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6월항쟁 표지석과 소녀상도 둘러보고 민주화운동 의미 새겨

▲ (사)광주전남6월항쟁 회원들이 여순항쟁 유적지를 탐방하며 위령비 앞에 섰다.

12월 1일 사단법인 ‘광주전남6월항쟁’ 회원 40여 명은 여수를 방문했다. 여수 6월항쟁 표지석과 소녀상, 그리고 여순항쟁 유적지 등을 탐방하고 여수지역 민주화운동의 자취를 살펴보며 6월항쟁의 의미를 새기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광주전남의 회원들이 함께하자고 힘주어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문단은 먼저 중앙동의 소녀상을 방문하여 소녀상 건립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어서 교동5거리에 있는 ‘여수6월항쟁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6월항쟁 표지석은 1987년 6월항쟁 때 처음 집회가 시작된 곳을 기념하기 위해 2017년 6월 10일 건립하였다.

방문단은 이어 교동5거리에서 진남관을 향해 걸으며 그곳에서 진행된 1948년 여순항쟁의 역사를 주철희 박사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그곳 교동은 본래 바다였으나 인본인들이 바다를 매립해 건물을 지어 거주하였지만 여순항쟁 때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고 파괴되어 다른 도시와는 달리 일본식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다. 여순항쟁 때 군경의 진압과정이 얼마나 엄중했는가를 짐작게 해준다.

진남관 앞에 도착한 방문단은 당시 인민위원회가 있던 곳,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을 향해 연설하던 곳, 인민일보를 발행하던 곳 등에 대해 안내를 받으며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다시 방문단은 여수시민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해 묻힌 형제묘를 방문하였다. 형제묘는 시민들을 5명씩 묶은 후에 다시 5조를 묶어 25명씩 사살한 후 그곳에 묻었다 한다. 후에 후손들이 그곳에 묻힌 분들을 위로하기 위해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묘비를 세웠지만, 연좌제로 핍박을 받아오던 한 후손이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 묘비 겉에 다시 돌판을 붙여 이름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묘비 앞면에 새겨진 ‘형제묘’라는 글자만 읽을 수 있을 뿐 정작 그곳에 묻힌 희생자들의 이름은 읽을 수가 없다. 1만여 명이 희생된 여순항쟁의 슬픔과 그들의 가족들이 그동안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했던 서러운 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에 도착한 곳은 ‘백비’라고 일컬어지는 희생자 위령비가 있는 곳이다. 그곳은 절벽 아래 웅덩이였던 곳인데 위에서 사살하여 그곳으로 시신을 떨어뜨려 묻었다고 한다. 해설자인 주철희 박사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형제묘나 이곳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과 그곳을 꼭 지나가야 할 일이 있거든 돌이라도 하나 던져주고 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여수 사람들의 서러움과 그곳에 돌이라도 던져주어 위로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민초들의 가슴앓이를 그대로 보여준 사연이다.

방문단은 예울마루에 들러서 여순항쟁 사진전을 감상한 후에 마지막으로 여순항쟁의 발발지인 14연대 주둔지를 둘러보고 일정을 마쳤다.

광주에서 5.18 당시 시민군 활동을 했던 김상집(63) 광주전남6월항쟁상임이사는 “여순항쟁 70주년이고 오늘(12월 1일)은 마침 국가보안법 제정 7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뜻 깊은 날에 여순항쟁 유적지 순례를 하고 있다”고 여수 순례의 의미를 강조했다. 여순항쟁은 여수에 주둔중인 14연대 병력에게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동족을 살해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면서 시작되었지만 이들과 별도로 여수시민들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등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이어졌고, 순천까지 확산되었다. 이후 진압과정에서 1만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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