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아름다워(19)]"대의(大義)엔 이르지 못해도 소신(小信) 나누며 살았지요"

이승우(91, 안남면 도덕리)씨 이야기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l승인2020.01.22l수정2020.01.2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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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사람은 안남면 도덕리(덕실마을)에 사는 이승우 씨(91)입니다. 어린 시절 유교 학자인 조부로부터 <천자문>에서 <논어>까지 배웠다는 그가 정한 좌우명은 '대의소신(大義小信)'입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살아야 하되, 설령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소신' 즉 작은 믿음이나마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였을 겁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냐"고 묻자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6남매를 낳고 키우고 가르치던 시절이었다."고 답했습니다. 인생 90년을 넘길 무렵부터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상선약수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속성을 가진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습니다. 전국노인서예대전 입선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 씨는 올 봄 대문에 '구(龜)'와 '용(龍)'을 써 붙였습니다. 거북이와 용처럼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이승우씨가 자신의 서재 책상에 앉아 붓글씨를 쓰던 중 포즈를 취했다.

 

■ 박학다식 조부와 일자무식 부친 밑에서

1928년 옥천군 안남면 도덕리(덕실마을)에서 태어났다. 내 이름 '승우'는 조부가 지어주셨다. 한자로 쓰면 오를 승(昇), 비 우(雨)가 된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떨어질 낙(落)이 아니라 오를 승(昇)을 쓴 이유를 조부에게 들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세기 가까이 되어 가는 내 인생이 하늘로 오르는 비처럼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조상들이 살던 곳은 청성면 궁촌리(활골)였다. 그곳에서 안남면 도덕리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분은 증조모였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청산에는 원님이 있었다. 조부(이규항)는 원님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6·25전쟁 때까지 생존하셨던 조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투를 고집한 유교 학자였다. 평생 낫과 호미 한 번 손에 들지 않고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나도 어린 시절 박학다식한 조부에게 <천자문>에서 <논어>까지 배웠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의 어둠도 짙은 법이다. 젊은 가장이 일하지 않으니 집안이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불똥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일하지 않고 글만 읽는 조부에 실망한 증조모는 손자, 그러니까 나의 부친(이종억)에게 어떤 공부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부친은 일자무식이 되었다. 증조모는 남편, 그러니까 나의 증조부가 돌아가시자 곧바로 청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침 언니가 살던 안남면 도덕리가 이주지가 되었다.

박학다식 조부와 일자무식 부친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부는 평생 글만 읽으셨고, 부친은 평생 농사만 지으셨다. 특히 과묵과 인내의 인생을 사셨던 부친은 절대 남에게 해를 끼칠 줄 몰랐던 호인(好人)이었다.


17세 신랑 이승우와 16세 신부 주재순

나는 안남소학교를 다녔다(7기생). 모친이 조부와 부친 몰래 월사금을 내주었다. 소학교를 마치고 대전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월사금을 내지 못해 입학만 하고 결국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중학교 진학에 좌절한 나는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내가 15세 때였으니 1942년이었을 것이다. 대전의 한 전기상회 점원으로 취업했다. 당시는 식량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생활용품까지 국가에서 배급하던 전시체제였다. 전기상회에서 지내다 보니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풍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상점 점원들이 서로 배급 물품을 교환했기에 가능했다. 17세가 되던 해에 의류를 취급하던 한 상회의 동갑내기 여성 점원과 가까워졌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니 빨리 귀향하기 바란다."

갑자기 전갈이 왔다. 고향에 가보니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잔뜩 몰려와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집안 어른들이 다짜고짜 이렇게 통보했다.

"너는 내일 장가를 가야 한다."

신부는 정해져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나보다 한 살 적은 처녀였다. 그녀는 수원 양성에서 부모와 함께 살다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옥천으로 피신을 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학자였던 조부끼리 이미 우리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약조했다고 한다.

17세 신랑 이승우와 16세 신부 주재순은 너무 어려서 첫날밤을 치르지 못했다. 첫 아이가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였다. 그렇게 평생의 인연을 맺은 아내와 나는 73년을 해로했다.

▲ 이승우씨는 서예, 연필화, 오카리나 등 배움에 있어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 이승우씨는 서예, 연필화, 오카리나 등 배움에 있어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이씨가 책을 읽고 붓글씨를 쓰는 서재에서 자신의 작품을 들고 포즈를 취한 모습. 사진 오른편 벽으로는 이씨의 또 다른 작품들이, 이씨가 서 있는 뒤로 '대의소신'이라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 사직서와 시 한 편 남기고 경찰서 떠나

어린 가장이 된 나는 아내를 고향에 두고 다시 도시로 나갔다. 농사만 지어야 하는 농촌에선 도저히 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삶의 터전을 잡은 곳은 경기도 수원이었다. 수원역 역장의 사환으로 고용돼 온갖 잡무를 수행했다. 여기서 약 1년 동안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옥천읍에서 혼자 하숙하며 옥천경찰서 순경으로 근무했다. 여기서 약 4년을 일했다.

나는 새로 발령받은 청주경찰국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충북 영동, 경북 낙동강과 팔공산 등에서 인민군과 교전을 치렀다. 영천 시가전에도 참전했다. 당시 많은 동료 경찰관이 목숨을 잃었다. 그 속에서도 나는 용케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의 사회는 뒤숭숭했고 부정부패도 심했다. 우습게도 부정부패에 앞장선 것이 경찰이었다. 당시만 해도 경찰관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었다. <맹자>에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경제적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니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과 땔감이었다. 민간인을 못살게 굴어야 그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찰관을 '똥파리'라고 불렀다.

경찰관이 땔감과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당시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사람들이 어렵게 벌채한 나무를 지게로 옮기다 쉬는 곳만 지키고 있으면 되었다. 경찰관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나무를 그대로 버려둔 채 도망갔다. 그 나뭇짐을 지고 오기만 하면 됐다. 끼니 해결도 간단했다. 점심시간에 맞춰서 마을로 출장을 나가면 됐다. 구장과 반장이 알아서 밥상을 차려주었다.

그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경찰서장이 반려했다.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 한 편을 지어서 사직서와 함께 제출했다.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 산길에 말도 힘겨워하는구나

이제는 배도 말도 다 버리고 밭갈이나 하리라

그러자 경찰서장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이후 나는 평택에서 농사도 지었고, 서울에서 공사판 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난코스가 많았던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도 내가 십장으로 일한 곳 중의 하나였다. 공사판을 떠나 시내로 나와 장사를 하면서 배달부로 일하기도 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다 보니 6남매 중 두 아이는 영동, 평택 등 타지가 고향이 됐다.

 

■ 잡음 없이 농협 직원을 채용하는 방법

1980년대 말로 기억한다. 생존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타지를 떠돌던 나는 회갑을 앞두고 결국 귀향을 선택했다.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농사를 지으며 마을과 지역을 위해 봉사했다. 새마을지도자, 선거관리위원장, 경지정리위원장, 단위농협조합장(임시) 등이 당시 맡았던 나의 주요 직책이었다. 주변에서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한다는 냉소 섞인 뒷말이 들려왔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던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나는 경주 이씨인데, 만년 야당 인사 한 명이 같은 종중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선거운동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야당 인사의 선거운동을 도우면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더욱이 장남과 사위가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선관위원장을 자진해서 맡았다. 덕분에 진퇴양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남단위조합 임시조합장을 약 8개월 동안 맡았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옥천농협 군지부장이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안남농협으로 직원 한 명을 파견했다. 나는 군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남농협에 유능한 직원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의 월급은 군지부에서 책임져 주시는 거죠?"

깜짝 놀란 군지부장이 안남으로 달려와 나에게 사과했고, 직원 파견은 전격 취소되었다. 이후 군지부에서 마음대로 안남농협에 직원을 보내는 관행이 사라졌다.

안남농협이 자체적으로 직원을 임명할 수 있게 되자 조합장인 나에게 각종 인사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조합장, 내 딸을 좀 채용해줘."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골똘하게 생각하던 중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음날 나는 전체 직원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직원 채용에는 전 직원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주십시오."

나는 직원들과 함께 심사 채점 항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직원이 면접에 참여해 항목별로 10점 만점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했다. 채점 결과를 모아 평균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을 선발했다. 그렇게 투명한 절차를 밟아 사람을 뽑자 이후 아무런 잡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 자택 대문 앞에 선 이승우씨. 대문에 나란히 적힌 '거북이 구', '용 용'자 역시 이승우씨가 직접 쓴 것이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써붙였다고

 

지역을 위한 바람막이로나마 쓰였으면

이제 내 인생 90년을 넘겼다. 여생 동안 지역을 위한 바람막이로나마 쓰였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며 살아간다.

안남면은 전국에서 알아줄 정도로 농민운동과 지역공동체운동이 활성화된 지역이다. 나는 주교종, 송윤섭 등 안남면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고 고향으로 돌아온 농민운동가들의 선구자적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한 명이 우리 동네 이장을 처음 맡았을 때의 일이다.

지서장이 나에게 찾아와 "이런 사람들이 이장을 맡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당신 임기가 얼마나 되지?"

"3년입니다."

"그래, 당신은 3년 후에 떠나겠네. 당신이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아갈 사람들이야. 내 말이 맞나?"

"맞습니다."

"그러니 3년 후에 떠날 사람이 평생 살아갈 사람들 때문에 걱정할 이유는 없다고 보네."

그러자 지서장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먼저 지역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봤기에 젊은 사람들을 대변해서 한 마디 했던 것 같다.

나는 요즘 미술과 음악에 푹 빠져 있다. 3~4년 전부터 동양화와 풍물을 배웠다. 얼마 전부터는 연필화도 시작했다. 그림 그리고 악기 연주하기를 천하게 여기던 집안 분위기 때문에 멀리 했던 것들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 말리는 사람도 없으니 당분간 나의 공부는 계속될 것 같다.

나는 아내 주재순과의 슬하에 6남매(3남3녀)를 두었다. 1녀 옥자(3남), 1남 상룡(1남2녀), 2녀 용자(2남), 2남 상준(1남1녀), 3남 상길(2남), 3녀 숙(2남)이 다시 14명(11남3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 이승우씨가 진지한 표정으로 붓글씨를 쓰고 있다.
▲ 이승우씨가 받은 상패가 진열된 책장과 벽에 걸린 이씨의 작품들.
▲ 이씨가 직접 그린 연필화와 모델로 삼은 유명인 사진을 꺼내보이고 있다.
▲ 이승우씨 집 대문에 걸린 명패.
▲ 이승우씨는 몇 해 전 KBS 인기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에도 출연했다. 출연 당시 모습이 담긴 달력이 벽에 걸려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재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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