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목수가 쓴 돛단배 이야기2] 마광남 주주통신원

우리의 배를 통칭해서 한선(韓船)이라고 한다. 우리의 전통 한선은 예부터 우리만의 독자적인 조선방법을 가지고 배를 만들어 왔던 것이 전래되어 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자기들 식으로 개량할 것을 강요하면서 전통적인 우리배의 선형이 바뀌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선형이 바뀌어가고 있는 시기와 맛 물렸을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러운 시대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만약 현대의 우리 배들이 일본이나 미국 등의 배와 선형이 같다고 해서 그 나라 배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에 사용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배들은 거의가 선형이 같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선(韓船)이란 그냥 한국의 배일뿐이다. 역사의 기록들을 보면 중국의 배를 한선(漢船)이라고 표현 했듯이 우리 배를 한선(韓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의 배를 한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811년 통신사 김이교(金履喬) (조선 후기의 문신(1764~1832).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검열, 수찬을 거쳐 한성부 판윤, 이조 판서, 평안도 관찰사, 우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죽리집≫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마지막 통신사인 제12차 통신사였다.) 일행이 타고 간 통신사선을 보고 일본의 한 화원이 그린 구조도의 제목이 한선앙면도(韓船仰面圖)라고 써져있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국립중앙과학관 2009 겨레과학기술 조사연구(XV) 배무이기술 7쪽)

우리 배를 한선이라고 하더라도 시대별로 구분하여 삼국, 고려, 조선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별로 구분하여 한선이니, 한선이 아니라고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배는 그냥 한국의 배일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배를 타고 다녔을까? 우리의 생활과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모양이나 형식은 다를지라도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오랜 옛날의 우리 배에 대해서는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울산 반구대(盤龜臺)의 암각화(巖刻畵)에 나타나 있는 고래와 배의 그림으로 밝힐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암각화는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어쩌면 이보다 더 앞서부터 이러한 어로행위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옛날의 배를 우리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그러한 형태의 것이 아니라 훨씬 발전된 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크고 힘이 센 고래를 잡을 수 있었다면 특수한 형태의 배를 만들어 사용하였을 것이고, 견고하면서도 날렵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래를 잡는 것이 아니라 고래에게 잡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05년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의 우포늪에서 발굴된 통나무배가 있는데, 진해박물관의 발표에 의하면 이 배는 기원전 6~8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이렇게 오랜 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배 형태를 크게 나누어 본다면 평저선과 첨저선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느 시대에 어떠한 형태로 선형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평저선은 간만의 차가 심하고 수심이 얕은 연안이나 강에서 사용하기에는 용이한 배이지만 큰 바다를 항해하거나 역풍(逆風)일 때는 항해를 할 수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회전반경이 작아서 급선회를 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이물과 고물이 치켜 올려져있어야만 회전 반경을 최소화 할 수가 있다.

반면에 첨저선은 회전반경은 크지만 역풍항해를 할 때 최대 60도까지 접근하면서 항해를 할 수 있고 능파성(凌波性)이 좋아 큰 바다를 항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선형이다. 목포의 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신안 해저 유물선은 14세기 때의 배라고 하는데, 현재의 배들과 선형이 거의 같다.

이 배에는 아주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이물의 끝부분이 배의 밑 수평면 보다 아래로 처져있는 점이다. 이러한 것은 역풍항해를 할 때 밀림을 막기 위함이고 능파성(凌波性)을 좋게 하기 위하여 배를 만들 때 그렇게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중국의 배만 그러한 선형을 가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배들도 어선이나 상선처럼 큰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은 이러한 공법을 썼고, 6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 이러한 선형의 배들은 주로 삼천포지방에서 만들어진 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첨저선으로 역풍항해를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838) 기록을 보면 배가 모래톱에 걸려 파도가 동쪽에서 오면 배는 서쪽으로 기울고, 파도가 서쪽에서 오면 배는 동쪽으로 기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문경 2001 도서출판 입당구법순례행기 승화 5년(838) 6월28일 24쪽)

이 배가 평저선이였다면 좌우로 흔들릴 수가 없다. 그런데도 평저선이였기 때문에 배가 좌우로 흔들렸다고 이상한 이론을 펴는 사람도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얼버무린 사람도 있다.

또한 개성 4년(839) 5월 29일의 기록에는 신라선 한척이 흰 돛을 달고 입구로부터 건너오더니 오래지 않아 돛을 돌려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新羅船一隻懸白帆,從海口渡去, 不久之頃 廻帆入來 : 小野勝年 平成元年4月30日 入唐求法巡禮行記 第二卷 三六쪽) 이 배는(신라선)첨저형의 배였으며 역풍항해를 하여서 항구로 들어왔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즉 돛을 돌려서란 역풍항해 시에만 행해지는 돛의 조작법이기 때문이다.

고려도경의 객주(客舟)편에는 항해를 할 때 바다가 깊은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얕아서 박히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의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 조수가 빠지면 배가 기울어져 배를 구할 수 없게 되므로 납추(鉛錘)를 떨어뜨려 바다의 깊이를 재어보았다고 하였다. (조동원 외 2005 황소자리 고려도경 제34권 해도1 객주편)

이 배가 비록 송나라 배이긴 하지만 이 배는 첨저형의 배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교류가 활발했던 동시대에 우리만 이러한 배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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