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병신년 3929(1596). 윤8월24일에는 충무공이 부사 한효순과 함께 가리포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먼저 와 있었다. 남망산(南望山)에 함께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참으로 이곳은 한 도(道)의 요충지이지만 형세가 고립되어 위태로워서 부득이 진영을 이진(梨津)으로 옮겨 합쳐야 했다. 라고 했으며 아래의 글을 남겼다.

與副使同柱加里浦 則右虞候李廷忠亦先到 同上南望 則左右賊路諸島
여부사동주가리포 칙우처후이정충역선도 동상남망 칙좌우적로제도

歷歷可數 眞一道要衝之地 而勢極孤危 不得己 移合梨津
역역가수 진일도요충지지 이세극고위 부득기 이합이진

실제로 이곳 가리포(완도)의 남망산(완도군청의 뒷산, 신흥사가 있는 산)에 오르면 제주, 추자, 소안, 노화, 진도, 청산, 삼도(거문도) 고흥, 금일도, 신지도, 고금도, 강진, 해남, 장도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어서 이곳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면서 남긴 말이다.

또한 <이 충무공 전서 하권> 323쪽에는 지평 현덕승(持平 玄德升)에게 대답하는 글월에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 하였으니,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호남이 중요한 위치에 있고 호남(특히 완도지방)의 수군이 아니면 왜적을 막을 수 없었음을 말한 것이라 생각되고, <이충무공전서 하권> 부록 동의록(372쪽)의 기록 정상(鄭詳)에는 호남(湖南)이 국가의 근본이요, 강회(江淮, 강이름, 물이 빙 돌아 흐른다는 말)의 보장(保障,수양성(睢陽城)에 절사(節死)한 당(唐) 나라 사람 장순(張巡)을 두고 이른 말임.)인데 이곳을 지킨 뒤에라야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O 24일 아침에 괘도(충무공전서에는 도괘(刀掛)로 되어있음)포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낮에 어란포 앞 바다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마을이 텅텅 비어 있었다.

O 25, 26, 27일은 어란포에 머물렀다.

O 28일 적선8척이 덤벼들어 갈두(땅끝)까지 쫓았으나 멀리 도망하여 더 쫓지 아니 하였으며, 뒤 따르던 배가 50여척이라고 했다.

O 29일 벽파진에 도착했다. 8월 29일에 벽파정에 진을 쳤다. 그리고 이순신은 인근의 해전에서 전선 13척과 초탐선(硝探船) 32척으로 수 백 척의 적선을 완파했다고 전한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이충무공 전서> 송덕일(宋德馹)편에 라대용, 정걸 등과 거북선 및 장선(裝船) 수백 척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박광춘(朴光春)편에 라대용, 정걸 등과 함께 장선 1백여 척으로 명량에서 왜적을 막는데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광춘(朴光春)편의 기록 중 장선사(裝船使), 수사(水使) 라대용, 정걸 등과 함께 장선(裝船) 1백여 척으로 명량에서 왜적을 막는데 저녁 조수를 타고 녹도(鹿島), 회령진(會寧鎭)의 수군을 독려하여 왜적을 요충지 목에서 잡으려고 광춘(光春)이 목숨을 걸고 출전하여 마다시(馬多時) 등을 베고 승세를 타서 왜적을 북으로 추격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본다면 12척의 전선만 가지고 싸운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O 3930(1597)년 9월16일, 바로 이날이 그 유명한 명량해전의 날이다.

전선 10여척으로 적선을 무려 330여척을 괴멸시킨 유명한 해전이다. 그럼 이순신은 10여척 남짓한 전선으로만 싸웠을까?
또한 이순신 혼자서 전투를 했을까 우리는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넋도 기려야 할 것이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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