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풀린 규제와 자본

     
 
 

‘돈이 경쟁력이지’, ‘무한경쟁으로 삶이 점점 팍팍해지고 있어’,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몇 년째 제자리야’, ‘왜 이렇게 양극화가 심해질까’, ‘일자리가 없어 어떻게 살아가지’, ‘상위 1%가 하위 99%를 지배하는 경제구조’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던지는 질문들이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일정하다.

         “자본주의 사회잖아. 자본주의 속성인걸? 어쩔 수 없지.”

 

과연 자본주의란 이처럼 인간을 무한경쟁과 긴장감으로 몰아가는, 인간을 도외시하는 괴물스런 경제체제일까?

 

01 자본주의는 과연 규제가 필요 없는 무한경쟁 체제일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열정과 행위가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런 방향을 이끄는 것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흔히 경제학에서는 일정한 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케인즈(Keynes) 이론과 대비되는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개념으로 인용되곤 한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자본주의는 그 무엇도 규제되지 않은 채 완전한 경쟁체제하에서 그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럽게 결정되고 있는 것쯤으로 우리는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이 자본이든 권력이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최대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자본주의 속성이고 그러한 능력이 이 체제의 정당한 능력인양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부가 개입하여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하면 자원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하게 된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이윤이 높은 일을 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투자하고 기술 혁신을 할 동기를 잃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장하준 교수는「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쓰고 있다.

한편 『자유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가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에 깔려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도 없다. (중략)~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라며 ‘그들이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의 자본주의란 완전한 자유경쟁체제가 아니며 경쟁 만능인 듯이 치닫고 있지만 자본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규제 하에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02 그렇다면 규제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그 규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규제’란 인간(기업, 행정을 포함)의 행동을 제한하는 제반 규정, 규칙을 말한다(엄격하게는 우리의 행동양식을 제한하는 역할). 이러한 규제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그 사회의 속성을 읽기도 한다.

그렇다. 인류사회는 규제의 사회였다. 비단 자본주의 체제에서만이 아니라 인류가 서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은 규제(또는 규정)였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는 이기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공선(公共善)을 위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러한 규제가 필요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이를 일반의지에 의한 사회계약(법)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일종의 규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물론 루소의 사회계약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규제는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절대강자 독식을 막는 역할을 한다. 즉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적인 흐름을 제어하는데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규제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작동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어쨌든 공존공영(共存共榮)이라는 대 전제가 따른다.

규제의 모습은 도덕, 관습, 규정, 법 등 다양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규제는 ‘일정한 한도를 정한 규칙이나 규정’을 통해 이를 위반 시 일정한 벌칙 또는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법’에 대해서이다.

요즘 한국사회는 규제완화라는 말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최근의 화두는 느슨한 규제이고 이러한 규제완화는 국제 간 무역,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강력한 동력인양 외치고 있다. 정부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가 있다면 과감히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고 각종 규제를 풀어대고 있다. 그러나 과연 맞는 말일까?

 

우리가 경제모델로서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경제가 형식적 관료주의 제거라는 이름하에 실시한 산업 전반의 규제완화로 어떻게 망가져 갔는지, 그로 인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중산층 붕괴, 실업, 부의 양극화, 사회 안전망 파괴 등 문제들을 짚어보면 경제활동에서 규제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진다.

세계를 지배했던 미국 제조업의 종말은 흔히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경제를 따라잡으면서 일어난 피할 수 없는 결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제조업 일자리의 운명을 결정지은 주된 원인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저버린 워싱턴 정계와 월스트리트가 만들어낸 경제정책 때문이었다. 이들은 다수의 희생으로 소수가 부자가 되는 정책을 채택하고는 이를 ‘자유무역’이라고 불렀다.(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도널드 발렛·제임스 스틸 공저 /2장 자유무역의 대가)

한 예로 미국에서 규제완화와 함께 시작된 아웃소싱(하청, 용역 등)은 마치 효율적 경영의 필수 기법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우리나라 기업들도 2000년을 전후해 광범위하게 도입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미국에서 이미 수많은 일자리를 잃게 했고 제조업 붕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를 불러오기도 한 요인이었는데도 말이다.

미국 기업들의 북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멕시코 등으로의 아웃소싱을 비롯해 중국, 인도 등을 향한 아웃소싱은 결국 미국 내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축소시키면서 역으로 아웃소싱을 준 나라들인 멕시코, 중국 등 상품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했다. 이처럼 기업들은 국적을 넘나들며 비용절감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국내에서는 무수한 실업자를 양산해내면서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미국은 1985년 수입으로 수천 개 섬유산업 일자리가 사라져 갔는가 하면, 유명한 생활용품 제조회사인 러버메이드, 애플, 제너럴모터스, 보잉 등 많은 기업들이 중국으로 공장을 옮겼거나 옮기고 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빨라져 갔다.(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2장 자유무역의 대가)

그렇다면 그들이 생산시설을 옮겨간, 임금이 싼 나라들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일자리에 행복해하고 있을까? 다국적 기업들은 상대적 저임금에서 취득하게 된 이익에 만족하지 않았고,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현지 노동자들에 대한 비윤리적 행위도 서슴지 않고 있다는(노동생산성이라는 이름의 노동 착취) 사실은 심심치 않게 폭로되어 온 지 오래다.

인간 사회에서 규제가 미치는 영역은 다양하지만 최근 규제 완화의 주요 이슈는 대체로 경제주체들에 대한(특히 자본가, 기업가들) 문제로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 이 사회를 움직이는 자본 주체들에 대한 편중현상을 심화시키고 있음과 동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자본 주체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인간 개인을 향한 사회적 규제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회적 질서유지를 위한 각종 법률 및 행정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공공선을 지키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경제주체들(기업, 자본), 경제활동에서만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러한 공공선이 무너질 정도의 규제완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경제활동에서는 이러한 공공선이 너무도 잘 지켜지고 있어 규제가 필요 없어진 것일까. 이유는 다름 아닌 규제를 강화하거나 완화하는 그 기준이 공공선이 아닌 권력과 부를 가진 그룹의 이익 극대화에 있으며 이러한 선택이 힘의 논리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지금의 경제가 극도로 왜곡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 자체의 속성 때문인 것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인 ‘규제’의 운영상 문제인 것이고, 그 규제의 운영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03 규제 완화라는 이름의 규제 무력화

 

최근 정부는 각종 규제를 악폐, 암 덩어리라고 주장하면서 규제완화를 통해 경제 활성화를 추진해나가겠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러면서 재벌 대기업들을 향한 제반 규제를 아낌없이 풀어주었고 심지어 중소기업과의 자유경쟁까지 허용하면서 영세기업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잠식하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규제완화는 규제완화를 넘어 무력화 수준에 이르는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일정한 규제는 이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며 인류사회에서 어떠한 제도하에서건(자본주의 체제 역시) 규제는 항상 존재했다. 경제적 규제완화로 인한 적폐를 경험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을 보면 우리가 규제완화에 대해 얼마나 신중할 필요가 있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미국의 예에서 이러한 교훈은커녕 오히려 현재 미국을 병들게 한 원인인 그들의 규제완화 정책을 적극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은 1970년대 이래로 중산층에 대한 급여와 복지 등 여러 가지 경제적 혜택이 처음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개입 반대’ 주장이 점점 추진력을 얻어가면서 항공이나 트럭 운수 같은 기초적인 산업에 대한 규제까지 완화하기에 이르면서 이 산업의 불안정성은 그대로 수많은 산업 종사자들 가정의 재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규제 반대론자들은 계속 밀어붙였고 그로 인해 주택과 담보대출 산업에 대재앙을 가져왔지만 그들은 해외로 일자리를 내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규제를 없애버리기 위한 로비를 계속해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최근 공공부문(전기, 수도, 철도 등)에 대해 민영화 추진의지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현실, 그리고 가계부채의 위험성에도 주택담보대출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모습과 어쩌면 그리도 닮아있는지 섬찟하다. 철도 민영화에 이어 에너지·물·의료 등 국민의 기본적 삶과 직결된 공공서비스 영역에 이르기까지 현 정부는 아무런 대책 없이 일방적으로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 예로 미국은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한다는 명목으로 트럭운수 규제 완화 조치를 단행했는데 이후 해당 산업에 전례 없는 불안정을 야기하면서 1990년 이래 업체 43,863곳이 폐업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1978년 항공 산업 규제완화 법안, 금융규제 완화(2007 금융위기 원인) 등 원칙 없는 규제완화로 무너져간 기업들은 그대로 일자리 붕괴로 이어지면서 중산층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7장 규제완화의 서막)

그들은 민영화, 규제완화 등이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게 되고 가격은 내려가게 되면서 소비자에 값싼 상품을 제공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규제완화는 곧 ‘정글’을 의미하고 정글에서는 중소기업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반면, 대기업은 경쟁우위에서 살아남아 가격 독점이 가능해지면서 오히려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중소기업을 집어삼킨 식욕으로 다시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다. 물론, 노동력 역시 정글 속에서 경쟁력이라는 이름하에 그 가치는 바닥을 치게 되고 결국 실업으로 이어지는 수순을 밟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각종 경제규제 완화를 앞 다투어 모방하면서 기업들은 동남아시아 저임금 시장으로 생산시설을 옮기는가 하면, 비용절감이라는 이름하에 콜센터, A/S센터 등은 물론 작업라인의 일부까지도 소사장제라는 이름으로 국내 열악한 하청업체(하청, 용역 등)로 이전하고 있다. 당연히 일자리 상당 부분을 불안정한 상태로 잘라버리면서 일자리 축소는 물론 비정규직이 대대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물론 이처럼 사회안전망이 심각하게 붕괴되어가는 이유가 무분별하게 추진해온 경제적 규제 완화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들은 세금제도(법인세, 상속세 등)의 규제완화를 통해서도 왜곡된 부의 집중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1955년에 가구 소득 기준 최상위 부유층 400명이 수입의 51.2%를 연방세로 냈는데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직전 최상위 부유층 400명은 수입의 16.6%만을 연방세로 납부했다고 한다. 또한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이 취임할 당시 근로소득에 대한 최소 세율은 50%였는데 현재는 35%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배당금과 이자 등 불로소득에 대한 세금은 70%였던 것이, 2012년에는 15%로 약 1/5 수준까지 떨어져 버렸다.(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5장 세금을 훔치는 사람들) 부의 재분배 역할을 하는 세율의 폭락 수준이 이 정도인데 국민복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구조이다.

우리나라 역시 2015년 연간 전체 상속재산이 13조로 전년보다 21.7% 증가했으며 2012년~2014년 각 10조 원대 수준으로 파악되며, 피상속인 수는 13.7% 늘어난 5천452명이었고 같은 기간 100억 초과 상속은 39.2% 늘었고(167건) 500억 초과 상속은 무려 80%나 급증했다고 한다.(2016 국세청 국세통계) 통계자료가 보여주듯이 부의 집중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런 집중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희생하는 대가로 이루어진다.

 

04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같이 노동 역시 자유로운 이동이 허용된다면?

 

한 국가의 단위가 제대로 유지되려면 기본적으로는 개인이든 국가든 수입/지출이라는 기본구조의 균형이 가능해야 한다. 이러한 지역적 균형을 무시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생산원가가 싸다는 이유로 생산시설을 타국으로 이동시키는 등 자본가 이익을 위해서만 자본이 이동한다면 지역사회는 무책임한 환경에 내동댕이쳐지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허용되는 것처럼 국가라는 단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노동력)을 비롯해서 사회 시스템 속의 모든 구성단위들도 국경을 초월해서 이동할 수 있다면 어떠할까? 그야말로 이러한 초국가 사회는 언젠가 도래할 수 있는 시스템일 것이니 말이다.

자본의 생산 우위 개념처럼 국가의 틀을 유지시켜온 사회안전망조차도 비교우위 개념으로 확대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즉, 모든 부문에서 동일하게 규제완화를 하게 된다면 말이다. 현재의 고용구조, 실업 등 경제 파탄 현상은 자본과 무역만(즉, 생산시설과 소비재만) 국경을 넘도록 허용하는 자본논리에만 충실했고 나머지 구성단위들은 묶어 놓은 데서 발생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런 구조가 현실적으로 가능해진다면 국민들도 자기가 살고 싶은 안전망으로 또는 국가로 자유로이 이동하게 될 것이다. 즉 자본만이 아니라 삶의 터전 역시 국경을 넘을 자기결정권을 갖게 된다면 우린 살기 좋은 나라로 이동하게 될 것이고 지역 간 새로운 균형이 이루어질 것이다. 자본은 그간의 독점적 위치에서 이러한 변수들에 새로이 적응해가야 하지 않을까.

 

05 지금의 사회는 공존공영이 아닌 일부만의 번영을 향하고 있다.

 

  대한민국 0.1%의 민낯-영화보다 더한 특권층 행태 ‘충격’(2016.7.23 한겨레)

  상위 10% 노동자··일그러진 총파업(2016.7.20 헤럴드경제)

 

앞서 공공선을 위한 제반 규제는 공존공영을 대전제로 한다고 말했으나 우리의 규제완화는 일부만의 번영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소수의 권력자들에 부의 집중이 심화되는 동안 중산층, 서민은 점차 생존기반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0.1%의 그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화살과 시선마저도 일부 노동자를 향하도록(노동자들 간 편 가르기를 통해) 신문 등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지저분한 책임전가를 하고 있다.

그리고는 여전히 부를 소유한 자들만이 그 부의 확대가 더욱 용이하도록 규제 완화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노동 정책을 보아도 우리나라는 갈수록 경제적 규제완화와 함께 박자를 맞추고 있으며, 반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강화되어야 할 각종 규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심지어 있는 규제마저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도 미국 사회는 소수의 부자들이 실로 막대한 자금을 정치 기부금과 로비에 쏟아붓고 있으며 정치가 이런 막대한 정치자금에 예속된 채 나라의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단인 선거 또한 이미 그러한 돈의 위세에 짓눌려버렸다고 말한다.

미국은 헬스케어 시스템의 민영화는 물론, 보통사람들의 퇴직 이후의 삶을 보장하던 연금제도에 대해서도 1985년 이래 84,350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기업들은 이 퇴직연금 적립을 그만두면서 절약된 돈을 중역들 급여나 배당금, CEO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업에 사용되고 있다. 의회는 이에 동조하는데 그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변화가 직원들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가장하여 유권자들을 배신해 왔다.(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6장 은퇴의 끝:사라진 연금)

지배층은 정부 예산과 정책에 ‘내핍’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위한 사회보장 연금이나 의료보험과 같은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있다. 미국 중산층을 해체하고 있는 힘은 그야말로 무자비했다.(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서문)  미국은 더 이상 과거의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 공공연해졌다. 이처럼 실패한 정책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선진 정책들인양 그대로 모방되고 있는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06 자본주의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독식 제어를 위한 규제가 필요한 제도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름하에 행해지고 있는 각종 경제 활동의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규칙을 정해 놓고 ‘자본주의란 이런 것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직면한 모든 문제(헬조선이라 부르는 심각한 사회)들을 해결하려는 의지 대신 그들이 상정해 놓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향해 문제의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는 신이 내린 절대적 원칙을 지키는 그런 시스템이 아닌데 말이다. 그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니던가.

자본주의란 말에 명확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윤 획득을 위한 상품 생산이라는 의미가 있을 뿐 오늘날 그 이상의 모든 운영 형태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흔히 자유경쟁체제라고 하지만 경제활동에서 각종 규제 없는 자유경쟁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이처럼 이 사회를 피폐하게 하고 있다면 이는 그 운영의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란 얘기다. 즉, 일정한 목적을 위해 시장이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제도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일부가 아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세습 자본주의는 21세기 이미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고 민주주의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민주주의가 현 세기의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를 다시 통제하려면,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개발해야만 하는데, 이상적인 수단은 매우 높은 수준의 국제적 금융 투명성과 결부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가 될 것이며, 이와 같은 세금은 끝없는 불평등의 악순환을 피하고 세계적인 자본 집중의 우려스러운 동학을 통제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 21세기 자본」에서 말하고 있다. "물론 글로벌 자본세는 유토피아적인 이상일 수 있으나, 개인의 부에 누진적 세금을 물리는 것은 사유재산과 경쟁의 힘에 의지하면서도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를 재천명하는 것이며, 필요하다면 거액의 재산에 대한 누진세가 꽤 가파르게 증가하도록 할 수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풀어야 할 숙제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 1789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호, 단서” 이는 토마 피케티가 「 21세기 자본」의 서문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우리도 모르게 이런 무한경쟁(무한경쟁은 항상 규제완화를 기본으로 함) 속에서 지독한 양극화와 함께 신분사회를 방불케 하는 혹독한 차별 사회를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틀 속에서 사람들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기본적 생계의 문제 앞에서 모든 가치, 도덕, 기타 삶의 방향들까지 모두 바뀌고 있다.

이렇듯 시장이란 상품이나 서비스가 유통하는 단순한 경제기구로서 처리해 버릴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을 조직함과 동시에 그 사회의 사회관과 정신적 풍토를 반영한다. 즉, 시장은 경제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심리를 규정하듯 그 영향력은 경제 분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제3의 물결, A. 토플러, 생산=소비자의 출현) 때문이다.

워싱턴 정계와 월스트리트가 만들어낸 경제정책은 다수의 희생으로 소수가 부자가 되는 정책이며 이러한 정책들은 점차 그들의 이익과 맞물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3세계로 전파되고 있다. 제3세계의 일자리가 일시적으로 늘어나는 듯하지만 또다시 그들은 노동자를 쥐어짜는 방식(이른바 생산성 명목)으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런 비정상적인 경제상황을 개선하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비정상적 경제상황을 개선하려 한다면 과연 그 방법은 무엇일까. 이미 세계경제가 하나가 되었고 신자유주의는 가격경쟁력이라는 골치 아픈 상황을 일반화해 버렸다. ① 싼 제품에 대한 요구로 인한 소득감소라는 악순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② 제품 경쟁이 이미 국내가 아닌 국제무대로 바뀌었는데 우리 경제만 바꾼다고 될 것인가. 라는 풀기 어려운 숙제와 함께 우린 지금 주요 이슈들과 마주하고 있고 이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11 경제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페이퍼컴퍼니, 조세회피처, 세금정책, 자유무역 등 원인은 다양한 곳에 있다.)

12 우리 경제의 고질적 문제가 세계경제와 맞물려 있는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전 지구적 문제,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13 이미 경제를 이끌고 있는 자들은 국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과연 거대한 틀에서 왜곡된 이 시스템을 정상화할 수 있을까. (구조화된 소수의 권력과 지배, 어떻게 일반에게 돌려놓을 수 있을까.)

 

1리터의 물에 1g의 독극물을 녹인 용액이 있다. 그대로 마시면 당장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어 여기에 물 1리터를 추가했다. 당장은 희석되어 독한 물질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되지만 결국 1g의 독성물질을 다 마셔야 한다면 결과는 같지 않을까?

왜곡된 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대부분 나라들이 경제활성화 정책으로 활용하고 있는 『양적 완화』, 나는 그 양적 완화 정책이 대단한 정책인양 광범위하게 실현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과연 근본적인 의미가 있는 정책일까 의심이 들곤 한다. 그들의 조삼모사식 속임수 정책에 우린 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사회 주요 이슈를 정확히 진단해보려는 우리의 노력을 무력화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달러는 현찰이든 신용이든 사람들이 대출을 해야만 비로소 발생한다. 상업은행이 신용대출을 통해 충분한 화폐를 발행하면 우리의 경제는 번영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영구적인 화폐제도를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이 모든 문제의 핵심을 알아차린 순간, 우리의 황당한 화폐제도와 연방준비은행의 믿기 힘들 정도의 무력함을 눈치챈 순간 태도가 돌변할 것은 명백하다. 화폐제도를 폭넓게 이해하고 신속히 수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현대 문명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로버트 햄필, 애틀란타 연방준비은행 (화폐전쟁, 쑹훙빙, 차혜정 옮김)

달러는 채무가 발생함과 동시에 발행되고 채무상환과 동시 폐기된다.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달러는 일종의 차용증서이며 모든 차용증은 날마다 이자가 붙는다. 게다가 그 이자는 복리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 천문학적 이자 수입은 과연 누구에게로 돌아갈까? ~~ 이같은 악순환은 무거운 이자부담으로 말미암아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결국 모든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계속된다. '인시(寅時)에 묘시(卯時)의 식량을 먹는다.'라는 속담처럼 사람들은 미래의 돈을 빌려 현재의 수요를 충족한다. (화폐전쟁, 쑹훙빙, 차혜정 옮김)

 

무엇보다 미래 문명(제3의 물결 문명)의 중심은 가정이 될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당연시하고 있는 자본주의 형태(생산과 소비가 분리된)는 다시 일정 부분 자급자족(생산=소비)의 형태로 갈 것이라고 한다. 가정이 다시 중요해지게 되는데 전자 주택의 일반화, 기업에 있어서의 새로운 구조 조직의 창조, 생산의 자동화와 탈 획일화 실현의 중심적 존재로서 부상할 것이며, 미래 사회는 새로운 제도에 바탕을 둔 종적 계급사회보다는 오히려 네트워크에 의해 맺어지는 횡적 조직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의 미래사회를 답답한 현실 속에서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물론 그 미래사회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겠지만, 적어도 (생산=소비)의 형태로 가게 된다면 지금처럼 부와 권력이 집중화된 사회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은 가능할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나머지 모든 분야의 운영은 인류가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우리 개인들에게 지금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소수를 위한 자본주의 사회를 직접 나서서 개선할 능력은 없다. 물론 이 어려운 구조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어려운 구조를 풀어갈 구체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관련 전문가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린 대의민주주의 특성상 선거나 여론 등을 통해서 정책 결정자들을 Push 할 수는 있다. 유일한 우리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 우리 사회가, 세계 사회가 어떻게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큰 흐름은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 이 글은 제 브런치 계정(brunch.co.kr/@chaos)에도 실린 글입니다.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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