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산활동에서 소외되는 인간 노동

[편집자 주] 김진희 한겨레 주주통신원이자 '문화공간 온' 조합원은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한국외환은행 근무했고, 현재 공인노무사로 에이스노무법인 대표이다. 서울시 강북구청 생활임금 심의위원회 위원, 출자출연기관운영 심의위원회 심사위원, 서울시 마포구상공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생산시장에서  

우리는 왜 소외되고 있을까

최근 프랑스 시민들은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쉬운 해고, 긴 노동시간)에 대해 친기업적 노동개혁이라며 격하게 반대하면서 최루탄에 맞서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정부는 지속되는 경기침체가 바로 이 근로자들에 대한 노동정책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회당 정부는 10%에 달할 만큼 고질적으로 높은 실업률을 낮추려는 목표로 해고 요건과 주 35시간 근무를 완화하는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 국제 노동절(메이데이)이던 지난 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한 도심 광장에서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에 반대해 시위를 벌이는 하는 시민들 뒤로 경찰이 쏜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다.(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742354.html)

최근 세계경제나 우리 경제나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면 거의 몸부림에 가깝다. 대표적인 것이 양적완화라는 것인데 이는 돈을 풀어 소비를 늘려 경제가 활성화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소비로 가야 할 돈이 제대로 순환되지 않고 어딘가에 묶여있음을 의미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예를 들어 A기업이 생산하고 있는 최종 생산품의 가격이 1000원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생산 가치는 각각의 생산요소인 지대, 이윤, 이자, 임금으로 각각 공헌한 만큼 배분된다. 그리고 이렇게 배분된 가치는 다시 중간재 또는 최종 생산품을 구매하는데 쓰인다.

경제 규모가 100이라고 가정하면 위의 예와 같이 원칙적으로 100 만큼 지속적으로 순환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의 생산 동기는 항상 더 많은 이윤 창출에 있다. 따라서 경제를 팽창시킬 여러 변수들이 개입되고 흔히 이를 경제성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를 팽창으로 견인해온 인구증가(양적 증가), 기술혁신(질적 증가) 등이 한계에 이르다 보니 자본가의 이윤도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자본가는 외연 확장 대신 비용절감 노력을 통해 이윤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생산원가의 중요한 절감 대상인 임금 총액을 줄이는 노력은 소비 위축을 부르고 기업은 생산을 줄이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경제는 가라앉게 되고 임금 생활자인 근로자들의 생활수준도 갈수록 어려워지게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경제가 무한히 성장해가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즉, 경제가 정체 상태일 경우를 가정하기 어려운 원리인 것이다.

01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지속적 팽창을 전제로 한다

경제란 무엇인가. 이처럼 생산된 생산품을 인간이 소비(구매)하고 다시 투자되어 생산품이 만들어지는 순환과정 아닌가.

결국 이 최종 생산품이 대체로 소비되면서 다시 생산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으려면 최종 소비재 가격과 임금(소비재를 주로 구매할 능력) 수준과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도록 경제규모가 지속적으로 팽창되어야 한다(실제로는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차이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팽창 원리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유형은 기술혁명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이 정체기에 도달한 선진국 기업들의 후진국으로의 생산시설 이전을 통한 가격 하락(생산비용 절감을 통해)으로 팽창 효과가 가능해진다. 또 하나의 유형인 전쟁(1,2차 세계전쟁 및 국지전 등과 같은)과 같은 지역 간 불균형 상태 유발을 통해서도 이러한 팽창 효과가 가능해진다.(물론 팽창 효과는 적어도 소비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여야 함)

문제는 전 세계의 경제 수준이 전체적으로 균일해지는 상황, 즉 더 이상의 팽창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경우이다. 그때부터는 소비자도 소비를 줄이게 되어 받는 임금만큼만 소비할 것이다(물론 이러한 상황은 국지적으로도 경험하고 있음). 자연히 최종 생산품에 대한 재고가 늘어날 것이고, 자본은 생산을 줄이게 된다(다른 구매능력인 지대, 이자 부분은 상대적으로 소비효과 변동이 크지 않으므로 언급하지 않았음). 이처럼 생산이 줄면 근로자가 노동소득으로 취할 수 있는 돈(소비력)이 적어지게 되고 다시 소비 하락에서 생산 감소로의 순환구조가 이어지게 되어 경제규모는 팽창이 아닌 축소로 가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근로소득자의 실질 근로소득이 갈수록 저하되어 생활이 피폐해지고 심지어 극심한 실업(생산 감소로 인한 노동의 거부 현상)으로까지 오게 된 상황은 이러한 원리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자본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세계적 IT기업인 구글의 알파고를 통해 구체적 상황으로 인식되기 시작됐다. 인간을 대체한 기계로 인해 실업률이 급증한다거나 기계와 공존하더라도 그 생산성 경쟁에서 밀리게 되어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하락하게 되는 경우까지 불안감은 이제 막연한 수준이 아닌 것이 되었다.

02  우리는 노동력을 독립적으로 제공하고 있을까

오늘날 개인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물자들의 생산과 소비는 개인이 아닌 구조화된 산업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지 오래다. 자본이 유도하고 있는 과잉소비는 이러한 팽창 원리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할 것이다. 어찌 됐든 그러한 모든 생산 활동에는 반드시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를 동반한다.

수렵채취 시절의 노동은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농노(지주의 땅에 예속되어 농사를 짓던 신분)제 또는 노예제가 있었는데 그들의 노동력을 의미하는 신체는 온전히 누군가에게 예속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노예 해방 이후의 산업현장에서 우리의 노동력은 독립적인가?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한 오늘날의 생산현장에서도 역시 노동력을 가진 인간은 다음과 같이 자본에 예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근로시간이라는 계약된 시간 안에서 근로자(노동력)는 사용자(자본)에 예속된다. 고용관계는 다른 계약관계와 달리 그 자신이 신체를 이용해 수행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사람 자체가 종속될 수밖에 없는 특징이 있다. 둘째, 최소한 자신이 원하는 재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행위, 즉 스스로 자본에의 종속 상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03  우리의 노동은 생산 요소로서 정당한 가치를 받고 있을까

자본이 소비자로부터 상품의 대가로 1000원을 받아 이중 근로자 B에게 500원을 인건비로 지급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최종 생산품에 대한 원가개념의 하나인 이 인건비 비중(500원)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책정된 것이며 어느 정도가 적정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이는 생산 활동에 투여된 각각의 요소들이 그 최종 결과에 어느 정도의 대가를 나누어 가지게 되는지의 문제로서 배분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표방하고 있는 이 시스템 속에서 각각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고 정당하게 순환되고 있는지를 판단할 근거가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본주의라는 것은 각각의 생산 요소들의 정당한 평가 위에서의 시장경제를 의미하는 것이지 이러한 Rule이 배제된 채 어느 한쪽의 이해관계자가 힘의 논리로 시장을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 근로소득자들의 소득 수준이 갈수록 저하되어 왔고, 최근 총 고용율도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상품화된 노동력은 정당한 평가 기준 같은 것 대신 시장논리라는 이름 하에 오로지 자본가 의지만이 그 기준을 대신하고 있다. 그들이 갑자기 생산을 줄이든(실업자를 만드는 경우까지) 급여를 감축하든 우린 이에 이의를 제시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아니 사회적 합의 자체나 기준이 없기 때문에(이렇게 중요한 일에) 이의를 제시할 기준도 없다. 

생각해 보자.  생산의 3요소는 흔히 토지, 노동, 자본이라고 알고 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야 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즉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어느 하나가 없으면 생산 활동 자체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요소 중 노동과 자본은 끊임없이 재투자되는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노동은 순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항상 동일한 수준의 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상태적 의미로 해석).  생산요소간의 가치 비중이라는 개념에서 볼 때 노동력의 증감은 인구수 증감을 의미하고, 인류는 생산에 종사하는 종사자이자 생산품 소비자이기 때문에 생산품에 대한 생산과 소비의 영역에서 그 비중이 크게 달라질 이유가 없다. 노동력을 제공하여 생산품을 만들어내고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생산품을 구매하는 생산의 순환과정에는 항상 인간의 (노동)과 (소비)가 개입된다. 자본의 비중도 생산물 순환의 주체인 인구수 증가에 따른 총량의 증가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자본이 만든 생산품은 결국 인간만이 소비(다시 화폐로 자본에 귀속하게 됨)할 수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현재 인구수에 대한 비중이 급격히 증가할 이유가 없다.

결국 이러한 순환과정에 항상 개입이 되고 있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각각의 생산 요소에 대한 가치 평가는 하나의 제품이 만들어졌을 때 제품가치의 몇 %를 그 생산요소의 몫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로 귀결될 것이다.

04  노동력의 가치 하락은 상대적으로 자본(부)의 공룡화를 촉진해 왔다

그렇다면 노동의 경우는 어떠한가. 생산량에 비례하여 노동력의 상대적 총량이 단기간에 급격히 하락한 경우도 급격히 상승한 경우도 없었다. 왜냐하면 생산물을 만드는 것(노동을 통해)도 생산물을 필요로 하는 것(소비)도 대체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떠한 생산품도 인간의 노동력이 개입됨 없이 생산되지 않았으며, 어느 소비재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소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왜 노동에 대한 가치는 자본의 가치(자본이 가져가는 이윤 또는 누적된 자본 총량)보다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즉 산업화 이후 어느 순간에도 인간의 노동력이 배제된 채 생산품이 만들어진 경우가 없음에도 왜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보다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가치를 조성하고 배분하는 주도권을 자본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노동력의 상대적 가치의 하락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까? 과다한 근로를 감당하는 형태로 상대적인 가치 하락이 나타났는가 하면(근로시간의 증가만큼 임금이 인상되지 못하면 시간당 노동의 가치가 하락한 것임.) 최근에는 근로의 수령 자체가 아예 거부되는 실업의 급증 형태로 노동력의 전체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노동력이 생산물 대비 적정한 가치로 대우받아 왔는지, 그리고 상대적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다면 상대적으로 가치가 상승해 온 자본의 가치는 정당한 것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처럼 하락하고 있는 노동의 가치에 비해 자본의 총량은 점차 공룡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그 분배 수준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력에 비례해서 점차 커져가는 자본의 힘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한 치우친 비율 배분으로 인해 삶의 기본이 되는 노동의 대가는 점점 줄어들어 개인의 생활이 궁핍해져 가고 심지어 이 풍요로운 21C에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약 8억이라고 할 정도이다.

반면 자본의 투자에 대한 대가는 점점 늘어 주체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고 이러한 불균형 상태는 세계적인 부호들조차도 스스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을 정도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자본력이 인간을 향해 새로운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05  생산활동은 자본이 아닌 우리 인간의 생존 시스템이다

근본으로 돌아가 (생산-소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생산 활동은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이 없으면 이러한 활동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즉, 생산 활동은 이처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소비재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방식일 뿐 자본의 배를 채우기 위한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생산 활동 과정에서 극단적인 왜곡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인간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산 활동 본래의 목적을 위한 과정에 노동과 자본이라는 생산수단이 개입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집중화된 자본이(노동은 개인별로 제공) 이 모든 생산요소의 가치를 마음대로 조정해 온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그들은 과거 신분사회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지배 형태를 대신하기 위한 구상을 기초로 산업사회를 이끌어온 것이 아닐까.

산업사회를 이끌기 시작한 초기 산업자본이란 그 규모가 지금과 비교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물론 노동 역시 당시에 인류사회 전체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오늘날 거의 모든 부분이 산업화(생산활동과 소비활동)로 대체되면서 모든 인류는 산업사회에 편입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초기의 산업자본이 오늘날 공룡화된 자본이 되기까지 자본이 확대되어 온 근거가 무엇일까. 자본가들이 신의 능력으로 어느 날 갑자기 공룡으로 키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의 자본은 다름 아닌 인간의 노동력이 끊임없이 개입되면서 생산된 생산품, 이러한 생산품의 가치에서 출발한다.(생산품을 팔아서 남은 이윤을 축적해 온 것으로 인간의 노동력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 결국 인간 노동력의 대가에 비교해 터무니없이 확장되어 온 자본의 가치라는 의미는 다름 아닌 노동력의 착취에서 비롯된 것임이 확실해진다.

06  노동에 대한 시장논리(수요공급의 법칙)는 공정한 게임일까

자본이 생산한 생산품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격이 형성되고 만일 그렇게 형성된 가격이 생산원가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그 제품은 시장에서 생산(공급)이 중단된다. 그리고 새로운 제품으로 자본력이 이동한다. 이것이 시장논리다.

그렇다면 노동의 경우는 어떠한가. 노동 역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생산품이 시장원리에 맞지 않아 퇴출(공급 중단)되는 것처럼 노동의 경우도 공급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까. 노동의 경우 원가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인간이 지속적으로(죽음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안정적 기반이라 할 일종의 최저생계비 또는 생활임금(법률적으로 가까운 개념은 최저임금)이 이를 대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최저생계비에 이르지 못하는 수준의 노동의 대가라고 해서 인간이 노동공급을 중단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비록 최저생계비에 미흡한 수준이라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의 포기는 삶의 포기를 의미함) 그 돈이라도 받고 노동력을 공급하게 된다.  이러한 게임을 어찌 정당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을 기반으로 하는 생산 활동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라도 최종 생산물에서 자본이 재투자되고 순환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에 대한 배분 비율이 어느 정도이고 사람이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임금 수준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에 대한 꾸준한 합의가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본래 목적이 호도되는 기형적 성향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인류가 최소한 인간성을 유지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07  노동에 대한 보호 장치는 제대로 작동해 왔을까

우리는 이쯤에서 시장논리가 경제 전반의 자연스러운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것이라는 오랜 착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노동과의 관계에서 자본은 절대적 권력과도 같은 것이다. 설령 자본가가 자본력을 상실했다고 해서 생존의 기반인 노동력 상실과 견줄 바가 아니다. 이런 불균형적 토대 위에서 자본이 오늘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해 왔고 다수의 개인들은 생존의 밖으로 내몰리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물론 이런 불균형성을 염두에 둔 보완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시작과 함께 확립된 시민법은 전적으로 계약 당사자간 자유에 의한다는 사적 자치를 기본으로 한다. 이러한 계약자유의 원칙을 일부 수정하여 노동 관련 보호법 등을 만들어 작동했지만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그러한 보호조항이 있었기에 현재 수준에 머무른 것이었다면 그러한 보호제도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혹독한 상황이 벌어졌을까 하는 교훈을 주었을 뿐이다.

[근로기준법 제2조 제1항]에서는 근로자의 개념을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 함은 ‘사용자의 지휘·명령을 받아 근로하는 자’로서 사용종속관계를 전제로 한다.  즉 근로자가 제공하는 노동은 종속노동(경제적 종속/신체적 종속)을 의미하는데, 근로자는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임금 등 근로조건을 결정함에 있어서 상대방(자본)과 평등한 입장에 설 수 없고(경제적 종속), 노동과정에서 사용자의 지휘·명령 등 인적 지배를 받게 된다(신체적 종속)는 것이다.

개인이 직접 수렵 채취하던 사회로부터 새로운 산업구조를 만들어 노동을 상품화한 것도 자본이다. 거대 자본은 노동력을 취사선택할 수도 있고, 때로 노동시장 재편을 통해 노동시장 규모를 축소시키기도 한다. 그들의 더 많은 이익 향유를 위해서.

노동 관련법(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등)은 이처럼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자본의 일방적 횡포로 흘러갈 가능성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보호조항을 포함하고 있고, 이는 개인이 자본(사용자)과 근로계약을 체결했을 때의 보호대상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오늘날과 같은 극단적 양극화와 함께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인간이 소외되고 있다면, 그 보완장치가 충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인류가 허용한 시장경제라는 것이 극도의 약육강식을 토대로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해도 되는 계급적 상황을 허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생존의 기로에 선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우리나라 15~29살 청년 중 최저임금도 못 받는 열정페이 수는 63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화려해야 할 자연법칙 속의 젊음은 어디 가고 오직 생존 문제만을 등에 업은 채 시간을 재촉하고 있는 듯하다. 젊음을 품을 수도 없는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동안 자본주의는 생산요소들의 불균형 상태(사회적, 지역적)를 오가는 과정에서 성장해 왔다.  사실 성장이라는 것은 이러한 불균형 상태를 통한 일시적인 숫자의 끌어올리기라는 눈속임이기도 하다.  즉 누군가의 희생을 토대로(일본이 한국전,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을 통해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듯이 전쟁은 참전국에 엄청난 경제효과를 가져옴) 새로운 수요가 폭발적으로 생성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불균형 상태를 이용한 팽창은 다양하게 작동해 왔으며 헷지펀드 등은 불균형성을 이용한(금융시장 교란 등) 극단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장을 가장한 각종 정책들(인플레, 통화량 등)을 통해 각종 지표(특히 노동가치의 평가)의 정확성이 희석되고 불분명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편중된 부의 재편성은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상황도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예상되는 장기적 경제의 축소는 기업에도 위기로 다가오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가 되었다.(당장은 상대적 부의 축적 감으로 기분 좋을 수는 있어도) 저성장이 지속되면 기업 활동이 위축되면서 이윤 역시 지속적으로 축소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본가보다 근로소득자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자본이득에 대한 세금과 근로소득에 대한 세금이 동일해야 한다.’ MS의 빌 게이츠의 말이다. 즉 근로소득자의 소득은 대부분 소비되어 경제순환에 기여하지만 자본 소득자의 소득은 극히 일부만 소비되고 나머지는 순환되지 않고 있는 탓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소수의 자본과 부는 지속적으로 축적될 수밖에 없고 나머지 경제주체들은 점점 축소되어 오늘날과 같은 극심한 실업과 빈곤과 기아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자체가 자유경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불공정 배분이 완벽하게 오차 없이 개선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최소한 그 오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노동과 자본에 대한 적정 배분의 형태는, 너무나 당연함에도 시장만능에 가려져 감히 드러낼 수조차 없었던 2단계로의 접근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첫째, 최종 생산품에 대한 각 생산요소의 배분 단계에서 기본적인 공정배분이 가능하도록 각종 규제나 사회적 합의가 끊임없이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그렇게 했음에도 다른 여러 사유(비자발적 실업, 임금격차로 인한 근로자 간 생활 격차, 예기치 못한 각종 재해 등)로 인해 발생하는 생활격차의 문제는 사회복지의 확충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 이 글은 제 브런치계정에 게시된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편집: 이미진 편집위원, 김미경 부에디터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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