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감성을 읽는다는 것

부모로서 아이를 키우는 동안 우리 세대 부모들의 시선은 늘 자신의 아이만을 향하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을 항상 자신의 아이의 경쟁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그 시각, 물론 그런 진한 가족주의가 그 시기에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경이로움이랄까 나는 막연히 내 의지대로 아이를 키워서는 안될 것 같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시기에 특히 더 예민해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이 중심이 되면 외부와의 경계선에서 그 가족을 지켜내기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면서도 큰 성과를 얻어내기 쉽지 않지만, 협동 또는 공유의 개념으로 가게 되면 보다 덜 경쟁하면서도 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될 텐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늘 안타까웠던 기억.

▲ 옛날 짱구가 요즘은 짝꿍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던 전쟁세대의 그 처절했던 생존 방식이 그들의 의식 깊이 뿌리 박히게 되었고, 그런 삶의 방식은 그대로 다음 세대로 학습되면서 그들에게도 역시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생각이 그곳에 이르자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일종의 ‘비난’에서 ‘이해와 교육’으로 가야 할 것이라는 나 자신의 자각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기성세대가 된 나는 요즘의 젊은 세대들의 감성을 보면서 나의 젊은 시절의 감성과 많이 다름에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 당혹감은 그들이 나와 달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감성의 갭이 벌어져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데 대한 일종의 작은 충격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감성은 타인과의 소통에서 기본 창구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감성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관계나 갈수록 심각하게 겪고 있는 세대 간 격차에서 오는 당혹감도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감성이란 인간의 심리와 관련된 것인 만큼 거창하게 심리학적 또는 학문적 잣대로 이를 분석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보고 경험한 감성의 흐름을 따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의 접근방식일 것이란 생각이다.

 

감성이란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이라고 한다. 철학적 의미로는 ‘이성(理性)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외계의 대상을 오관(五官)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고 한다. 감성과 관련된 인간의 심리상태로는 감수성, 감각, 느낌과 같은 것이 있으며 감성 자체는 생각, 사유 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스타벅스는 이런 감성을 읽어내는 감성 마케팅으로 성공신화를 이루어 낸 기업으로 유명하다. 감성 세대, 감성 마케팅, 감성 패션 등 감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리드하기도 하면서 오늘날 주 소비층의 감성을 읽어내어 소비로 연결하고자 열을 올리는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에는 간절함이 있다. 이처럼 어떠한 상호작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감성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해졌고 우린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세대 감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의미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01 감성의 트렌드에는 어떤 요인이 작용할까

 

감성은 감각자극을 받는 즉시 직관적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의 감성은 외부로부터의 감각정보에 대하여 직관적(intuitive)이고 반사적(reflective)으로 발생된다. 또한 감성은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느낌으로서 명확한 표현이 어려운(ambiguous) 동시에 개인과 환경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는(personal and dynamic) 특성이 있다. 개인의 감성에 미치는 요인은 개인적인 사항 이외에도 사회적, 문화적 요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감성심리/생리 [Affective Psychophysiology] (학문명백과 : 복합학, 형설출판사)

 

시대별 또는 세대별로 외부 변화에 대해 표출되어 나타나는 감성의 온도차는 그래서 그 시대상의 변화의 정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감성의 흐름은 세대 흐름에서도 감지되지만 개인의 경우도 평생을 통해 변화의 흐름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처럼 급변하는 시대에는 세대 간 온도차가 한층 강하게 다가온다. 속성상 변화 속도가 느린 중장년이나 노년, 그에 비해 변화 속도에 익숙한 젊은 세대간의 격차는 점차 커져가는 양상이다.

 

당연히 이런 감성의 차이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회문제들을 풀어가는 과정과 방법의 차이로도 나타나곤 한다. 따라서 세대 간 감성의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감성 표출의 메커니즘을 살펴보고 이를 이해하다 보면 세대 간 격차(흔히 세대차)에 대한 방안도 따라오게 되지 않을까.

 

어떤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그 시대상황, 나이(경험), 사회 시스템의 형태(문제에 대해 접근해가는 방식)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게 된다. 사회가 심각하게 복잡해진 오늘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사건, 사고 등 일상을 대할 때 드러나는 감성도 이러한 요인들이 집약되어 순간적으로 작용하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는 감성이라는 것 자체가 개인이 축적해온 경험과 정보를 토대로 한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인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성은 이처럼 복합적이고 직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자극에 대해 다른 감수성을 보이고 있는 각각의 세대는 소통의 과정에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고 종종 갈등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대마다 젊은 세대들의 감성이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현재 드러나고 있는 감성 그 이면의 사회적 배경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는 것은 그러한 감성이 발현하게 된 원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02 역사적 사건들은 어떤 세대 감성을 만들었을까

 

오늘 이 사회를 살아가는 세대들(의식의 차이를 보이는 연령대)은 대체로 역사적 변혁기를 중심으로 3세대로 구분이 되는 것 같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 전후세대, 전후세대의 자식 세대로의 구분인데 이들 세대들의 성격은 역사적 상황과 같은 특성 외에도 그 사회의 발전방향이나 시스템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교육시스템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6.25라는 시대상황을 거친 전쟁세대는 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학교라는 것이 막 생겨나기 시작한 시대를 살았고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어찌 보면 계급사회의 잔재 속에서 또다시 억압자가 나타난 상황이었으므로 개인은 가능한 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며 사회는 국민의 삶에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 채 개인의 삶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인 시대였다. 그런 절박함으로 다져진 전쟁세대들의 강인함은 종종 이후 세대들에게 고집스러움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근대교육을 받지 못했고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이 오직 몸으로 경험하면서 겪어온 삶은 생존 경험 자체가 삶의 논리였으므로 젊은 세대와의 관계에서 흔히 꼰대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후 전후 세대들이 청년기를 보낸 시기는 학교교육이라는 것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교육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전후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군사독재, 개발 위주의 정책이 사회분위기를 주도했으며 국가라는 개념도 정확히 이해되지 못한 채 개인보다는 전체의 개념이 강조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쟁세대와 다른 것은 국가라는 큰 틀이 형성되었고 산업화로 인한 일자리가 팽창해가던 시기였으므로 개인은 최소한 어떤 직업이든 선택을 하면 생계가 가능했으나 역시 사회 안전망 대신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살아가야 했던 세대였다. 국가는 저급한 수준이나마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으나 개인은 국가라는 계급에 눌려 항상 집단(국가, 가족, 이데올로기 등)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영화 국제시장에서처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던 격변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교육을 받은(물론 국가가 제대로 된 교육을 했다기보다는 선진 민주국가들의 경험과 민주주의 개념을 찾아서 개인들이 스스로 학습해가는 과정이었음) 그들은 그러한 교육의 힘을 토대로 그들의 이상을 실현해가는 과정 속에 있었으므로 그 이상(민주주의 등)을 함께 지탱하고 지속해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우정이나 동지라는 끈끈한 매개체가 작동하기도 했다. 그들이 부모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측은함, 부양해야 하는 대상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자식을 교육시켜야 하는 양쪽 어깨가 무거운 가장과 같은 세대이기도 했다.

 

반면 오늘날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세대는 어느 정도 안착된 교육시스템 안에서 성장하긴 했으나 친구조차 경쟁자가 되어 버리는 무한 경쟁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그래도 가장 안정된 근대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논리적으로 발언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갖추었으나 또 다른 억압(극도의 경쟁체제) 속에 매몰되면서 개인의 입지나 생존이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된 채 본연의 능력은 채 피우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이 항상 만들어진 집단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집단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세대였다면 오늘의 젊은 세대는 SNS 등을 통해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기도 하고 필요하면 집단적 힘을 형성해가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사회적 이슈에서 논리 정연한 자기 발언을 할 줄 아는 당돌함도 가졌고 기성세대들에 대한 질타를 하는가 하면, 선거 등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이 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분위기를 이끌어가기도 한다.

 

이처럼 그 시대의 독특한 환경(제도, 규제, 시스템 등)은 그 시대 젊은이들만이 가지는 독특한 감성을 만들어 왔다. 급속도로 진행된 핵가족화 이후 최근에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오늘의 현실을 극복하면서 모여 살기도 한다.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예측한 대로 가족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공동체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새로운 감성이 만들어지는 환경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확실히 가족 간 유대관계가 이전보다 많이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 원인은 우리 사회에서 국가라는 개념과 기능의 발전과정과 함께 개인의 삶의 방식이 달라져 왔듯이 갈수록 복잡하게 뻗어가는 사회 시스템의 기능이 가족의 기능을 대체했기 때문일 것이다. 점점 사회에 의존하게 되는 범위와 기능이 많아지면서 과거의 가족 시스템이 기능을 잃게 되고 인간 스스로 그 사회의 기능에 의지하게 되는 현상이랄까.

 

 

03 물리적, 인식적 범위 확대에 따른 감성의 변화

 

가족주의-국가주의-세계화로의 변화 과정과 함께 삶의 범위를 끝없이 확장해가는 인간의 속성을 보면서 과연 이처럼 확대되는 것만이 능사일까 싶을 만큼 개인에게 복잡하게 다가오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물론 인간이 가진 호기심은 항상 경험하지 못한 그곳으로 향해 확대되어 왔고(사고의 영역에서든 물질적 영역에서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확대되고 복잡해지는 만큼 이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는 점점 모호해지고 막연히 대세의 흐름을 따라가게 되면서 대중 속 하나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되는 개인은 정체성에서 많은 혼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복잡함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작용에 대한 자각에서 최근에는 Local food, Slow city 등 Local의 중요함이 다시 부각되기도 한다. 이는 지역에서 충분히 소화하고 순환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멀리 나아가는 것을 경계하자는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판을 크게 짜야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이유를 따라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로 인해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과거 인간은 오늘날의 핵가족 단위처럼 작은 범위가 아닌 마을 단위(씨족, 부족 등)로 공동체를 운영해 왔다. 젊은 세대들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육아까지도. 그런 측면에서 새로이 도래하는 공동체의 여러 움직임은 그간 극도로 진행해온 핵가족화의 자연스러운 해체와 함께 대안으로서의 사회로 진화해가고 있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기를 기대해 본다.

 

핵가족화라는 것은 편리함과 개인주의, 사생활 보호라는 여러 가면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최근 다시 공유경제가 부각되는 것도 극도의 개인주의로 쓸데없는 부분까지 모두 개개인이 소유하고 있는데 대한 비효율성에 대한 자각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가면서 모든 것을 분리해내다보니 공유하면서 따라오는 안정감까지 버리게 되었고 개인은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 외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그 시대 환경의 변화과정 속에서 동시대 젊은이들이 공유하는 독특한 감성이 형성되기도 하고 개인의 감성이 변화되기도 한다.

 

 

04 직면한 시대상황은 인간 감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일까

 

최근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 이세돌은 8번의 대국에서 모두 우승을 하면서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바둑을 깊이 알지 못하지만 이세돌은 여러 면에서 대국 실력이 하향길에 접어든 상태였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파고와 대국 이후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대국을 통해 대국 실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세돌 외에 많은 프로기사들(이세돌과 최근 겨룬 기사들까지)은 물론 바둑 애호가들까지 알파고와의 대국 과정을 한 수 한 수 지켜보면서 함께 호흡했었다. 그런데 왜 알파고와의 경험이 이세돌에게만 달리 작용한 것일까.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알파고와 1:1로 직접 대면하여 그 절박했던 상황을 경험해낸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뜻 보기에 모든 정보와 상황이 공개되었고 이세돌과 그를 바라보던 비슷한 수준의 프로기사들 모두 동일한 상황 하에 동일한 영향을 받은 것 처럼 보이지만, 대국에서 직접 당사자였는지 아니면 객관적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한 차이는 실로 많은 다른 결과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판세를 분석하던 많은 프로 기사들에게 알파고의 한 수 한 수는 이세돌과의 관계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의 객관적 분석 대상이었지만, 이세돌에게 알파고의 한 수 한 수는 이세돌 본인이 겪어내야 할 치열한 전투였고 상대방 전략을 읽어내면서 살아남기 위한 긴박하고도 절박한 순간이었다고 할까.

 

그러니 똑같은 정보, 똑같은 상황이 노출되었어도 대국을 대하는 감수성으로부터의 결과는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실제 당사자가 되어 공격을 받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정보들과 실제 상황을 수용하는 객관적 위치의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감수성, 이를테면 ‘알파고와 나’라는 상황에 모든 전략을 ‘All-in' 해야 하는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의 가장 최근의 역사적 상황을 대입해 보자. ‘혹독했던 6.25 전쟁’, ‘독재정권’ 하에서 느꼈던 ‘공포감’ 등에 대한 정보와 영상물 등은 홍수를 이룰 정도로 많다. 6.25 전쟁의 경우는 전쟁의 아픔에 대해 학교 교육이나 역사적 사료 등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간접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직접 경험 세대와 역사사료를 통한 간접 경험 세대들에게 다가오는 감성의 차이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우리 부모세대(6.25를 겪은 세대)들이 전후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교육시켜온 과정을 자식으로서 직접 보고 자랐으며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그들의 젊은 시절을 한 걸음 더 다가가 경험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살아간다는 의미 속의 가장 기본적 개념인 생존이라는 것은 수입/지출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것인데, 우리 부모 세대를 보면 생활을 이끌어 갈만한 돈(수입)이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삶을 꾸려왔고 지금 우리가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다. 지금 내게 그러한 전후 상황이 주어진다면 나도 그렇게 삶을 이끌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 세대는 살아온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살아낸’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나야 했기 때문에 삶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그들에게 전후 상황은 ‘6.25 전쟁에서의 삶의 현장과 비교하면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었다. 그러한 거칠고 힘든 삶의 방식이 오늘날 거칠고 ‘무대뽀적인’ 이라는 표현의 '아줌마'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05 여유로움이 발현되는 감성을 꿈꾸다

 

감성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되었다. 아마 세상이 넓어지고 복잡해지다 보니 개인들도 깊이 있는 사고, 이성적, 논리적 표현보다는 직관적으로 집약되어 나타나는 감성으로 표출되는 경향이 강해졌고 이를 읽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감성표현과 표현된 감성을 읽는 행위 모두 순간적, 직관적 느낌으로 집약되는 것이므로.

 

70, 80년대 젊은이들(전후 세대)의 감성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는 당연히 ‘낭만’이라는 단어였으리라. 물론 당시는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대로서 인간성이 한없이 말살될 수도 있던 시기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풍요롭지도 않았고, 자유롭지도 않았던 그 시기에 당시 젊은 세대는 ‘낭만’이라는 여유로운 감성의 꽃을 피웠던 것 같다. 그 세대들이 요즘 다시 70, 80 팝을 찾고 향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백이 있던 시대의 감성은 여유가 느껴진다. 서슬 퍼런 군부 독재시대였고 잘 먹지 못하고 자란 세대지만 당시 젊은 세대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이상이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품을 수 있는 것 아닐까)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낭만이라는 감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부족한 것 많은 시기였고 불안정한 시대를 짊어지고 가는 젊음이었지만 우리 사회를 향한 고뇌는 그대로 하나의 의미가 되었고 그 의미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성도 회상 속의 과거로 지나가고 말았다. 요즘의 젊은 세대는 풍요의 사회에 살고는 있지만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정신적으로는 단절되면서 더욱 각박해져가고 있어 낭만이라는 감정이 드러나기조차 어려운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이처럼 세기의 큰 변혁기라 할 일제강점기 이후의 각 세대들은 혹독한 사회 현실 앞에서 인간적인 삶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새로운 억압 시스템의 출현 앞에서 또다시 자신을 낮추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나의 젊은 시절 우리의 문학세계를 보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정신질환으로 나타나거나 이념갈등에 대한 번민을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이 많았던 것 같다. 그중에서 문득 대학시절 읽었던 작가 최인훈의 ‘광장’이 떠오른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이라는 혼란의 시기 삶의 의미에 대한 한 지식인의 인간적 고뇌가 무거울 만큼 묻어나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갈등이 극에 달했던 당시 어느 한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념갈등 속에서 남과 북 어디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생각에 제 3국을 택하게 되지만 제 3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결국 이념 대립의 폭력성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게 된다. 이후로도 오래도록 나는 그 작품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역사적 변혁기를 인내해 냈지만 어느 세대도 안정된 시간을 경험하지 못한 채 현재는 흘러가고 있다. 서구 사회가 일찍이 민주주의에 눈을 뜬 후 적어도 수십 년간이라도 휴머니즘이니 낭만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인간에 대한 가치와 사고를 구가했던 것과 달리 우리는 전쟁-독재-경제파탄으로 이어지면서 무던히도 노력하며 살았지만 그 어느 세대도 행복한 시간, 안정된 사회를 맛보지 못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과연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잠시나마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낭만’, ‘우정’과 같은 여백의 감정을 찾아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한갓 욕심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 이 글은 제 브런치계정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편집: 이미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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