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1)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실천 여성학자 손이덕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삶의 질곡에 빠져 있을 때였다. 내 삶에, 가정폭력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만남이 우연적으로라도 있을 수 있었겠는가. 가정폭력은 필연의 매개였다.

▲ 사진 : 손덕수 저, 수레를 미는 여성들, 도서출판 공동체.

감사한 마음으로 소통하던 몇 달 뒤, 나는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어 비 내리는 오늘처럼, 바람까지 더해 우산이 반쯤 날아가는 감동(?)스러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구기동 이북오도 도청으로 향했다. 선생님의 청아한 목소리도, 빛나는 피부와 반짝이는 눈빛도 모두 존경스러운 마음에 빛을 더했다. 똑같은 고난이 세대를 통해 반복하는 여성들의 문제, 아니 남성들의 문제, 아니 사회적이고, 국가적이고, 세계적이고, 지구적인 문제에 관해 우리는 마음과 머리를 맞대어 본다. 선생님은 책 한 권을 꺼내 주셨다. <수레를 미는 여성들>.

어떤 무게로 혼자 밀고 가는 수레일까. 나는 잠시 상상력을 꺼내본다. 온통 보라색 파동으로 꿈꾸는 소녀인 것을 증명해 내는 것은 나에게 쉬운 일이었다. 손이덕수 선생님께서도 재미난 상상력의 수다를 줄곧 이어가신다. 어쩌면, 이런 자유스러운 실천 여성학자를 만날 수 있었을까. '나는 행운아'라고 잠시 나를 어루만진다.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에 설렘도 동행한다. 정동. 우리들의 움직이는 마음들은 무언가를 만든다. 그것 또한 물리력이요 물질세계를 구성한다. 사물은 홀로 거기 있지 않는 법. 선생님은 지금의 나의 지랄과 분노에 꼭 닿아있었다.


지랄발광 삼시 세 끼를 차려내야 하는 여성의 숙명이 이제는 좀 달라졌을까. 내가 경험해본 결혼생활은 아니었다. 약 올리듯 다 차려놓은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남편은 이태원 비즈니스의 세계로 자유스럽게 나가는 몰상식의 다반사였다. 남녀는 극대칭일까? 싸대기라도 올리고 싶다. 달라지는 성 평등 세계라지만 여전히 굳건한 걸림돌로 남아 있는 웅장한 이 돌들을 우리는 어떻게 다 실어다 내버려야 할지 암담하다. 남성들에게 돌봄의 무임승차에서 그만 하차하라는 학자도 있고, 헌법에 성 평등한 돌봄권을 명시하자는 학자도 있다. 아직은 말과 글뿐이다.

나는 학자를 꿈꾸다 목 졸려 죽을 뻔했지만 우연히(?) 살아남은 가정폭력의 생존자이다. 그래서 3일 노동 3일 돌봄을 꿈꾼다. 여성에 대한 폭압은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현대판 마녀사냥에서도 여전히 남성들이 즐겨 쓰는 유효한 전략(?)과 전술이다. 이들은 똑똑하고 지략 있는 매력 덩어리 여성들을 창녀와 꽃뱀, 정신이상자로 둔갑시킨다. 또한 마초와 마력, 공권력의 횡포로 남용하고 있다. 동시대의 여성과 남성은 다른 임금 다른 시간을 사용하며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비정상적인 세계를 또다시 학습시킨다.

<수레를 미는 여성들>을 유심히 읽다 보면, 한탄과 한숨을 넘어 분노와 열통이 함께 샘 솟는다.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여성들의 일과 삶, 가사노동과 저임금, 강간, 매춘, 성매매,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여성 혐오 등 달라진 것은 어디에도 없다. 손이덕수 선생님은 초기 이화여대에 여성학 창립의 주된 멤버셨고, 대구 효성대에서 사회사업을 강의하셨다. 가난한 여성을 위해 화장실이 없어 똥오줌이 줄줄 새어 내려오는 하월곡동에 들어가 윤미란-윤미옥 자매와 함께 30여 개의 공부방을 만드셨다. 매 맞는 여성을 위해 한국 여성의 전화를 만들기도 하셨다. 선생님의 잔잔한 얼굴 주름 속에서 비치는 당시 상황의 술회가 이어지고, 내 손 안에 들려진 책과 경험의 스토리텔링은 내가 이 시간, 이 공간으로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를 이해하게 만드셨다. 신의 부재 속에서도 신의 섭리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국 교회의 여러 부정과 남성 독점의 자본 결탁이 만들어 낸 부정의에 '신은 없다. 어디에도 없다. 찾아봐도 없고, 믿으려고 해봐야 없다'는 강한 부정으로 일삼았던 내게 할 일과 소명을 다시 깨우쳐 준 순간이었다. 성균관대 풀무질 서점에서 매주 수요일 녹색평론을 이끌었던 독서모임 리더, 최성순(별칭 구름)은 구할 수 없는 책을 제본떠서 함께 <수레를 미는 여성들>을 탐구한다. 선명하게 떠올려진 오늘날의 여성문제, 전 지구적 문제에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함께 구기동 비봉 5길 12-11 자택에서 연구가 이뤄진다. 수다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고, 여성해방 아니 인간해방의 길로 모색될 것이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 어디인지 한 번 답을 달아보고자 한다. 불평등의 세계를 넘고 차별과 철폐를 넘어 가는 대한민국의 여성당, 살림당, 주부당을 꿈꿔 본다.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으며.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심연우 시민통신원  vvvv77vvv@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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