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여수음악제

여수, 돌아서면 그리운 도시

---제2회 여수음악제

2018년 8월 30일부터 9월 2일까지 제2회 여수음악제(주최/여수시, 여수상공회의소)가 열렸다.

9월 1일 아침, 경주와 포항에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여수로 음악기행을 떠났다. ‘그란데 보체’와 ‘KBS교향악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 여수 서시장에서 두 번 놀라다.

여수에 도착해 공연까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여수의 시장부터 둘러보았다. 중앙시장을 찾다가, 눈에 뜨인 서시장을 둘러보게 되었다. 여행지 시민들의 삶을 들여다 볼 기회는 시장이 가장 적합하다.

우리가 놀라 입이 딱 벌어진 건 어마어마한 크기의 열무 단이었다. 마트에서 한 줌씩 묶어 파는 열무의 양으로 치면 족히 8단 돼 보이는 한 아름이었다. 그리고 뿌리도 흔히 보던 열무와 달랐다. 아마 토양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았다. 김치 담그기를 즐기는 나는 여수의 열무김치는 어떤 맛일까 자못 궁금했다.

멋진 음식이야 전국에 허다하니 우리는 시장에서 평범한 여수사람들의 한 끼를 맛보기로 했다. 서시장의 식당들은 온통 돼지고기 전문점이었다. 우리들은 육류를 썩 즐기지 않은 편이라 돌아 나오다 생경한 풍경에 발길이 잡혔다.

▲ 아름다운 주차장

어느 자그만 주차장이었다. 누구나 주차라는 편이성 장소에 무관심하기 마련이다. 역시 남도의 예술적 감성은 한갓 주차장에도 꽃을 심어 가꾸고, 그림을 걸어두는 정성을 들였다. 놀라운 발상이며, 기억에 남는 예쁜 장면이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이미 낭만도시 여수에 젖기 시작했다.

▲ 아름다운 주차장

 

◆넉넉한 밥상에는 바다향기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간 돌게장과 생선구이 전문점은 맛도 값도 그지없이 착했다. ‘역시 남도’, ‘역시 여수’라는 감탄이 나왔다. 밥그릇 뚜껑을 열며 너무 많은 양에 남길 걱정을 했으나 기우였다. 과식의 포만감은 오래가지 않아 상큼하니 좋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박하면서 넉넉한 밥상이 눈에 아른거린다.

 

◆침대에 누우면 바다가 팔베개를 해주고...

맛난 식사로 기분이 무척 좋아진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 호텔 창 밖

내가 오래전 여수여행을 하며 묵었던 장소였지만 개축된 아담한 호텔이었다. 사진은 늘 현실보다 과장되어 턱없는 실망을 주기도 한다. 가는 동안 나는 은근히 걱정을 했다. 깔끔병을 앓는 내가 고르고 고른 숙소인데 행여나 지저분하면 낭패다. 기절할 정도로 비위생적인 서울 특급호텔의 청소방법 등을 매스컴에서 본 이후 나의 의심병은 깊어졌다. 이 또한 기우였다. 침대와 창문의 높이가 적절해서 바다와 동침하는 기분으로 아주 특별한 밤이었다.

▲ 호텔 창 밖

가격대비한 스위트룸답지 않게 쾌적했다. 적절한 크기의 실내와 침대 시트의 청소상태는 아주 청결했다.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날씨가 흐려 여수 특유의 비취색 바다는 아니었지만 일행은 아주 만족했다.

▲ 경주에서 준비해 가져간 다기

먹고 자는 게 편안하면 그 여행은 이미 성공적인 추억이다.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여수가 사랑스러워졌다. 바닷가 웅천공원에서 음악공연 관람티켓을 배부 받은 뒤, 해변산책을 했다. 우리들의 흥겨운 시간 사이로 겹겹 우정이 쌓였다.

 

◆ 탄성과 환희, ‘그란데 보체(GRANDE VOCE, 테너 조민웅, 베이스 김동현, 스핀토 테너 안세권)’와 KBS교향악단

▲ 좌측부터 김동현, 안세권, 조민웅

▲ 예울마루 앞 광장

저녁 8시 30분, 밤바다를 향한 아름다운 건물 <예울마루> 대공연장은 꽉 찼다. 애초 웅천해변의 친수공원에서 야외공연을 하기로 했으나 궂은 날씨에 장소가 변경되었다. 출발 이틀 전부터 집중호우 등으로 걱정이 된 나는 여수시청 문화예술과에 연락을 했다.

황정혜 주무관은 여느 공무원들의 건조한 답변과 다른, 애틋한 정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낯선 관계의 통화로 우호적인 친근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이 분이 참 반듯하고 성실하리라는 신뢰를 가졌다. 출발 전부터 고마운 이 분으로 인해 여수여행이 더욱 설레었다.

▲ 여수시청 문화예술과 황정혜 주무관님

올 봄에 ‘그란데 보체’ 서울공연에서 워낙 탁월한 음악성을 보았던 나는 다시 한 번 그 전율을 느끼고 싶었다. 무엇보다 20여 년이 된 지인들과 그 웅장한 환희의 시간을 함께 느끼고 싶었다.

 

 

마치 정찬의 애피타이저처럼 KBS교향악단의 연주가 먼저 시작되었다. “슈트라우스 2세 / 오페레타 <박쥐> 서곡” 윤현진(2017년∼) 현 KBS관현악단 부지휘자는 훌륭했다. 젊고 날렵한 그의 섬세한 지휘는 관객의 시선과 청각을 전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 세포조직 모두가 음표로 채워진 것 같았다. 이 멋진 지휘자의 식탁에서 음감의 미각은 이미 충만을 맛 볼 준비를 단단히 했다.

다음은 그란데 보체의 “뢰블란 / 유 레이즈 미 업"이 온화하고 다감하게 불려졌다.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어깨에 얹힌다. 누군가 나의 어깨에 기댈 수 있는 위무의 소통, 위로가 주는 평화는 소중해서 감미롭다.

드디어 나와 지인들이 기다리던 테너 조민웅의 등장. 전국에서 몰려 온 그의 팬들은 순식간에 공연장을 휘젓는 환성을 질렀다. JTBC 팬텀싱어2에서부터 그의 대표음악이 된 “차이콥스키 /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중 ‘내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

▲ 테너 조민웅

이 노래는 심상(心想)의 어느 한 곳을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한편 둔탁하게 길고 긴 여운을 남겨서 묘하다. 슬픈 듯 웅장하고, 처절한 듯 담담히 체념하게 만드는 회한의 노래다. 백 번도 더 들었건만 라이브가 주는 생생한 음악은 갓 뽑아 올린 무처럼 싱싱했다. 수분을 듬뿍 받아들여 잘 자란 무의 식감처럼 음색은 촉촉하고, 작위적인 창법의 기교가 없어 거침없이 시원하다. 아주 낯설고도 탁월한 그의 음악은 무시무시한 중독성을 지녔다.

베이스 바리톤 김동현의 “별 헤는 밤(윤동주 시)”은 조민웅의 출현으로 복사열처럼 치솟았던 불길을 달래듯, 고요하게 공연장을 헤아렸다. 누구라도 좋아할 시에 김동현의 아름다운 저음은 가슴에서 별까지 탄탄한 사다리를 놓듯 이어졌다. 독일 마인츠 국립음악대학에서 공부한 김동현은 독일 비스바덴 모차르트 <레퀴엠> 베이스 솔리스트를 맡았던 짱짱한 실력가다. 배우보다 더 배우같은 김동현은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 최고의 꽃남일 것이다.

김동현이 불러준 감성의 서정에 나긋이 맘이 젖고 나자, 작은 거인 안세권이 등장했다. 스핀토 테너 특유의 날카롭지 않은 고음이 안세권의 매력이다. 쭉쭉 뻗어 올라가는 메타세콰이어처럼 그의 음악은 높다랗다. 아득한 그의 음색을 따라 오르면 푸르른 창공도 뻥 뚫릴 것 같은 기세다. “잘 한다!” 이런 추임새가 절로 나오는 안세권은 사춘기 이전의 동안(童顔)이다. 아기 미소를 보면 누구든 착해지게 만드는 순한 인상에 의외의 고음이 아주 아름답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가곡 “내 마음의 강물”을 들으며, 여수음악기행은 이미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더 대단한 음악이 세 청년의 싱그러운 화음으로 터져나왔다. “오 솔레 미오” 널리 알려진 이 음악을 그란데 보체가 불렀을 때, 공연장은 바람 속의 닻처럼 크게 출렁거렸다. 나의 심장이 순식간 멈추었을 것이다. 숨이 컥 막혔다. 캄캄한 밤 공연장 실내에서 ‘오 맑은 태양’은 안 떠오르고, 세 청년의 빛나는 음색이 세 개의 꼬리별처럼 얽혀들어 아름다웠다.

우레보다 더 큰 박수소리에 관객들의 지문은 비명을 지르고, 낭만 도시 여수의 밤은 활활 뜨거워졌다.

공연장을 나오며 알 수 없는 허기가 휘청 느껴졌다. 그게 식욕의 허기인지, 흥분의 말미에 오는 허탈감인지, 멘탈 붕괴인지 모호했다. 지독히도 매력적인, 치명적 음색, 조민웅의 퇴근을 기다리는 동안, 어떤 멀미도 스쳤다. 돛배의 닻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여수밤바다 낭만포차

▲ 낭만포차 길바닥 아트
▲ 돌산대교가 보인다

~ 편집 : 허익배 객원편집위원

이미진 주주통신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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