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대표단은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파리장서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장을 찾아서

--유림대표단은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 심산기념관 재개장심산김창숙 좌상

3월 29일 11시 서초구 심산기념, 심산문화센터에서는 두 가지 행사가 열렸다.

첫째 행사는 파리장서운동 100주년 기념식과 둘째로는 심산기념과 전시실 재개관식이 동시에 열리는 날이다.

파리장서운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독립운동의 한 거사로 3.1독립선언에 유림대표들이 참여하지 못한 점에 대한 반성과 아쉬움에 좀 늦은감이 있지만, 유림단이 조국독립을 외면하거나 친일 성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분명한 의사표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유림대표들이 대대적으로 나서서 실행에 옮긴 독립운동이 파리장서운동인데 137명의 유림 대표가 전문 2천 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게 된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 파리장서를 가지고 김창숙선생이 상하이로 떠나신지 100주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이 장서는 심산 김창숙이 한지에 서명을 한 장서 137명분을 노끈처럼 꼬아서 짚신으로 엮어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져간 것이다. 임시정부에서는 다시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문 원본과 같이 3천부씩이나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오늘 행사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이 파리장서의 한지 복사본을 한 장 씩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맞아서 심산 김창숙 기념관의 재개관식과 함께 열린 것이다. 심산은 이렇게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이 되었고, 상하이 임시정부 인근에 유림단의 대표들의 활동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특히 우당 이회영 전기문을 쓰는 중에 심산은 그 큰돈을 가지고 고국을 떠났건만 상하이에서 쪼들린 생활로 외출도 하지 못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용돈을 털어서 전당포에 맏겨진 우당의 옷을 찾아오게 하고, 이틀이 넘도록 앉히지 못한 밥을 짓도록 해주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였다.

 

파리장서운동이란?

유교계는 3ㆍ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은 바가 있었다. 1919년 기독계와 불교계가 주동한 가운데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유교계는 대대적인 장서운동을 일으켜 이에 호응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인데 137명의 유림 대표가 전문 2천 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게 된 것이다. 이 장서는 심산 김창숙이 짚신으로 엮어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져갔다. 임시정부에서는 다시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문 원본과 같이 3천부씩이나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면우 곽종석을 비롯한 수많은 유림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유림들이 3ㆍ1운동 발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따로 장서운동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큰 이유로는 2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독립선언서에 왕조의 복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서명하는 것은 한국 유림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학문을 배우며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분이야 어찌되었건 그 동안 은둔과 보신을 제일로 삼아온 영남 유림의 영수 곽종석이 왕년의 의병장이요, 호서 유림의 영수 김복한과 손을 잡고 일어난 놀라운 변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유교적 무저항주의와 비타협 주의의 표본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3ㆍ1운동을 전후한 국내 사회상을 볼 것 같으면 간도 이민의 격증, 천지이변, 독감의 유행, 쌀값의 폭락, 그리고 잇따른 대수재 등으로 인하여 민심이 극도로 혼란상태에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유림 대표들의 독립청원운동은 4월 2일 성주의 만세시위 때 이와 관련된 성주의 유생들이 체포됨으로써 일본 관헌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이 완강히 비밀을 지켰기 때문에 활동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고 곽종석, 장석영, 송준필 등 20명만 노출되어 체포당했다. 후에 상해에서 각 고을 향교로 발송한 한문 본 청원서가 발각됨으로써 137명의 이름이 알려졌다. 이와 같이 일제 식민통치는 10년만에 파국을 맞게 되었으며 최선의 방책은 한국을 포기하고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한국을 포기하기보다 더 오래 갖기 위해 이른바 신조선주의니 문화정치니 하는 헛구호를 내걸고 통치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리장서운동 (21세기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오늘 또 하나의 행사는 심산기념관의 전시실을 새로이 정비하여서 재개관을 하는 행사이었다. 우라나라 대부분의 재벌급의 기업인들은 일제에 협력하거나 친일행위를 한 경우가 많았지만, LG홈시스에서는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던 기업으로 지금도 꾸준히 독립운동가나 자손 그리고 기념사업들을 지원하고 있는 기업으로 오늘의 전시실 재개관도 역시 지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장한 기업이다. 대부분이 친일을 해서라도 기업을 키우는데 앞장을 섰지만, 이렇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 기업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내게는 퍽이나 기쁘고 반가운 일이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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