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낙랑국: 낙랑이라는 이름의 마차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舟車所至 霜露所墜]’ 그런 곳이라면 어디든 (낙랑의)수레가 이르렀으리라.”(열하일기 '수레제도'에서)
‘낙랑樂浪’의 정체는 중화라는 공작새깃털을 선전하는 예배당이었으니(1화~제3화 참조), 무용총수렵도(제5화)에 그려진 '성인의 수레'가 다름 아닌 낙랑이다. '낙랑'은 일찍이 기자시대로부터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2천년 역사의 키워드였으니, 연암은 「중용中庸」의 한 구절[舟車所至 霜露所墜]을 빌어 낙랑의 '정체'를 암시한다. ‘낙랑이라는 이름의 마차’이야기에 앞서 20세기 최고의 걸작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를 보자.
미국 남부의 몰락한 대지주의 딸 ‘블랑쉬 뒤보아Blanche Dubois’가 뉴올리언스에 사는 동생 스텔라Stella를 찾아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을 지나 ‘낙원’이라는 이름의 역에서 내리라는 메모를 들고서.
블랑쉬Blanche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의 공작새인간, 아테네 신전 같은 하얀 기둥이 우뚝 세워진 ‘벨 리브Belle Reve’의 대저택에서 자라난 공주님이다. 그러나 남부의 지주계급이 추락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급격히 가문이 몰락하는 가운데, 어린 시절 결혼한 남편마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노출되어)자살하자 블랑쉬는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하여 로오렐Laurel의 한 호텔에서 낯선 남자들strange men과 잠자리intimacy를 함께 한다. 공황panic으로부터의 방어기재를 찾아 이 남자 저 남자를 사냥hunting하다가 결국 17세 소년을 사냥한 일이 발각되어 로오렐에서 추방되어 뉴올리언스를 찾아온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찾아온 동생 집에서 가련한 여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남매의 대화를 보라.
블랑쉬: 오, 스텔라! 이제 너를 보자꾸나. 하지만 난 보지 말아. 스텔라, 안 돼! 목욕하고 좀 쉬고 난 다음까지는 말야. 그리고 저 천정의 불을 꺼 주렴. 이 무자비한 불빛 아래서는 보여주지 않을 거야. 오, 얘야! 별을 닮은 스텔라! 난 네가 이런 형편없는 곳에 다시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단다. 아차, 내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지?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참 위치도 좋고.
…중략…
블랑쉬: 농담은 그만하고 진지하게 얘기하자꾸나. 왜 내게 말하지 않았니? 왜 편지에 쓰지 않았어?
스텔라: 무슨 얘기를 말야, 언니?
블랑쉬: 물론 이런 곳에서 이런 상태로 살아야 하는 이유 말이다.
스텔라: 좀 심한 거 아냐? 이곳은 그렇게 형편없는 곳이 아니란 말야!
블랑쉬는 여전히 ‘벨 리브Belle Reve’의 대저택에서 살던 시절의 귀족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부족하나마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폄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스텔라는 가련한 언니를 따뜻하게 받아들이지만, 그녀의 남편 스탠리Stanley는 어찌하겠는가. 작가가 묘사한 스탠리의 캐릭터를 보라.
스탠리가 부엌의 천으로 된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온다. 키는 보통이지만 건강하며 단단한 체구를 지닌 그는 몸짓과 동작 하나하나에 동물적인 환희가 베어있다. 막 성년이 될 때부터 그의 삶의 줄기는 여성들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것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얻는 허약한 만족이 아니라 암탉들에게 둘러싸여 멋진 깃털을 과시하는 수탉과 같은 힘과 긍지를 갖고서, 상스런 농지거리를 뱉으며 맛있는 술과 음식, 노름, 자가용 승용차와 라디오를 즐기면서, 원초적인 생식기능 보유자로서의 심벌을 과시한다.
공작새(블랑쉬)와 까마귀(스탠리)의 충돌은 피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솝우화의 ‘우월한 공작새 vs 모자란 까마귀’의 구도는 아니라는 점을 작가는 “멋진 깃털을 지닌 수탉과 같은 힘과 긍지”로 암시하고 있다.
‘우아한 공작새 vs 멋진 까마귀’의 대결. 그 싸음에서 승리한다면 블랑쉬는 행복하리라. 어떻게? 다름 아닌 미첼-애칭 미치Mitch-이라는 스탠리의 친구를 새로운 연인으로 얻게 될 테니 말이다.
스탠리의 집에서 친구들과 포커를 치던 미치Mitch는 블랑쉬를 만나고, 첫눈에 반한 남녀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에 맞추어 함께 왈츠를 춘다. 그러나 술기운이 오른 스탠리가 다가와 라디오를 집어던져 버렸으니 포커판도 춤판도 끝장나버리고, 스텔라는 난폭한 남편을 피하여 2층에 사는 유니스와 스티브 부부의 집으로 피신한다. 인사불성이 된 스탠리는 “귀여운 마누라가 날 떠났군!”하더니 2층을 향하여 ‘스텔라~ 스텔라~’ 고래고래 소리친다. “잠시 후 잠겨 있던 2층 문이 다시 열리고 스텔라가 가운을 입은 채로 삐걱거리는 층계를 내려온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반짝이고 머리카락은 목덜미와 어깨로 늘어져 있다. 남녀는 서로 응시하다가 나직하게 짐승처럼 흐느끼더니, 남자는 층계에 무릎을 꿇고 임신한 아내의 배에 얼굴을 파묻는다. 여자가 부드러운 눈으로 남자의 머리를 감싸 올리자, 남자는 휘장을 획 열어젖혀 여자를 안아들고는 침실로 들어간다.”
동생 부부의 기묘한 성생활(폭력+섹스)을 목도한 블랑쉬는 다음 날 스텔라에게 이런 천박한 생활에서 탈출하라고 추궁하지만, 스텔라는 “난 어쩐지 스릴을 느꼈어.”라며 언니의 충고를 외면한다.
공작새(블랑쉬)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이번에는 까마귀(스탠리)가 공격할 차례. 스탠리는 로오렐을 들락거리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블랑쉬의 은밀한 과거를 추적하고는 미치Mitch에게 고자질한다. 마음이 돌아선 미치Mitch가 과거를 추궁하고, 블랑쉬가 고백한다.
미치: 플라밍고라호텔에 묵지 않았단 말이오?
블랑쉬: 플라밍고? 아니에요. 그곳의 이름은 터런튤라Tarantula에요. ‘커다란 거미’라는 뜻이죠. 그곳이 내가 제물들을 끌어들인 곳이에요. 그래요. 낯선 사람들strange men과 많은 관계intimacy를 가졌어요. 앨란(남편)이 죽은 후 낯선 사람들하고의 관계만이 나의 텅 빈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어요.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을 전전하면서 어떤 보호를 받으려는 것은 공황panic, 바로 공황panic이었어요. 여기 저기 전전하다가 마침내 생각할 수조차 없는 곳, 바로 17살 소년에게까지 미쳤을 때, 누군가 슈퍼관찰자super-intendent에게 투고하였죠. 이 여자는 도덕적으로 그녀의 지위에 적합하지 않다고.
.....중략.....
(미치가 블랑쉬의 허리에 손을 갖다대고는 그녀를 돌려세우려 한다.)
블랑쉬: 왜 이러시는 거죠?
미치: (그녀를 껴안으려고 하면서) 여름 내내 하고 싶었던 것을 하려고.
블랑쉬: 그렇다면 나하고 결혼해요, 미치!]
미치: 이젠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졌소.
한 때 블랑쉬가 기대했던 구원의 남자는 이제 섹스만을 원할 뿐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스텔라가 출산을 위해서 병원에 입원한 날 밤, 스탠리는 더 이상 의지할 곳 없는 블랑쉬를 강간하고, 그 충격으로 산산이 부서져버린 가녀린 블랑쉬는 정신병원으로 실려 간다.
블랑쉬는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귀족주의를 향수하며 팍팍하며서도 인정이 넘치는 서민계급의 삶을 파괴하려는 무례한 침입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독자와 관객들은 가련한 블랑쉬를 연민한다. 무례한 침입자에게 한없는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도록 치밀하게 기획한 작가와 연출자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플라밍고가 아니라 터란튤라”라는 블랑쉬의 고백을 응시하라. ‘터란튤라’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거미줄이라고 상상한다면, 실마리가 잡히지 않겠는가. 공황panic은 불랑쉬 개인의 절망과 공포 이면에 1930년대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Great Depression’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공황의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업들은 재고를 처분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막힌 광고를 해야 하리라. 스탠리가 집요하게 블랑쉬의 과거를 추적하며 압박해오는 그 순간 뜨거운 욕조에서 애써 안정을 취하려는 블랑쉬가 노래한다.
“바넘Barnum과 베일리Bailey의 야바위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당신이 나를 믿어준다면 그것(당신이 믿는 것)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前漢時 始置樂浪郡 한漢나라 이전[前] 시대에 낙랑군을 설치하기 시작하였으니,
應邵曰 故朝鮮國也 응소 가로되 “조선으로 하여금[故] 일탈[或]을 포획[囗]하게 하였다.”
新唐書注云 ‘신당서新唐書’ 주注는 이렇게 말한다.
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 “평양성이 퇴락[古]하면 한漢은 낙랑군을 고풍[古]스럽게 하였다.”
國史云 ‘국사國史’는 이렇게 말한다.
赫居世三十年 “혁거세가 다 함께[十] 씨 뿌리기[年]를 거듭[三]하자
樂浪人來投又 낙랑 사람들은 ‘붕어빵[又]’을 업그레이드[來]하여 투사[投]하였으니
弟三弩禮王四年 제3대 노례왕弩禮王은 씨 뿌리기[年]를 포획[四=罒]하였다.
高麗第三無恤王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대무신왕)이
伐樂浪滅之 낙랑樂浪(국)을 토벌하여 멸망시키자
其國人與帶方(北帶方) 그 나라 사람들(최리와 낙랑공주)은 대방(북대방)에 들러붙어[與]
投于羅又 신라에 투사[投]되어 부활[又]하였다.
無恤王二十七年 무휼왕 27년에
光虎帝遣使伐樂浪 광호제(=광무제)가 사신을 보내어 낙랑樂浪(군)을 문책[伐]하고
取其地爲郡縣薩水 그 섬긴 자(대방)를 취하여 '군郡'으로 삼아 살수를 내걸었으니[縣]
以南屬漢 풍류[南]는 한漢을 임신[屬]하였다.”
{據上諸文 {이상 여러 글에 의거하면
樂浪卽平壤城宜矣 낙랑이 죽으면[卽] (요임금의)평양성은 부활[宜]하리라.
或云樂浪中頭山 혹자는 “낙랑이 '말갈을 경계[界]하라' 베풀면[下]
下靺鞨之界 중두산中頭山이 말갈(재물)을 멸시[下]함을 경계[界]하리니
薩水今大同江也 살수薩水가 대동강(화합의 강)으로 거듭[今]난다.”라고 하였으니,
未詳孰是} 어느 말이 옳은지 아직은 상고하지 못하였다.}
又百濟溫祚之言曰 붕어빵[又]이 백제에 주청[言]하매, 온조가 다시 비판하여 말하였다.
東有樂浪 “낙랑을 주인[東]으로 섬기면 백성들이 낙랑을 모방[有]하며
北有靺鞨 말갈을 배척[北]하므로 전하께서는 말갈을 소유[有]할 것입니다.”
則殆古漢時 "(그러면)백성은 일탈[殆]을 모방하여 漢의 씨뿌림을 진부화하리니
樂浪郡之屬縣之地也 낙랑군을 추모[屬]하여 섬김[地]을 분리[縣]하겠네."
新羅人亦以稱樂浪 신라인 역시 그렇게 하고자 낙랑을 칭송[稱]하였다.
故今本朝亦因之 고구려[故]가 부활[今]한 고려 역시 그것(섬김분리)를 기인하고자
而稱樂浪郡夫人 낙랑군부인 사칭[稱]을 유행[而]시켰으니
又太祖降女於金傅 다양화[又]하는 태조 왕건이 김부(경순왕)에게 딸을 하사[降]하면서
亦曰樂浪公主 역시 낙랑공주라 불렀다.
내용상 '낙랑국'편은 4단락으로 나뉜다. 1단락은 「후한서」와 「신당서」의 기록으로서 오늘날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이 치열하게 다투는 낙랑평양설과 낙랑요동설의 근거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樂浪郡故朝鮮國也 在遼東]"
재야사학은 「후한서」‘광무제본기’에 붙인 응소應邵의 주석을 이렇게 해석하여 낙랑요동설을 주장한다.
"평양성은 옛 한漢의 낙랑군이다.[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
강단사학은 「신당서」 주注를 이렇게 해석하여 낙랑평양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삼국유사 해석을 확인하고, 「후한서」와 「신당서」는 낙랑에 평양에 있었는지 요동에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하시라.
"낙랑군은 조선으로 하여금[故] 일탈[或]을 포획[囗]하게 하여 자아[東]를 외면[遙]하기를 꾀[在]하였다..[樂浪郡故朝鮮國也 在遙東]”
「한서지리지」의 "기자箕子가 조선에 가서 예禮와 의義를 가르친" 것이 낙랑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자아외면'이 낙랑의 사명이라는 점은 너무나 지당하리라.
“(중국의)평양성이 퇴락[古]하면 한漢은 낙랑군을 고풍[之=古]스럽게 하였다.[平壤城古 漢之樂浪郡也]"
도대체 「신당서」본문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기에 '주注'는 이런 말을 하는가?
“그 임금(주몽)이 (중국의)평양성을 거상[居]하면, 역亦은 장안성을 선포[謂]하여 한漢의 낙랑군을 독려[謂]하였다.[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
고구려의 주몽이 중화주의를 죽이면, 중화(亦 성인군자들의 entity)는 또 다른 중화의 깃털(장안성)을 개발하여 낙랑을 부활한다는 말이다. 이 한 문장으로 동북아역사의 구도가 '중화문명 vs 유화문'의 대결임을 짐작하리라.
고구려는 중화를 죽이고, 그러면 중화(亦)는 또 다른 공작새깃털을 부활한다. 그리하여 열심히 낙랑질하면 신라와 백제는 어찌하였을까?
2문단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이야기로 암시한다. 중화인들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절한 스토리를 창작하여 호동왕자의 忠과 낙랑공주의 절개[烈]를 선전한다. 대방-대방은 '프레임[帶]처방[方]'이다-이라는 이름의 낙랑인들은 호동과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에 '忠=孝=烈'사상을 담아 신라로 투사하여 낙랑공주를 부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백제 신라 사람들은 '忠=孝=烈'사상을 숭배하였을까? 온조왕의 비판을 보라. 우리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열렬히 애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忠 孝 烈'을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함으로써 진정한 '忠 孝 烈'의 나라를 만들 것이다. 온조는 어떻게 낙랑문화를 받아들이되 중화화되지 않는 방법을 착안할 수 있었을까? 다시 온조의 대답을 보라. "(낙랑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면)백성은 일탈[殆]을 모방하여[則殆]"라는 구절은 논어 '위정爲政' 제15장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를 시사한다. "주입[學]하되 추모[思]하지 않으면 복종[則]은 사라지고[罔] 추모[思]하되 주입[學]하지 않으면 일탈[殆]을 모방[則]한다." 중화를 부활하기 위해서는 충신 열녀 효자 죽음(과 추모)이 필요하고, 그 죽음들을 동일시하는 주입식교육이 필요하다. 만일 북쪽에서 들려오는 낙랑공주의 애틋한 죽음을 (충신의 죽음과 동일시하지 않고)추모하기만 한다면, 백성들은 사랑을 위하여 '아버지를 버리는' 일탈[殆]을 모방[則]하리라.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까마귀는 저속하다'라는 편견의 말씀을 생산해온 공작새깃털 '블랑쉬'를 파괴한다. 그러나 2천년 동안이나 중화의 낙랑질에 고전해온 유화문명인들은 '낙랑이라는 이름의 마차'를 거부하지 않았다. 중화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찬란한 문화(그릇)에다가 유화문명의 씨앗을 뿌리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비(6~17화)'에서 밝혔듯이, 언제부터인가 백제 신라의 지배자들은 중화주의에 편승하기 시작하였으니, 광개토왕은 다시 유화문명으로 돌아오라고 백제신라를 정벌하였음을 독자들은 기억하리라.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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