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각박하게 살아 온 지난날을 반추해 보았다.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 몸과 마음을 지배했기에 그렇게 살았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교육이었다. 가정, 학교,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한결같았다. 교육이 족쇄를 채운 것이다. 다음과 같다.

▲ 사진 출처 : pixabay, 허황하고 공허한 하늘, 생명들을 거부한다.

“높은 곳을 향해 가라. 성공해라. 더 높이 더 빨리 가라. 1등해라. 앞서가라. 최고가 되어라. 만족하지 마라. 만족하면 끝장이다. 퇴보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다.

“아래를 보지 마라. 추락한다. 헤어나지 못한다. 갈 곳은 낮은 곳이 아니다. 정답도 승리도 성공도 높은 곳에 있다. 낮은 곳은 생각지도 마라. 사지로 큰 일 난다. 패배와 실패의 길이다. 불행과 지옥이다.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우주를 그려라”

반복 세뇌로 이념화되었다. 심신은 물론 정신과 사고까지 지배했고, 삶의 법칙과 규율이 되었다. 저 높은 곳은 추구할 가치였고, 정상은 지향할 목적지였다. 스펀지처럼 받아들여 몸에 체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낙오자와 실패자가 될 것이라 경고했다. 높은 곳은 진리와 꿈과 희망이었다. 질문과 반대는 엄감생심, 거스를 수도 없었다.

전지전능의 신은 저 높은 곳에 계신다고 했다. 거룩하고 위대한 분들은 천상에 계신다. 범인들은 접근과 이해 불가하니 굴복하고 따르라 했다. 지상의 높은 분들도 같았다. 천국과 낙원도 그곳에 있다. 아무튼 증명할 수 없으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인간들이 갈망하는 것들을 저 높은 곳에 두어야 하는가? 엄두도 못 낼 곳에 놓고 절망하게 해야 할까.

하지만 아니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의식의 깸과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천상과 높은 곳은 공허했다. 보통 사람들에겐 황망했다. 접근도 어렵지만 있을 곳도 못됐다. 잠시잠깐은 몰라도 두렵고 불안했다. 올려준다 해도 오래 있지 못할 듯했다. 천상은 살아 있을 때나 사후에도 갈 곳이 아니었다.

반면에 낮은 땅은 몸과 맘이 편안했다. 땅이 몸을 받쳐 주니 마음과 몸이 편안하였다. 이곳이 있을 곳이었다. 하늘과 높은 곳은 나를 허락지 않았고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지만, 땅과 낮은 곳은 온전히 나를 받아주었다. 하늘과 높은 곳은 보조 장치가 있어야 하지만, 땅과 낮은 곳은 있는 그대로 받아 주었다. 하늘과 높은 곳을 지향하자는 것은 심약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농락하는 것이다. 뀀으로 혼절시켜 사익을 챙긴다. 의타심을 혼몽으로 악용한 것이다.

위험이 닥치면 어디로 피신하는가. 하늘인가 땅인가. 안전은 어디에 있는가. 높은 곳인가 낮은 곳인가. 하늘에 매달려 사는가. 땅을 딛고 사는가. 구원은 하늘이 아닌 땅에 있다. 첨단과학기술이란 명목으로 하늘로 날려버린 자산이 얼마인가? 땅에 주었다면 많은 생명들은 구원했을 텐데. 생명들은 하늘의 식량으로 살 수 없다. 땅의 식량으로 사는 것이다. 식의주(食衣住)는 땅의 은혜요, 구원이다. 구원은 높은 하늘이 아니라 낮은 땅에 있다. 안식처는 낮은 이곳이다.

▲ 사진 출처 : pixabay, 땅 위의 생명들, 땅은 만물을 먹여 살린다.

깨어나 깨닫자. 자신을 맡길 수 없다. 위탁도 불가하다. 심신평안은 높고 먼 곳이 아니라 낮은 이곳에 있다. 의존하지 마라. 귀책이다. 안정과 평화는 오직 낮은 땅에서 가능하다. 훌륭한 인간도, 신도 불가하다. 진실하고 아늑한 삶은 낮은 이곳에 있다.

높고 넓은 곳은 큰소리가 필요하지만
낮고 좁은 곳은 작은 소리도 충분하더라
높은 곳은 떨어질까 미끄러질까 조마조마하지만
낮은 곳은 정신 줄을 놓아도 괜찮더라

높게 외치는 소리보다
낮은 속삭임에 참 삶이 있고
한번 뿐인 인생 어찌 살 것인가
긴장 속에 바삐 살지, 편안하고 느릿하게 살지
순박한 심신은 처분만 기다리더라

모든 병폐는 더 높게 더 빠르게 더 많이
적게 벌어 적게 쓰고 느리지만 여유 있게
낮은 곳서 긴장 않고 편안히 사는 게 좋더라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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