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축제에 붙여

"맥주 한 잔 할래요?"

로비를 지나가는데 역시나 또 그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일부러 내 퇴근 시간에 맞추어 거기 앉아 있다가 나를 보는 건지, 우연히 혹은 늘 그 시간에 거기 앉아 있다가 나를 보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도 로비를 지날 때면 그녀가 있는지 둘러보다가, 없으면 공연히 서운해지기도 했다.

같이 손을 흔들어 주며 인사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데 그녀가 일어서더니 내게 다가온다. 다른 곳을 가려는 것인가 하고 둘러보는데 내게 곧장 오더니 다짜고짜 지금 시간 좀 있냐고, 시간 있으면 맥주나 한 잔 하자는 게 아닌가. 늘씬한 키에 갈색 눈, 하얀 피부에 수줍은 듯한 미소. 지금까지도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되,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아니 가장 예쁜 여자였다.

1997년 태국의 방콕에서 나는 그렇게 프언을 만났다.

태국에 가기 전에 귀가 따갑도록 받은 교육과 다른 사람과 손도 못 잡게 만들 정도의 두려운 '썰'들 때문에 당시 나는 그 외국인 아파트에서 가장 비 사교적인 외국인이었다. 매주 금요일 밤마다 열리는 야외 수영장 파티에 여러 번 초대를 받고도 매번 거절하자 이윽고 매니저가 와서는 그렇게 하면 여기서 잘 지내기 어렵다고 경고까지 할 정도였다. 삼 개월을 그렇게 아파트와 사무실만 왕복하며 지내자 사람 좋아하고 술 마시고 노는 거 좋아하는 내 성정 상 정말 지루하고 답답해서, 슬슬 밖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할 때 쯤 프언이 다가 온 것이었다.

그렇게 예쁘고 늘씬하며 다정하기까지 한 여자가 전혀 매력적이지도 않고 자기같이 젊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직장인 남자에게 관심과 친절 혹은 애정을 보이는 게 이상한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저 그녀의 호기심으로 생각했다. 다른 입주자들은 그녀에게 심드렁하거나 심지어 쌀쌀맞게 대하는 이들도 있어서 의아했지만 그것 역시 그녀에 대한 내 호기심 혹은 엉큼한 생각을 누르지는 못했다. 하여튼 나는 그녀와 아주 가까워졌고 그녀의 방에까지 초대를 받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호텔식이었던 아파트 바에서 혹은 밖의 클럽에서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가까이 앉아 있으면 그녀에게서는 늘 아카시아 향기 비슷한 냄새가 났다.

어느 날 며칠 출장을 끝내고 돌아와 로비를 지나는데 그녀 대신 나를 보고 손을 흔드는 남자가 있어서 다가가 보니 몇 번 이용한 적이 있는 오토바이 택시 기사였다. 방콕에서 오토바이 택시를 이용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교통지옥 방콕에서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일 정도로 빠른 기동력 때문에 아예 지명해 놓고 이용하던 오토바이 기사였다. 그는 나를 구석 자리로 끌고 가더니 서투른 영어와 태국 말을 섞어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

방에 올라가 샤워를 하고 대충 짐을 정리하고 빨래거리를 들고 내려오니 로비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던 프언이 내게 다가와 웃으며 출장은 어땠냐고 묻는다. 그녀의 손에도 역시 빨래거리인 듯한 짐이 들려 있었다. 이제 같이 빨래방에 가서 수다를 떨며 맥주를 마시거나 게임을 하거나 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자마자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애써 미소를 지을 수도 마주 보기도 힘들었다. 나는 허둥지둥 빨래방 가기를 포기하고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세상에 그렇게 예쁜 여자아이가 남자라니.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20년 전의 나는 성소수자이니 성평등이니 혹은 인권이니 하는 그 모든 것에 완벽하게 무지했다. 그저 학창시절 유신정권과의 싸움 속에서 갈망한 인권에 대한 인식 중의 일부, 그것도 아주 왜곡된 것으로 배운 것이 성에 대한 지식의 전부였다. 나에게 그것은 이념문제나 지식 문제를 떠난 공포 그 자체였다. 지금의 내가 때때로 무지는 죄악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수많은 일들 중에 그녀와의 일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당시의 그 무지몽매했던 한 인간이 순결한 한 영혼에 가했을 상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는 그때부터 두려움이 되었다. 며칠 후 로비에서 만난 그녀가 손을 흔들며 다가와 잠깐 시간 있으면 할 말이 있다고, 잠깐이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냉정하게 거절하고 어색한 눈인사만 건네고 돌아섰다. 이미 그녀도 뭔가를 눈치 채고 또 뭔가를 설명하려 했겠지만 나는 같이 서 있기도, 앉아 있기도 싫었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가 또 그토록 멀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놀랐지만 나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그녀의 청을 거절하고 돌아섰을 때의 그녀의 표정, 그 마지막 그녀의 눈빛을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슬픔, 체념 그리고 절망 같은 게 뒤섞인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온몸에 슬픔이 가득하여 뭔가를 얘기하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고, 몸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가다가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경비는 그녀가 아파트를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말해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십 년 후 쯤 태국에 가는 길에 나는 그 아파트를 방문하여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저녁 그녀와 자주 가곤 했던 바 'Rainbow' 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다 급기야 눈물을 떨어뜨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이라면, 아니 단 몇 년 만의 내 무지함을 깨달을 시간만 있었다면 그토록 그녀를 참혹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을.

▲ 사진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2927.html

오늘 이 시간, 서울광장에서 퀴어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 축제는 성소수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다. 나같이 성에 대해 무지하고 몰상식한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을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데 경계와 규범 혹은 도덕 따위는 필요 없다. 불법이 아닌 한, 다른 이에게 고의적인 고통을 주지 않는 한, 세상 모든 사랑의 행위는 축복받아 마땅하지 경멸과 혐오의 시선은 온당하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프언들에게 이십년 전의 무지했던 한 인간의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그대들을 향한 배타적이고도 온당하지 못한 대우 역시 당시의 나같이 무지와 몰상식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부디 그들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더불어 대한민국의 심장에서 열리는 그대들의 축제에 부디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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