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50년만에 다시 찾은 월남 땅

50년만에 다시 찾은 월남 땅

2016년 7월 18일 11시 20분, 베트남 여객기에 청룡의 전적지 탐방단이 탑승했다.

아오자이를 입은 스튜어디스가 우리 파월전우들의 전적지여행을 환영한다는 진심어린 인사를 받으면서 월남의 중부인 '다낭'을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월남과 월맹의 중앙 17도선 다낭지역 지도

13명의 전우와 가족 그리고 미망인들은 '국방전우신문' 석정원 회장과 '글로벌사회복지평화연구소' 김만조 소장(예비역 대령, 육사27기)의 배웅을 받았다.

김승곤 사장의 안내로 50 여년 전의 월남의 청룡의 참전 전적지를 향한 공항을 출발하는 것이다.

4시간 20분 후 비행을 마친 우리는 드디어 다낭 비행장에 도착했다.

▲ 다낭 항에 착륙직전에 창밖을 내다봤다. 다낭의 해변가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있다

 

 월남의 국토는 장대의 양쪽에 물체를 달아 맨 모양으로 길이는 장장 1742km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월남 참전으로 벌어드린 외화로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국가기간시설을 건설해 현재 세계 경제 10위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승곤(67, 맹호 수색중대) 사장은 "이문의 상술(商術)이 아니라 전우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원가의 상도(商道)로 그들이 전투를 했던 전적지를 안내하는 심부름꾼이 되겠습니다. 밤이면 울리는 포성과 함께 남십자성을 보면서 고국을 그리던 월남, 이제는 어려웠던 보릿고개도 지났고 우리경제도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청춘을 담보하고 지켜주던 월남은 사회주의로 통일됐지만 정말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봅시다."며 "백문이불여일견이라 했습니다. 이제 고령이 되어 언제 저승에서 부를지 모릅니다. 다리에 힘이 있을 때 가서 먼저 가 피워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젊은 영웅, 이 우리 전우들이 더 이상 구천에서 헤매이지 않게 술 한잔에 향도 피워놓고 큰 절 하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고 기내인사를 건냈다.

▲ 김승곤 사장이 직접 공항에서 전우들의 안내를 설명하고 있다(중앙의 모자를 쓴 사람이 김사장)

이어 "현재까지 월남에 한국의 3,100여개의 중소기업체가 투자했으나 유독 병원은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며 "2013년부터 베트남 요지에는 벌써 많이 외국 기업들이 들어서고 있다. 도미노이정책에 의해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 되었다"고 김사장은 설명했다.

 월남은 1859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사이공(지금의 호치민) 정부 '티우' 대통령의 군대는 미국, 한국, 호주, 뉴질랜드, 타이, 필리핀의 자유연합군을 포함해 130만 명이나 되었지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월남 인구 15명당 1명에 해당하는 군사력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미국의 베트남전쟁의 시작은 '통킹만 사건'이다. 이는 훗날 '미국의 자작극' 임이 들어났다.

1966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베트남 작전은 3단꼐로 짜여졌다.

1단계는 진압단계로 각 마을에 교사, 의료인으로 구성된 친 정부성향의 마을을 지원하고 2단계는 헬기를 동원해 주민들을 베트콩과 분리시키는 분리 단계를 거쳐 마지막 3단계에 베트콩이 있는 곳을 찾아 무차별 포격지대를 설정한 뒤 네이펌, 포, 탱크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월남전쟁’이라고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미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대상으로 싸운 '베트콩'을 이들은 ‘남베트남해방전선’, ‘월남패망’을 ‘베트남해방’이라 말한다.

당시 '티우'가 이끄는 17도선 아래의 미군이 장악한 지역은 어떠했는가?

1/3은 정부 지배하에 있었지만 2/3는 베트콩들이 장악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작전을 나가 주민들과의 대담을 통해 어느 쪽이 좋으냐고 물으면 반은 정부군에 다른 반은 베트공에 자식들이 가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티우'도 '호치민'도 좋다며 자식이 다치지 않도록 '이대로의 현실이 좋다'고 했었다.

송산송(맹호부대 1년대 재구대대 근무) 전우는 과거 전지에서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 운수업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45년 만에 현지를 찾아가는 설레임으로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그는 고엽제로 인한 참전의 후유증으로 아들의 간의 반을 이식수술로 성공을 하고 이번의 전적지 기행에 참여했다.

박만기 전우(백마 병참부대 근무)는 여객기의 베트남 스튜어디스에게 한국군의 참전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스튜어디스의 대답은 “그것은 다 과거일입니다. 각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당시의 정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왔을 뿐입니다. 그 당시의 정부가 하는 일에 여러분들은 묵묵히 그저 아무 저항하지 못하고 참전했을 뿐입니다.”면서 “지금 우리는 한국보다 물질적으로는 못살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합니다.”고 덧붙여 말을 했다.

베트남 전쟁에 우니라나는 호치민의 월맹군으로부터 자유와 평화의 티우가 이끄는 월남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아래 32만명이 참전해 약 5천여명이 전사했으며 1만1천 여명이 지금도 고엽제로 고생을 하고 있다.

김홍태, 박만기, 류연복, 송산송, 진광흔 그리고 고순계는 "이유야 어쨋던지간에 전쟁과 비극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하미학살 마을 현장을 갑니다. 한국에서 세운 '위령비'와 베트남 주민들이 세운 '증오비'를 둘 다 확인하고자 합니다. 애꾸눈이 아닌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합니다. 가슴이 저며 들어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월남 17도선에서 38선을 보고자 합니다."며 며칠 전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토로했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쟁 중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약 4만 1천명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참고 위키백과). 또한 미국은 한국군에게 2억 3천 6백만 달러를 지불하였고, 대한민국은 파병의 댓가로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한국의 GNP는 파병을 전후로 약 5배 가량 성장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베트남에 도착해 우리가 머문 숙소는 다낭에서 제법 큰 호텔 ‘MUONG THANH DA NANG HOTEL’이었다. 17층에서 바라보는 창밖으로는 서울의 '한강'의 이름을 가진 한강위에 ‘용다리Dragon Bridge’가 자리잡고 있는데 양끝으로 청룡(靑龍)이 아닌 웅장한 황용(黃龍)이 창공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그 다낭의 시민들에게 패기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듯하다.

 

▲ 한강위의 '용다리'

 

월남은 호치민과 하노이 그리고 다낭의 3개 항공노선이 있지만 최근에는 백마지역이 있는 나트랑(나짱)까지 4개의 비행장을 갖추고 있다. 다낭은 베트남 중부의 중앙 직할시이며, 베트남의 주요한 항만도시로, 행정적으로는 7개의 구로 나뉘어 진다.

1965년 3월 베트남 전쟁때에는 미국 해병대가 상륙해서 대규모 미군기재를 건설하면서 청룡부대가 진주하게 된다.

2011년에 다낭 국제공항 신터미날이 완성되면서 다낭은 관광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인기 있는 ‘다낭 비치리조트’는 공항에서 거리가 3km로 접근성이 매우 좋아 해수욕 관광객이 많다.

월남 여성이 지난 해 한국 남성과 결혼한 숫자는 7636명에 달한다.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베트남 신부의 한국행은 최근 그 수가 급격하게 즐어 올해까지 베트남 여성 4만 7천여명이 한국에서 가정을 꾸렸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결혼 이주 여성 19만 7000여명의 약 24%가 베트남 여성이다. 특히 지난해엔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 수가 처음으로 중국 여성(7549명)을 앞질렀다.

도착과 동시에 제일먼저 월남의 TV는 어떠 내용들을 방영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남지나해 군도의 문제를 갖고 토론하는 시사방담으로부터 월남 특유의 음악, 우리의 판소리같은 노래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우리의 연속극을 계속해서 방영하는 것이었다. 한류가 이곳 베트남에도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 월남에서 방영되고 있는 한국 드라마

필자 고순계

서울시립대학교 ROTC 5기 포병장교로 임관해 1969년도에 육군중위로서 파월하여 기갑연대 61포병 전포대장을 역임했다.

대위가 되어 맹호사단 사령부 군수처로 자리를 옮겨 월남 철수를 위한 기획관. 귀국 후에는 고려대학교 ROTC 군사학 교수를 거쳐 국방대학교에서 육-해-공군 정훈장교와 지휘관 과정의 리더십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2년 정년퇴직했다.

교수학술논문에 고려대학교 최장집 교수의 청와대 퇴출을 지켜보면서 '마녀사냥 치유' 논문을 그리고 군최초로 '단전호흡을 통한 군정신전력 강화방안'을 교수학술논문에 발표했다.

동학-천도교 교령 보좌역을 하면서 ‘인내천통일중앙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1촌1사 '평화통일신문'을 발행하면서 국방전우신문의 논설위원으로서 금번 청룡의 전적지 탐방 기자로서 참여했다.

"파월장병 한국군 증오비를 찾아"의 첫회로 '1) 50년만에 다시 찾은 월남땅' 다음회는 '2) 한국군 증오비' 그리고 3회로 '17도선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로 연재할 계획이다.

 

편집  : 최홍욱 편집위원

고순계 주주통신원  sangdo1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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