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세계화 반(反)자본주의?

► 출처 : 오마이뉴스 (2017. 7. 7)

세계 주요 정상들 모임인 G20 회담이 지난주 이틀에 걸쳐 독일 함부르크에서 개최되었다. G20은 세계 주요 국가들이 세계 시장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만든 기구이지만, 실은 자국(몇몇 국가들)의 이익을 위한 각축전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공공의 시장질서와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해마다 열리고 있는 G20 정상회담장 밖에 어김없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시민들과 NGO들의 반(反) 세계화, 반(反) 자본주의 시위와 집회다. 올해는 복면(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의 복면도 등장)을 한 무리들의 시위대가 가세하여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독일은 복면 시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나라다. 개최국 정상들은 해마다 이 시위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G20 정상회의가 처음 열린 것은 2008년(제1차). 미국의 세계적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미국이 G20 재무장관회의 참가국 정상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국제 금융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면서 정상회담으로 격상된다. 2010년 11월 한국에서 제5차 회의가 열리기도 했는데 주로 거시경제정책, 금융규제 관련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정책 방향이 주요 의제가 된다.

그런데 세계 시장질서라는 표면적 목표와 달리 자국의 경제지표 개선을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는 이 정상회담장 밖에서 왜 이들 시위대는 해마다 정상회담을 방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목적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 : V For Vendetta>의 퍼포먼스는 아닐 테니 무엇을 위해 그런 복면까지 하고 나와 시위에 가세하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위험천만한 시위 현장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반자본주의!', 즉 현재의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너무 뜬금없고 추상적이지 않은가? “자본의 역사가 10~20년이 아닌 수백 년인데 그 자본에 반대한다고? 수백 년을 거쳐 철갑처럼 공고해진 자본주의를 무슨 수로?”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반자본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잘못했다가는 공산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인 그런 주장을 그들은 G20 정상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은 현 체제에서 드러나고 있는 보다 구체적 문제들에 주목하지 않고, '반자본주의'라는 추상적이면서 실현 가능성조차 모호한 체제의 근본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그들에게 과연 어떤 대안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들은 반(反) 자본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먼저 그들이 특정적, 구체적 이슈가 아닌 추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할 수도 있는 '반자본주의'를 들고 나온 이유부터 들여다보기로 한다. 지금 세계 사회는 갈등, 소외, 궁핍, 오염 등으로 인한 수많은 문제들로 얼룩져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극단적 갈등, 반목, 소외의 문제들이 개선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왜 그럴까? G20 정상국들을 포함한 세계 국가들이 그동안 이런 문제들을 방치, 방관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물론 아닐 것이다. 분명 개선의 노력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겠지만, 도처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근본 처방이 되지 못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극심한 빈부격차(양극화), 끝없는 경쟁체제로 인한 스트레스․정신질환․자살, 자원의 낭비와 과용으로 인한 심각한 환경 오염, 기아, 전쟁 등 많은 문제들은 왜 발생하게 된 것이고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이기적 심리에서 오는 광범위한 도덕적 해이 때문일까. 그러나 그 인간 사회는 이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의지와 함께 다양한 기구들을 오래전부터 작동해오고 있었으므로 원인을 인간의 심성으로 돌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그저 속수무책인 채 문제들이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고통의 주체인 우리의 일상을 천천히 따라가 보기로 한다. 거기엔 우리의 생존 터전인 조직(기업)이 나타나고, 그 기업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자본'의 존재가 드러난다. 우리의 하루 일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더듬어 가보면 그 일상의 시간대별 연결고리마다 자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자본이 제공하는 좋은 집(대형 건설사), 자본이 만든 안락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자본이 만들어낸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해 자본이 만들어 낸 온갖 전자기기, 기구, 식품 등을 이용하여 출근준비를 마치게 된다. 이후 자본이 만들어낸 자동차를 타고 그 자본의 집(회사)으로 출근하여 자본을 위해 일하고 다시 자본이 제공한 나의 집으로 퇴근한다. 이런 구도는 임금근로자가 아닌 자영업, 프리랜서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활동 모두 자본과 연결되어 있다(하청, 도급 등 형태로).

그림으로 그려보니 아찔해진다. 우리를 묶고 있는 그 자본의 사슬이 붕괴되거나 일부라도 삐걱거리면 우리의 삶 역시 위태로워진다는 얘기다. 그래도 자신의 존재와 삶이 그 옛날 노예와는 다를 것이라며 애써 그 근거를 찾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단지 주인이 직접 지시하고 명령하지 않을 뿐, 사회 전반에 깔린 인프라를 통해 그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게 뭐 어때서”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 삶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 가고 있는 듯한 착각과 달리, 실제로는 철저히 자본의 굴레 속에서 자본이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그 자본의 터전에서 자본의 이익을 위해 끝없는 경쟁을 해야 하고(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그들의 목적(끝없는 자본의 축적)을 위해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면? 물론 극히 일부에게나마 승진 또는 후한 연봉이라는 자부심이 주어진다.

오늘날 개인들은 삶의 목적이 된 이 ‘뿌듯한 자부심’을 얻기 위한 끝없는 경쟁에 익숙해져 버렸다. 누군가 조금 더 가져가고 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처참하게 희생되어야 하는 치열한 경쟁 구도가 공정 경쟁이라는 그럴듯한 외형으로 포장된 채 말이다. 그나마 열심히 쌓아 올린 자신의 지위가 죽을 때까지라도 지속해 준다면 조금은 덜 억울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회로부터의 끈을 놓게 되는 순간(은퇴) 이 모든 지위는 하루아침의 모래성이 되고 결국 인간은 젊음을 바쳐 모아둔 자금을 축내가면서 늙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도 자본은 여지없이 따라붙어 다니며 자본을 굴려 나간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인간은 스스로의 방식과 의지대로 정리할 수 없고 결국 자본에 의지하여 편안히(?)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문득 현재 지구촌에 드러나고 있는 환경문제, 과소비, 양극화와 같은 첨예한 문제들이 과연 자본에 대한 근본적 처방 없이 해결 가능한 것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G20 회담장 밖의 시위대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음에도 꾸준히 이 '반자본주의'를 이슈화하고 있는 이유가 이제 좀 정리가 되는 기분이랄까.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런 병리 현상들을 근원적 시선으로 직시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읽혀지는 것이다.

그런데 시위대의 구호를 비웃기라도 하듯 여전히 비인간적 방법으로 끝없이 질주하고 있는 자본 앞에 국가는 왜 그저 무기력한 방관자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바로 축적 원리의 속성을 끝없이 실현해나가는 거대한 자본주의 인프라, 그 위에 바로 그 국가, 이 사회의 포지션이 있기 때문이다. 무한 팽창해가는 자본의 회오리는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이자 거대 권력이고 보니 이들의 강한 회오리 위에 서있는 국가 역시 그 속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민과 전쟁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초래한 이들이 지금 G20 회의장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는 어느 시위자의 주장에는,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현장과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국가 사이의 심각한 괴리감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나게 드러나고 있었다.

  반(反) 자본의 대안은 무엇인가

다음으로 풀어야 할 궁금증은 그들 시위대가 주장하는 반자본의 대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나름의 장기적 로드맵이 있겠지만, 당장에 딱히 대안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세계 사회에 현 자본주의 체제의 심각한 실상을 알려 문제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그들에겐 보다 시급했을 것이다. 도대체 자본주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많은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그래서 현재의 방향과 방법은 왜 수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실제 범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에 저항하고 있는 세계적 환경운동 단체 '그린피스'의 활동을 보면 간절한 메시지 전달을 위해 때로 위험천만한 순간도 동원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발휘되기도 한다. 미국 사회는 대공황 이후 국토 전역에 7만 개가 넘는 댐이 건설되었고 이 댐들은 이후 자연생태계를 교란하고 자연재해를 부르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서 시민사회의 설득으로 노후된 시설부터 차례로 댐을 철거해 버리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3~4년 만에 수만 킬로미터를 돌아 어릴 적 고향으로 알을 낳기 위해 돌아온 연어의 처참한 최후의 모습을 담은 충격적인 영화 <댐네이션>(미국, 감독 벤 나이트, 트레비스 럼멜)은 2014년 제11회 서울환경영화제 국제환경영화 경선 장편 대상과 관객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영화는 미국 아웃도어 회사 파타고니아(Patagonia)가 제작했는데 영화 중 한 장면이 생각난다. 댐의 탑에 묶어 놓은 받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댐 벽면을 좌우로 점프해가면서 댐을 철거하라는 의미의 가위 모양을 그려나가는 장면이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을 무릅쓰고 댐 담벼락에 거대한 가위를 그려 넣음으로써 연방정부도 어쩌지 못하는(위에서 시멘트를 들이붓지 않고서는 지울 수 없는) 상황을 유도하는 그린피스의 열정적 활동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자본의 폭력성을 그리고 있는 또 하나의 다큐 영화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다큐멘터리 영화 <움켜쥔 땅 : LAND GRABBING, 2015>은 세계의 거대 자본이 투자전문가들의 매개 하에 가난한 나라와의 거래로 어떻게 폭리를 취하고 노동을 착취하는지, 그리고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본 종속이 가속화하면서 개인들의 삶이 파괴되어가는 캄보디아, 외국인 자본의 급격한 유입과 민영화로 인해 위협받는 루마니아의 농촌,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현대판 노예로 전락해가는 시에라리온의 모습들은 시대를 달리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나라들이 앞서 거쳐 간 오랜 자본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아이 넷 키우며)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설탕공장에) 땅을 빼앗기기 전에는 쌀농사를 지었어요.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죠. 소금과 식용유만 사면 됐죠. 그런데 지금은 쌀을 사려고 그 설탕공장에서 일해야 해요. 애들까지 거기서 일해요.”

그들은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났다. 캄보디아 프놈펜의 평온했던 한 시골마을이 불도저에 밀려 261가구가 불태워진다. 한 상원의원이 소유한 설탕공장이 마을 주민들을 몰아내면서 평화는 깨지고 주민들의 노예생활이 시작된다. 국가권력은 기득권에게 특혜를 주고, 기득권은 주민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고 공장 노예로 삼았다. 이렇게 생산한 값싼 농산물은 부자나라의 무관세 혜택에 힘입어 다국적 대기업의 배를 불리고 있다. 다이아몬드, 커피, 초콜릿을 만드는 코코아 생산을 위해 아프리카, 중남미 등 아동 노동 착취가 자행된다는 보도가 종종 나왔지만 해결은커녕 가난한 나라 주민의 생활은 절망의 나날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 전형처럼 여겨지는 선진 유럽(EU) 국가들의 가정에 배달되는 달콤한 설탕과 친환경 원료는 폭력과 노동착취, 속임수에 가까운 주민 지원책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경제 체제에서 나온다는 무거운 진실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거대 기업들이 생명공학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벌이고 있는 유전자 조작 과정과 유전자 조작된 식물들을 광범위하게 생산해내기 위해 멀쩡한 농민들을 어떻게 몰아내고 심지어 착취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영화 <유전자 룰렛 : 생명을 건 도박, 제프리 스미스 감독>도 같은 맥락으로 전개된다. 그들이 자국 내에서 반대 여론에 부딪치자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권력자들과 손잡고 그 나라 농민들을 점령군처럼 점령해가는 과정들은 가히 영토전쟁이 연상될 정도이다.

거대 자본은 이들 농민들에게 ‘충분히 땅의 대가를 지불받고도 다시 자본에 들어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땅을 사들이고, 그 땅에 검증되지도 않은 거대한 유전자 조작 식물 농장을 만들어 농지에서 쫓겨난 이들 농민들을 다시 데려다 거의 노예처럼 부린다. 환경에 강한 유전자로 조작된 작물이란 자연히 독성분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 식물들에게 쓰일 제초제는 더욱 강한 성분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 물론 제초제를 뿌려야 하는 노동자에게도, 이 독성분의 식물을 섭취하게 되는 소비자들에게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본은 온갖 추악한 짓을 마다하지 않고 엄청난 일을 저지르며 자연과 인간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기고 있다.

이런 행태가 경제 선진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무한 경쟁 속에서 1등이 아니면 또는 상대를 이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낸 것도 자본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패자로서(실업자 또는 저임금자) 사실상 도태되게 만들었으며, 이긴 자들이 누리는 승리의 기쁨도 그들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왔는지 경험하게 되는 순간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그 경험이 현실로 다가오기 전까지는 이 속도에서 밀려나 패자로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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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제대로 이해되고 보니 이제 G20 회담장 밖 시위대의 구호가 더 이상 '일자리를 늘려라.', '복지를 확충해라', '전쟁, 기아를 해결하라', '지구온난화를 대비하라', '경쟁체제를 완화해라' 라는 개별적 사안의 구호로 끝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 않는가? 일시적, 부분적 해결로는 본래 궤도로 회귀하려는 이 자본주의 관성을 막을 수 없으며, 자본은 결국 지독한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데 성공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원인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탐욕스러운 자본과 자본시스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레일 위에서 끝없이 운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설국열차(영화)와도 같다. 오늘날 지구가 생산하는 물자는 차고 넘칠 정도지만, 자본은 그들의 거대한 몫을 따로 챙겨둔 채 나머지 몫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하고 있으며, 이때 작동되는 경쟁 원리가 자본축적의 원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쳇바퀴 위에 올라선 다람쥐처럼 누구도 이 속도를 멈추려는 노력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18세기 초 버나드 맨더빌 (Bernard Mandeville)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을 굶어 죽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저축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아무것도 주지 말아야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일하는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요인은 '적당한 임금'이다. 너무 적게 주면 기질상 무기력해지고 절망감에 빠지며, 너무 많이 주면 무례하고 게을러진다.

그리고 덧붙인 그의 이 한마디..

사회에 행복을 주고 인민을 궁핍 속에서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들을 완전한 무지와 빈궁 속에 빠뜨려둘 필요가 있다.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자본에 대한 무지!' 그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이유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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