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낙랑국: 낙랑이라는 이름의 마차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舟車所至 霜露所墜]’ 그런 곳이라면 어디든 (낙랑의)수레가 이르렀으리라.”(열하일기 '수레제도'에서)

 

‘낙랑樂浪’의 정체는 중화라는 공작새깃털을 선전하는 예배당이었으니(1화~제3화 참조), 무용총수렵도(제5화)에 그려진 '성인의 수레'가 다름 아닌 낙랑이다. '낙랑'은 일찍이 기자시대로부터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2천년 역사의 키워드였으니, 연암은 「중용中庸」의 한 구절[舟車所至 霜露所墜]을 빌어 낙랑의 '정체'를 암시한다. ‘낙랑이라는 이름의 마차’이야기에 앞서 20세기 최고의 걸작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를 보자.

미국 남부의 몰락한 대지주의 딸 ‘블랑쉬 뒤보아Blanche Dubois’가 뉴올리언스에 사는 동생 스텔라Stella를 찾아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을 지나 ‘낙원’이라는 이름의 역에서 내리라는 메모를 들고서.

블랑쉬Blanche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의 공작새인간, 아테네 신전 같은 하얀 기둥이 우뚝 세워진 ‘벨 리브Belle Reve’의 대저택에서 자라난 공주님이다. 그러나 남부의 지주계급이 추락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급격히 가문이 몰락하는 가운데, 어린 시절 결혼한 남편마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노출되어)자살하자 블랑쉬는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하여 로오렐Laurel의 한 호텔에서 낯선 남자들strange men과 잠자리intimacy를 함께 한다. 공황panic으로부터의 방어기재를 찾아 이 남자 저 남자를 사냥hunting하다가 결국 17세 소년을 사냥한 일이 발각되어 로오렐에서 추방되어 뉴올리언스를 찾아온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찾아온 동생 집에서 가련한 여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장면1. 오랜만에 마주앉은 블랑쉬(왼쪽)와 스텔라.

오랜만에 만난 남매의 대화를 보라.

블랑쉬: 오, 스텔라! 이제 너를 보자꾸나. 하지만 난 보지 말아. 스텔라, 안 돼! 목욕하고 좀 쉬고 난 다음까지는 말야. 그리고 저 천정의 불을 꺼 주렴. 이 무자비한 불빛 아래서는 보여주지 않을 거야. 오, 얘야! 별을 닮은 스텔라! 난 네가 이런 형편없는 곳에 다시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단다. 아차, 내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지?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참 위치도 좋고.

…중략…

블랑쉬: 농담은 그만하고 진지하게 얘기하자꾸나. 왜 내게 말하지 않았니? 왜 편지에 쓰지 않았어?

스텔라: 무슨 얘기를 말야, 언니?

블랑쉬: 물론 이런 곳에서 이런 상태로 살아야 하는 이유 말이다.

스텔라: 좀 심한 거 아냐? 이곳은 그렇게 형편없는 곳이 아니란 말야!

블랑쉬는 여전히 ‘벨 리브Belle Reve’의 대저택에서 살던 시절의 귀족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부족하나마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폄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스텔라는 가련한 언니를 따뜻하게 받아들이지만, 그녀의 남편 스탠리Stanley는 어찌하겠는가. 작가가 묘사한 스탠리의 캐릭터를 보라.

스탠리가 부엌의 천으로 된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온다. 키는 보통이지만 건강하며 단단한 체구를 지닌 그는 몸짓과 동작 하나하나에 동물적인 환희가 베어있다. 막 성년이 될 때부터 그의 삶의 줄기는 여성들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것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얻는 허약한 만족이 아니라 암탉들에게 둘러싸여 멋진 깃털을 과시하는 수탉과 같은 힘과 긍지를 갖고서, 상스런 농지거리를 뱉으며 맛있는 술과 음식, 노름, 자가용 승용차와 라디오를 즐기면서, 원초적인 생식기능 보유자로서의 심벌을 과시한다.

공작새(블랑쉬)와 까마귀(스탠리)의 충돌은 피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솝우화의 ‘우월한 공작새 vs 모자란 까마귀’의 구도는 아니라는 점을 작가는 “멋진 깃털을 지닌 수탉과 같은 힘과 긍지”로 암시하고 있다.

▲ 장면2. 스텐리가 블랑쉬의 가방에 든 귀부인들의 악세서리들을 들추어보이며 "당신은 이런 거 하나도 없잖아"라며 블랑쉬의 분에 넘치는 사치를 비난한다.

 ‘우아한 공작새 vs 멋진 까마귀’의 대결. 그 싸음에서 승리한다면 블랑쉬는 행복하리라. 어떻게? 다름 아닌 미첼-애칭 미치Mitch-이라는 스탠리의 친구를 새로운 연인으로 얻게 될 테니 말이다.

▲ 장면3. 목욕을 마친 블랑쉬가 스탠리에게 드레스 등에 달린 단추를 잠가달라고 부탁하자 스탠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친절하게 도와준다. 블랑쉬는 귀족의 취향을 한껏 과시하지만, 그런 취향 따위에 관심없는 스탠리는 집문서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스탠리의 집에서 친구들과 포커를 치던 미치Mitch는 블랑쉬를 만나고, 첫눈에 반한 남녀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에 맞추어 함께 왈츠를 춘다. 그러나 술기운이 오른 스탠리가 다가와 라디오를 집어던져 버렸으니 포커판도 춤판도 끝장나버리고, 스텔라는 난폭한 남편을 피하여 2층에 사는 유니스와 스티브 부부의 집으로 피신한다. 인사불성이 된 스탠리는 “귀여운 마누라가 날 떠났군!”하더니 2층을 향하여 ‘스텔라~ 스텔라~’ 고래고래 소리친다. “잠시 후 잠겨 있던 2층 문이 다시 열리고 스텔라가 가운을 입은 채로 삐걱거리는 층계를 내려온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반짝이고 머리카락은 목덜미와 어깨로 늘어져 있다. 남녀는 서로 응시하다가 나직하게 짐승처럼 흐느끼더니, 남자는 층계에 무릎을 꿇고 임신한 아내의 배에 얼굴을 파묻는다. 여자가 부드러운 눈으로 남자의 머리를 감싸 올리자, 남자는 휘장을 획 열어젖혀 여자를 안아들고는 침실로 들어간다.”

▲ 장면4. 처음 만나 한눈에 반한 '미치Mitch'와 블랑쉬(가운데
▲ 장면5. 블랑쉬와 미치가 라디오 음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자 스탠리가 라디오를 박살낸다.
▲ 장면6.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 스탠리는 2층에 피신했던 스텔라를 안고 침실로 향한다

동생 부부의 기묘한 성생활(폭력+섹스)을 목도한 블랑쉬는 다음 날 스텔라에게 이런 천박한 생활에서 탈출하라고 추궁하지만, 스텔라는 “난 어쩐지 스릴을 느꼈어.”라며 언니의 충고를 외면한다.

공작새(블랑쉬)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이번에는 까마귀(스탠리)가 공격할 차례. 스탠리는 로오렐을 들락거리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블랑쉬의 은밀한 과거를 추적하고는 미치Mitch에게 고자질한다. 마음이 돌아선 미치Mitch가 과거를 추궁하고, 블랑쉬가 고백한다.

미치: 플라밍고라호텔에 묵지 않았단 말이오?

블랑쉬: 플라밍고? 아니에요. 그곳의 이름은 터런튤라Tarantula에요. ‘커다란 거미’라는 뜻이죠. 그곳이 내가 제물들을 끌어들인 곳이에요. 그래요. 낯선 사람들strange men과 많은 관계intimacy를 가졌어요. 앨란(남편)이 죽은 후 낯선 사람들하고의 관계만이 나의 텅 빈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어요.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을 전전하면서 어떤 보호를 받으려는 것은 공황panic, 바로 공황panic이었어요. 여기 저기 전전하다가 마침내 생각할 수조차 없는 곳, 바로 17살 소년에게까지 미쳤을 때, 누군가 슈퍼관찰자super-intendent에게 투고하였죠. 이 여자는 도덕적으로 그녀의 지위에 적합하지 않다고.

.....중략.....

(미치가 블랑쉬의 허리에 손을 갖다대고는 그녀를 돌려세우려 한다.)

블랑쉬: 왜 이러시는 거죠?

미치: (그녀를 껴안으려고 하면서) 여름 내내 하고 싶었던 것을 하려고.

블랑쉬: 그렇다면 나하고 결혼해요, 미치!]

미치: 이젠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졌소.

한 때 블랑쉬가 기대했던 구원의 남자는 이제 섹스만을 원할 뿐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스텔라가 출산을 위해서 병원에 입원한 날 밤, 스탠리는 더 이상 의지할 곳 없는 블랑쉬를 강간하고, 그 충격으로 산산이 부서져버린 가녀린 블랑쉬는 정신병원으로 실려 간다.

▲ 장면7. 블랑쉬를 강간하는 스탠리. 블랑쉬는 병을 깨들고 저항하지만 스탠리는 우악스런 손으로 블랑쉬의 가녀린 손목을 나꿔챈다

블랑쉬는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귀족주의를 향수하며 팍팍하며서도 인정이 넘치는 서민계급의 삶을 파괴하려는 무례한 침입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독자와 관객들은 가련한 블랑쉬를 연민한다. 무례한 침입자에게 한없는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도록 치밀하게 기획한 작가와 연출자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플라밍고가 아니라 터란튤라”라는 블랑쉬의 고백을 응시하라. ‘터란튤라’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거미줄이라고 상상한다면, 실마리가 잡히지 않겠는가. 공황panic은 불랑쉬 개인의 절망과 공포 이면에 1930년대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Great Depression’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공황의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업들은 재고를 처분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막힌 광고를 해야 하리라. 스탠리가 집요하게 블랑쉬의 과거를 추적하며 압박해오는 그 순간 뜨거운 욕조에서 애써 안정을 취하려는 블랑쉬가 노래한다.

“바넘Barnum과 베일리Bailey의 야바위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당신이 나를 믿어준다면 그것(당신이 믿는 것)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제30화에 인용한 제임스 트위첼의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를 환기하시라. 중세시대까지 예술이 교회와 결합하여 성경을 광고하였다면, 산업시대가 도래하자 광고쟁이 예술은 자본과 결합하여 상품을 광고한다. 바넘Barnum(1810~1891)은 미국 광고업계의 전설로서 최근에는 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바넘 위대한 쇼맨>이라는 뮤지컬이 유행하고 있다. 바넘이 청바지 광고를 하면 ‘청바지는 아름답다’라는 神의 말씀을 창조하리라. 그렇게 탄생한 청바지를 주워 입은 까마귀(스탠리)는 감히 공작새(블랑쉬)의 우아함에 대항한다. 그렇지만 당신(스텔라 미치 등)이 블랑쉬를 믿어준다면 ‘신사복은 우아하다’라는말씀을 부활하여 청바지를 전복하리라. 그러니 도대체 블랑쉬의 정체가 무엇이겠는가? 다름 아닌 <타이타닉>에서 자본가에게 팔려가는 여신 ‘로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봉건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몰락한 지주계급old money의 여신은 신진 상업자본가new money에게 포획되었으니, <타이타닉>의 영웅 잭 도슨은 팔려가는 여신을 구출한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쉬라는 여신은 이미 자본에 포획되어 터란튤라라는 이름의 네트웍에 부역한 마당이다. 그녀가 물려받은 '고색antique'이라는 찬란한 유산(예술)을 과시하며 '차별화strange하는 사람들men'과 결합intimacy함으로써 말이다. 그런데 터란튤라라는 이름의 네트웍은 왜 그녀를 축출하였을까? '고색antique'의 가치가 소진-대저택을 잃어버림-되어 더 이상 소비자들을 유혹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기업들은 이제 '고색antique'마케팅을 버리고 바넘Barnum의 야바위마케팅에 주력할 것이니, 제30장에서 인용한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의 결합마케팅 이야기에 이어지는 귀족(고색)마케팅을 보시라.
영국에서는 앤드루 페어스Andrew Pears가 독특한 비누를 개발하였다. 비누는 반투명이었고, 그래서 이미 "깨끗한" 것처럼 보였다. 페어스는 이 비누를 피부색을 뽀얗게 만들고 싶어하는, 그래서 자신을 햇볕 아래서 일하는 대중들과 구별짓고 싶어하는 영국 상류계층의 욕구를 향하여 포지셔닝하였다.
마케팅의 대세가 '고색'에서 '야바위'로 옮아가자 블랑쉬는 다시 의지할 곳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쯤이면 블랑쉬는 '부역자로서의 과거'를 각성하지 않았을까?
블랑쉬가 동성애자인 남편의 자살을 고백하며 아직 짝이 없는 외로운 애인(미치)의 동정을 구하는 장면을 보자.
블랑쉬: 엄마가 돌아가시면 외로우시겠군요.(미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저도 알지요.
미치: 외롭다는 거 말입니까?
블랑쉬: 저 역시 누군가를 사랑했어요. 그리고 사랑했던 그 사람을 나는 잃었지요.
미치: 죽었나요? (블랑쉬에게 술을 따르며) 남자였습니까?
블랑쉬: 소년이었어요. 단지 소년이었죠. 제가 어린 소녀던 열 여섯살 때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완벽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늘 반쯤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것들에 대해서 갑자기 눈이 멀 정도의 강렬한 빛이 켜지는 것 같았죠. 그런 식으로 나의 세계를 강타했어요. 하지만 저는 운이 없었답니다. 착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소년에게는 뭔가 다른 게 있었어요. 남자답지 않은 소심 연약함 다정함이랄까. 비록 사내답지 않은 점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런데도 뭔가가 있었어요. 그는 도움을 청하고자 나에게 온 것이랍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죠. 함께 도망쳤다가 돌아와서 결혼을 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가 알아낸 것이라곤 그를 어떤 신비한 길로 이끄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과 그에게 필요하지만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서 나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끌어당기지 못하고 함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았죠. 나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를 돕지도 나를 구원하지도 못하면서 참을 수 없이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 뿐. 그런데 알게 되었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홀연히 내가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은 빈 방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 방에 있었지요. 제가 결혼한 소년, 그리고 수년 동안 그의 친구였던 늙은 남자가....
 
블랑쉬에게 동성애 사실을 발각당한 그 소년(Allan)은 결국 입에 권총을 쏘아 자살한다.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블랑쉬가 매춘하던 곳이 플라밍고 호텔이 아니라 터란튤라 호텔임을 생각하라. 마찬가지로 블랑쉬는 사랑했던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단지 '소년boy'이라고 강조한다. 마지막 '늙은 남자older man'와는 달리 말이다. 터란튤라의 블랑쉬가 '고색antique'이라는 찬란한 유산(예술)을 과시하며 '차별화strange하는 사람들men'과 결합intimacy하였다면, 그 이전에 블랑쉬는 '소년boy'과 결합함으로써 '늙은 남자older man'에게 부역하였으리라. 소년은 '아들(왕)'이며 늙은 남자는 왕에게 권위를 부여(책봉)하는 '아버지(하느님)'일 것이니, 근대이전까지 하느님에 부역하던 블랑쉬는 근대로 접어들자 '자본'이라는 이름의 神과 결합하였다는 말이다. 블랑쉬가 과시적 소비의 화신이라는 점을 감안하건대, 작가는 필시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절대왕정을 상상하였으리라. 현란한 소비를 바탕으로 무너져가는 신성한 왕의 권위를 일으켜세워 왕권신수설의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던 루이14세를 말이다. 앤란의 권총자살은 프랑스대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루이16세를 상징한다. 부르봉왕가의 시조인 앙리4세가 위그노(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칼뱅파)의 수장이었으니, 작가는 진정한 변혁의 길로 가고자 잠시 카톨릭과 제휴하고는 과시적 소비의 힘을 빌려 왕권을 강화하다가 끝내 헤어나오지 못한 채 루이16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부르봉왕가를 연민한다.
▲ 프랑스대혁명. 드라크루아 작
  '동성애'의 중의법을 생각하라. 첫째 의미는 물론 당시로서는 '변태'로 인식되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침하는 금지된 사랑이다. 둘째 의미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왕)의 은밀한 야합이다. 그들의 은밀한 야합은 '텅 비움empty은 아름답다'라는 희한한 미의식을 낳았으니, 그것은 죽음을 초월하는 그럼으로써 물질(육체)을 비하하는 공작새 우월주의가 아니었던가. 그 비하의 대상에는 '동성애'라는 천박한 욕망도 포함되었으니,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왕)의 근친동성애로 탄생한 공작새법도(대전제)는 소전제인간들의 동성애에 돌을 던지며 앨란을 죽음으로 내몰았지 않은가.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구사한 '섹스의 중의법'을 환기하시라. 거트루드왕비와 클로디어스왕의 야합(간통)으로 탄생한 신성한 법도는 과부의 재혼을 금기하였으니, 그 법도에 포획당한 햄릿은 재혼한 어머니(거트루드)에게 '더러운 화냥년'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셰익스피어가 '섹스의 중의법'으로 중세의 모순을 폭로하였다면, 테네시 윌리엄스는 '동성애의 중의법'으로 중세로 회귀하였던 루이14의 모순을 폭로한 것이다.
다시 '터런튤라Tarantula'의 시대를 보자. 결혼의 파경을 겪은 블랑쉬는 텅 빈 가슴을 채우고자 '낯선 사람들strange men'과 많은 관계intimacy를 가진다.(그것을 '매춘'이라고 하였지만 단지 '문란한 성행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문란한 성행위가 소전제인간의 사생활이라면, 그 이면에 '차별화strange하는 기업가들men'과 야합intimacy하여 사람들에게 '텅 비움은 아름답다'라는 봉건적 가치를 주입하였으니 '섹스intimacy는 불결하다'라는 대전제를 탄생하고 있지 않은가.
 
블랑쉬가 각성하였어야 할 '부역자로서의 과거'를 작가는 두 개의 중의법, 동성애의 중의법과 섹스intimacy의 중의법으로 묘사하였다. 과시적 소비의 여신으로서 블랑쉬의 행위를 과오라고 한다면, 우리는 또한 한낱 가녀린 여인으로서 블랑쉬의 아픔을 이해해야 하리라. '동성애는 추악하다'라는 왜곡된 대전제가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고, '섹스는 불결하다'라는 편견의 대전제가 불랑쉬를 로오렐에서 추방한 마당이다.
그렇다면 지금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지는 까마귀(스탠리)와 공작새(블랑쉬)의 전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로오렐에서 추방된 블랑쉬는 의지할 곳을 찾아 뉴올리언스로 향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메이저리그에서 마이너리그로 추락한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위(왕, 기업)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기대하고 있으리라.
 
블랑쉬는 사사건건 진부한 공작새깃털을 자랑하며 까마귀인간들의 소박한 삶을 폄하한다. 간혹 백마를 타고 올 왕자-큰 돈을 벌고 나타날 대학친구 쉡 헌틀레이-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런 무례한 침입자에게 단호하게 맞서는 까마귀(스탠리)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야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가련한 블랑쉬를 연민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대혁명으로 귀족의 권력은 상놈들에게 넘어갔다. 권력을 틀어쥔 자본가들은 한동안 귀족old money의 유산인 '고색antique'을 포획하여 지배하더니, 나중에는 야바위꾼들이 '청바지' 같은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하여 '고색antique'을 대체한 마당이다. 그 새로운 브랜드들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뉴올리언스와 같은 마이너리그에까지 밀려들고 있으니, 스탠리라는 이름의 까마귀는 잽싸게 '멋진 까마귀깃털'을 채용하여 작은 왕국(마이너리그)의 지배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탠리의 입장에서 보면, 블랑쉬를 무너뜨려야만 작은 왕국을 지배하리라. 그러고보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온 욕망은 다름 아닌 '지배욕망'이며, 양립할 수 없는 두 지배자 스탠리와 블랑쉬는 숙명적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과연 충돌할 수밖에 없었겠는가? 길은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이미 조화를 이루어가는 스탠리와 스텔라의 사랑을 바로보라. 게다가 블랑쉬와 미치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뉴올리언스는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상승하지 않겠는가. 스탠리가 고집하는 까마귀깃털은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왜 혁명을 일으켜 당당한 까마귀들의 시대를 열었던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건설하고자 함이 아니던가. 그 '더불어'는 '공작새는 아름답다'라는 편견을 버리는 과업이었으니, 이제 승리를 거머쥔 까마귀는 '까마귀는 아름답다'라는 편견을 버려야 하리라. 관용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과거에 '텅 비움'을 우상화했던 공작새깃털을 혁신하여 진정한 영혼을 담아내는 공작새깃털을 창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인공들은 브레이크없는 전차처럼 충돌을 향하여 달린다. 블랑쉬는 여전히 공작새깃털을 자랑한다. 스탠리는 까마귀깃털을 사수하고자 블랑쉬를 공격하지만, 그 공격의 명분은 '불결한 섹스'였으니 도리어 진부한 공작새깃털을 강화하고 있지 않은가. 한때 블랑쉬가 구원의 남자라 여겼던 미치Mitch는 섹스하고 싶지만 결혼할 수 없는 '불결한 여자'라며 등을 돌렸으니, 블랑쉬가 만들어놓은 '텅 비움'의 미학은 그렇게도 굳건한 것인가. 그래서 작가는 끝내 블랑쉬를 구원하지 않았으리라. 과거를 청산하고 제로베이스에서 철학과 문화를 새롭게 시작하자고 말이다.
 
이쯤에서 시선을 돌려보자. 루이14세(1638~1715)가 화려한 공작새문화를 자랑하며 절대왕정으로 복고하던 시기 조선의 영조(1694~1776) 및 정조(1752~1800)는 비슷한 방법으로 유교적 통치이념을 강화해나간다. 굶주린 프랑스백성들이 대혁명을 일으킬 때 헐벗은 조선민중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도 흡사하다. 다만 프랑스가 유럽대륙을 휩쓰는 혁명의 분위기에서 대혁명의 역사를 썼다면, 우리는 홀로 고독한 투쟁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두가 분연히 일어섰을 때는 너무나 늦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프랑스혁명에 못지 않은 위대한 동학혁명을 기억하리라. 문제는 역사학이다. 학자들은 동학을 자랑하지만 입발림에 불과할 뿐 열정이 없다. 게다가 동학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의 복고'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거꾸로 가르치지 않던가.
엉터리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까마득히 묻혀버린 우리 민족의 고대사 삼국유사 '낙랑국'편을 읽어보자.

 

前漢時 始置樂浪郡   한漢나라 이전[前] 시대에 낙랑군을 설치하기 시작하였으니,

應邵曰 故朝鮮國也   응소 가로되 “조선으로 하여금[故] 일탈[或]을 포획[囗]하게 하였다.”

新唐書注云          ‘신당서新唐書’ 주注는 이렇게 말한다.

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 “평양성이 퇴락[古]하면 한漢은 낙랑군을 고풍[古]스럽게 하였다.”

 

國史云             ‘국사國史’는 이렇게 말한다.

赫居世三十年       “혁거세가 다 함께[十] 씨 뿌리기[年]를 거듭[三]하자

樂浪人來投又       낙랑 사람들은 ‘붕어빵[又]’을 업그레이드[來]하여 투사[投]하였으니

弟三弩禮王四年     제3대 노례왕弩禮王은 씨 뿌리기[年]를 포획[四=罒]하였다.

高麗第三無恤王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대무신왕)이

伐樂浪滅之         낙랑樂浪(국)을 토벌하여 멸망시키자

其國人與帶方(北帶方) 그 나라 사람들(최리와 낙랑공주)은 대방(북대방)에 들러붙어[與]

投于羅又           신라에 투사[投]되어 부활[又]하였다.

無恤王二十七年      무휼왕 27년에

光虎帝遣使伐樂浪    광호제(=광무제)가 사신을 보내어 낙랑樂浪(군)을 문책[伐]하고

取其地爲郡縣薩水    그 섬긴 자(대방)를 취하여 '군郡'으로 삼아 살수를 내걸었으니[縣]

以南屬漢            풍류[南]는 한漢을 임신[屬]하였다.”

 

{據上諸文           {이상 여러 글에 의거하면

樂浪卽平壤城宜矣    낙랑이 죽으면[卽] (요임금의)평양성은 부활[宜]하리라.

或云樂浪中頭山      혹자는 “낙랑이 '말갈을 경계[界]하라' 베풀면[下]

下靺鞨之界          중두산中頭山이 말갈(재물)을 멸시[下]함을 경계[界]하리니

薩水今大同江也      살수薩水가 대동강(화합의 강)으로 거듭[今]난다.”라고 하였으니,

未詳孰是}           어느 말이 옳은지 아직은 상고하지 못하였다.}

 

又百濟溫祚之言曰    붕어빵[又]이 백제에 주청[言]하매, 온조가 다시 비판하여 말하였다.

東有樂浪            “낙랑을 주인[東]으로 섬기면 백성들이 낙랑을 모방[有]하며

北有靺鞨            말갈을 배척[北]하므로 전하께서는 말갈을 소유[有]할 것입니다.”

則殆古漢時          "(그러면)백성은 일탈[殆]을 모방하여 漢의 씨뿌림을 진부화하리니

樂浪郡之屬縣之地也   낙랑군을 추모[屬]하여 섬김[地]을 분리[縣]하겠네."

新羅人亦以稱樂浪     신라인 역시 그렇게 하고자 낙랑을 칭송[稱]하였다.

故今本朝亦因之      고구려[故]가 부활[今]한 고려 역시 그것(섬김분리)를 기인하고자

而稱樂浪郡夫人      낙랑군부인 사칭[稱]을 유행[而]시켰으니

又太祖降女於金傅    다양화[又]하는 태조 왕건이 김부(경순왕)에게 딸을 하사[降]하면서

亦曰樂浪公主        역시 낙랑공주라 불렀다.

 

내용상 '낙랑국'편은 4단락으로 나뉜다. 1단락은 「후한서」와 「신당서」의 기록으로서 오늘날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이 치열하게 다투는 낙랑평양설과 낙랑요동설의 근거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樂浪郡故朝鮮國也 在遼東]"

재야사학은 「후한서」‘광무제본기’에 붙인 응소應邵의 주석을 이렇게 해석하여 낙랑요동설을 주장한다.

"평양성은 옛 한漢의 낙랑군이다.[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

강단사학은 「신당서」 주注를 이렇게 해석하여 낙랑평양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삼국유사 해석을 확인하고, 「후한서」와 「신당서」는 낙랑에 평양에 있었는지 요동에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하시라.

"낙랑군은 조선으로 하여금[故] 일탈[或]을 포획[囗]하게 하여 자아[東]를 외면[遙]하기를 꾀[在]하였다..[樂浪郡故朝鮮國也 在遙東]”

「한서지리지」의 "기자箕子가 조선에 가서 예禮와 의義를 가르친" 것이 낙랑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자아외면'이 낙랑의 사명이라는 점은 너무나 지당하리라.

“(중국의)평양성이 퇴락[古]하면 한漢은 낙랑군을 고풍[之=古]스럽게 하였다.[平壤城古 漢之樂浪郡也]"

도대체  「신당서」본문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기에 '주注'는 이런 말을 하는가?

“그 임금(주몽)이 (중국의)평양성을 거상[居]하면, 역亦은 장안성을 선포[謂]하여 한漢의 낙랑군을 독려[謂]하였다.[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

고구려의 주몽이 중화주의를 죽이면, 중화(亦 성인군자들의 entity)는 또 다른 중화의 깃털(장안성)을 개발하여 낙랑을 부활한다는 말이다. 이 한 문장으로 동북아역사의 구도가 '중화문명 vs 유화문'의 대결임을 짐작하리라.

고구려는 중화를 죽이고, 그러면 중화(亦)는 또 다른 공작새깃털을 부활한다. 그리하여 열심히 낙랑질하면 신라와 백제는 어찌하였을까?

2문단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이야기로 암시한다. 중화인들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절한 스토리를 창작하여 호동왕자의 忠과 낙랑공주의 절개[烈]를 선전한다. 대방-대방은 '프레임[帶]처방[方]'이다-이라는 이름의 낙랑인들은 호동과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에 '忠=孝=烈'사상을 담아 신라로 투사하여 낙랑공주를 부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백제 신라 사람들은 '忠=孝=烈'사상을 숭배하였을까? 온조왕의 비판을 보라. 우리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열렬히 애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忠 孝 烈'을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함으로써 진정한 '忠 孝 烈'의 나라를 만들 것이다. 온조는 어떻게 낙랑문화를 받아들이되 중화화되지 않는 방법을 착안할 수 있었을까? 다시 온조의 대답을 보라. "(낙랑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면)백성은 일탈[殆]을 모방하여[則殆]"라는 구절은 논어 '위정爲政' 제15장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를 시사한다. "주입[學]하되 추모[思]하지 않으면 복종[則]은 사라지고[罔] 추모[思]하되 주입[學]하지 않으면 일탈[殆]을 모방[則]한다." 중화를 부활하기 위해서는 충신 열녀 효자 죽음(과 추모)이 필요하고, 그 죽음들을 동일시하는 주입식교육이 필요하다. 만일 북쪽에서 들려오는 낙랑공주의 애틋한 죽음을 (충신의 죽음과 동일시하지 않고)추모하기만 한다면, 백성들은 사랑을 위하여 '아버지를 버리는' 일탈[殆]을 모방[則]하리라.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까마귀는 저속하다'라는 편견의 말씀을 생산해온 공작새깃털 '블랑쉬'를 파괴한다. 그러나 2천년 동안이나 중화의 낙랑질에 고전해온 유화문명인들은 '낙랑이라는 이름의 마차'를 거부하지 않았다. 중화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찬란한 문화(그릇)에다가 유화문명의 씨앗을 뿌리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비(6~17화)'에서 밝혔듯이, 언제부터인가 백제 신라의 지배자들은 중화주의에 편승하기 시작하였으니, 광개토왕은 다시 유화문명으로 돌아오라고 백제신라를 정벌하였음을 독자들은 기억하리라.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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