혜 정권 <한국사 교과서> 국정제 저지 2차 항의집회(출처 : 하성환)

이후 국무총리가 된 황교안은 한국사 국정제 파동(2015) 당시, “전국 2,300여 개 고교 가운데 99.9%가 편향된 검정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다”며 한국사 국정제를 열렬히 옹호했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지요.

경기고나 서울대를 나오는 등 당대 학교 공부를 잘했던 최고 엘리트들이 공안검사가 되어 공공의 안녕이라는 공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중정, 안기부, 경찰청 대공분실의 잔혹한 고문을 묵인,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해 독재 권력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마치 자신들이 아니면 대한민국이 금세라도 무너질 듯이 공안 엘리트로서 자부심(?) 또한 대단했습니다.

2차 인혁당 사건(1974) 당시 8인의 사형수 가족들도 고문의 대상이었습니다.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한 김용원(경기여고 교사)의 아내가 겪은 내용은 화학 고문(약물 투여)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담겨 있어서 수사기관의 잔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용원의 부인 유승옥 씨(51세)는 중앙정보부에서 겪은 해괴한 일 때문에 자살을 꾀하기도 했다. 그녀는 정보부로 연행되자마자 그곳 취조 요원 한 사람이 다짜고짜로 유 씨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런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간첩의 여편네, 왜 까불고 다녀!’...(중략) 그런 후 취조가 시작되었다. 반쯤 얼이 나간 부인 유 씨는 목이 말라 물 한 컵을 청했다. 그들이 건네준 물을 반 컵쯤 마셨는데 조금 있다가 묘한 느낌이 그녀의 몸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성적인 흥분이 일어나며 몸이 비비 꼬이는 것이었다. 어떤 약물 작용 때문임이 분명했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몰라 의자 밑으로 굴러떨어지기조차 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그녀는 요원들이 불러주는 대로 ‘내 남편은 간첩’이란 글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환각 증세는 여전했다.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나며 사흘이 지나도록 한잠도 잘 수 없었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자책감이 밀려왔다. 남편을 간첩이라고 밀고한 꼴이 된 그녀는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 김재명(2001). 「유신독재의 제물, 인혁당 사건」. 천주교 인권위 『사법살인 – 1975년 4월의 학살』 179-180쪽. 박원순(2006). 『야만시대의 기록1』 역사비평사. 147쪽에서 재인용.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있는 이재문 열사 무덤(출처 : 하성환) 이재문 열사는 대구일보,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를 역임하고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중, 제2차 인혁당 사건(1974)으로 수배 중임을 알고 1976년 지하조직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합니다. 남민전은 박정희 유신 정권 말기인 1979년에 공안기관에 포착되면서 이재문 열사는 체포돼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극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재문 열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 중 80년 광주학살 소식을 접하자 옥중 단식으로 전두환 살인 정권에 항거했습니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를 요구했으나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선 치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재문 열사는 1981년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합니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있는 이재문 열사 무덤(출처 : 하성환) 이재문 열사는 대구일보,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를 역임하고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중, 제2차 인혁당 사건(1974)으로 수배 중임을 알고 1976년 지하조직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합니다. 남민전은 박정희 유신 정권 말기인 1979년에 공안기관에 포착되면서 이재문 열사는 체포돼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극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재문 열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 중 80년 광주학살 소식을 접하자 옥중 단식으로 전두환 살인 정권에 항거했습니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를 요구했으나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선 치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재문 열사는 1981년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합니다. 

물고문, 전기고문, 야전침대 각목으로 구타하는 건 기본이고 잠 안 재우기, 심리적 고문인 세뇌를 통해 수백 장씩 자술서를 쓰게 하고 암기시키면서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잔혹하게 짓뭉개버렸습니다.

그러나 공안검사들은 2000년대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참여정부가 잇달아 들어서면서 무게감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가 진전되고 시민권이 존중되는 정치사회 환경이 조성된 결과였습니다. 간첩 조작에 능한 공안부 검사보다는 오히려 재벌과 고위 관료, 유명 정치인의 범죄를 다루는 특수부 검사들이 뜨기 시작했지요. 검찰 승진, 출세의 양 날개인 공안부와 특수부에서 특수부 검사들이 공안부 검사들을 제치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른바 ‘칼잡이’ 검사들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면서 윤석열의 도래를 예고했습니다.

검사 시절 윤석열은 사상 검사 오제도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해방공간과 이승만 정권 초기 오제도, 선우종원, 정희택 사상 검사의 계보는 70-90년대 신직수, 김기춘, 김원치, 정형근 등 공안검사들로 계승됩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엔 특수부 검사들로 대체됩니다. 공안부 검사나 특수부 검사 가운데 묵묵히 공익을 추구한 검사들도 많겠지만 권력을 좇아 부나방처럼 달려든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임수빈 검사가 2017년 펴낸 <검사는 문관이다>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임수빈 검사가 2017년 펴낸 <검사는 문관이다> 책 표지(출처 : 하성환)

비록 일부이지만 특수부 정치검사들은 자신들을 ‘칼잡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며 자부심을 갖는 듯합니다. 그러나 임수빈 검사는 자신이 펴낸 책 『검사는 문관이다』에서 검사의 기본 업무를 이렇게 일갈합니다.

“검사들이 종종 ‘나 칼잡이야, 무사야’ 이러는 것 같은데 검사는 문관이다. 검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검사가 공익의 대표자로서 인권 옹호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리를 규명해서 상대방이 권력이 높든, 돈이 많든 가차 없이 친다는 생각을 갖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다. 검사의 기본은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검사가 해야 하는 일은 뭐냐면, 경찰 수사가 제대로 되는지 감독을 하고 사건이 송치되면 수사가 잘 됐는지 확인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거다. 기소하면 법원이 재판을 제대로 하는지 견제해야 한다. 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후라도 사건의 진범이 잡혔다고 치자, 그러면 ‘그거 잘못됐다’라고 바로 잡아주는 정도는 돼야 한다. 이게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검사의 기본 임무다.” - 임수빈(2017). 『검사는 문관이다』. 스리체어스. 161쪽.

임수빈 검사는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에 MBC PD 수첩 사건을 맡은 주임 검사였습니다. 그는 PD 수첩 제작진을 기소하라는 검찰 윗선의 지시를 거부하고 무혐의 의견을 냈습니다. 그리곤 이듬해 검찰을 떠났던 인물입니다.

가치 혼돈의 시대! 칼잡이를 자처하며 정의의 사도인 양, 권력을 좇기보다 공익의 수호자로서 인권 옹호 기관이라는 검사 본연의 임무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 그것이 왜곡된 시절! 흔들리지 않고 검사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임수빈 검사처럼 말이지요.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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