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환(84, 동이면 평산리)씨 이야기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평산리(소도마을)에 사는 김양환 씨(84)입니다. 김 씨는 아내 태옥춘 씨와 슬하에 4남2녀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장남은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업고를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었습니다. 사정이 조금씩 피면서 나머지 세 아들은 대학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사꾼이 자식을 셋이나 대학에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어렵게 마련한 땅도 팔아야 했고 농협에서 대출을 가장 많이 받은 조합원이 돼야 했습니다. 그나마 공부를 잘한 자식들이 가져오는 많은 상장이 위안이 돼주었습니다. 나중에 자식들 덕분에 다시 땅도 사고 집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은빛자서전에 김양환 씨를 추천해주신 오공탁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오씨는 17번째 은빛자서전 주인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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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학년 때 해방, 6학년 때 전쟁 맞아

나는 1936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소도마을)에서 태어났다.

평생 농부로 사신 아버지(김동리)와 어머니(최순임)는 모두 8남매의 자식을 낳았는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임감'과 '의젓함'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발휘해야 했던 장남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다소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동이초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다.

초등학생 시절의 추억이라고 하면 학예회, 운동회 등의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운동회 때 전교생이 운동장에 도열한 채 기계체조를 했고,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기마전도 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옛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동창회를 했는데, 나는 장기자랑 시간에 노래를 해서 장려상을 받았다. 그래서 예능이나 체육에 나름 소질이 있었을 것이라 추론해보곤 한다.

6학년 때 전쟁이 일어났다. 외갓집이 있는 청마리의 갈마골이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다. 얼마 후에 돌아와 보니 인민군이 면사무소를 지키고 있었다. 인민군 병사 중 몇 명은 동네 이발소에 와서 이발을 하기도 했다. 의자 옆에 세워 놓은 장총을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만졌는데 인민군은 개의치 않았다.

"우르르 쾅~~!!!"

얼마 후부터 비행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공습을 당한 동이초 건물이 무너지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비행기는 하강하며 동이초에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멀리 느티나무 아래서 그 장면을 지켜봤는데, 거기까지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전쟁도 끝났다. 상급학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왔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자 낫질과 지게질이 익숙한 청년 일꾼이 되었다.

▲ 안방에 걸려있는 김양환씨의 사진과 아내 태옥춘씨 칠순 기념연 사진.

 

■ 갓난아기 시누이에게 젖을 나눠준 아내

부모님이 가진 논밭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벌려면 남의 일을 해줘야 했다. 일꾼을 필요로 하는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았다. 모심기, 김매기, 추수까지 1년 논농사를 지어주면 한 마지기에 쌀 한 말씩을 받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동네 어른들을 따라 이웃마을로 일해 주러 가기도 했다.

스물한 살 때 징집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갔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부대에서 보병으로 복무했다. 제대하고 돌아와 나보다 네 살 어린 옆 동네 처녀 태옥춘과 중매로 결혼했다.

당시 우리 집은 이미 만원(滿員)이었다. 부모님은 나까지 포함해 이미 7남매를 두셨고, 할머니도 모시고 살았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가 출산했다. 그런데 장남 주용이 세 살 때 뒤늦게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주용은 할머니 젖을 먹고 자랐고, 막내 여동생은 올케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 지금도 막내 여동생은 아내를 잘 따른다.

동생들이 성장하면서 하나둘씩 독립해 나갔다. 서울에 가서 목수가 되기도 했고, 거제도에 가서 조선소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대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다 보니 식량이 항상 부족했다. 쌀밥은 언감생심이었다. 주로 고구마와 국수로 끼니를 때웠다. 자주 밀가루로 '풀떡국수'라는 것을 만들어 먹었다. 고운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어른들에게 드렸고, 거친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아이들에게 먹였다.

아내는 출산을 하고도 미역국과 쌀밥을 먹지 못했다. 대신 늙은 호박을 푹 삶아서 소금으로 간을 맞춰 먹었다. 그렇게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아내는 절미 저축을 하는 등 절약을 실천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남의 소를 키워주고 포도 농사도 지었다.

그런 와중에도 친목계 사람들과 야유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결혼한 이듬해인 1960년 어머니 허락을 받고 금강 올목이라는 곳으로 놀러갔다가 우리 부부가 나란히 서서 찍은 흑백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뱃놀이를 하다가 아내가 그만 고무신을 강물에 빠트렸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고무신을 내가 장대를 이용해 천신만고 끝에 건져냈더니 아내가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당시에는 강물이 정말 유리알처럼 맑았다. 강바닥을 기어 다니는 자라는 물론이고 작은 도실비(올갱이)까지 보일 정도였다. 모래가 고운 백사장도 넓게 깔려 있었다.

 

■ 새마을지도자로 마을 위해 7년간 봉사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1970년대 중반부터 새마을 운동의 열풍이 불었다. 우리 마을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나는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했다. 리어카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마을길도 넓혀야 했고, 초가지붕을 벗겨내고 슬레이트로 지붕 개량도 해야 했다. 길을 넓히려면 길가에 사는 주민들을 설득해야 했다. 처음부터 순순히 협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장과 함께 주민들을 설득하러 다녔다.

"마을을 위해서 땅을 조금만 희사하시면 시멘트 블록으로 담장을 쌓아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은 주민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생각지 못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주민들을 싣고 일하러 가던 경운기가 논으로 처박힌 것이 대표적인 사고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사고는 없었다. 다친 주민들에게 동태국을 끓여서 가져다 드리고 위로했다.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인 나에게 새마을지도자로 일하면서 여러 차례 다녀온 연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실제로 나는 새마을중앙연수원, 지방공무원연수원, 가나안농군학교 등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선 절약을 무척 강조했다. 담배를 피려고 성냥 하나를 쓰려면 세 명 이상이 모여야 했고, 이를 닦기 위해 치약을 쓸 때도 1mm 이상 짤 수 없었다. 세수를 하려고 비누를 쓸 때도 세 번 이상 문지르면 안 되었다.

새벽 4시가 되면 종이 울렸다. 일어나 구보를 하고 돌아와 태극기 게양대 앞에 도열한 채 애국가를 불렀는데, 꼭 4절까지 불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애국가를 불렀을 뿐인데 연수생들은 하나같이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인 김용기 장로의 새벽 강연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식사를 하러 가면 이런 구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하지 않으려면 먹지도 마라."

새마을지도자로 7년 동안 열심히 일했더니 정부에서 각종 표창을 시상했다. 국무총리를 비롯해 도지사와 군수가 주는 상을 받았다.

한편 나는 농지개량조합 수리감시원(수감)으로도 7년 동안 활동했다.

 

■ 대전 통학생 장남의 땀에 젖은 교복

나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6남매를 낳았다. 장남 주용을 필두로 차남 주옥, 3남 주덕, 4남 주백 등 네 아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이어서 장녀 주란과 차녀 주미 등 두 딸이 잇따라 태어났다. 6남매를 키우며 겪었던 애환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장남 주용은 동이초와 동이중을 마치고 대전상고에 진학했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 보니 대전에서 하숙이나 자취를 하지 못하고 열차로 통학해야만 했다. 주용은 날마다 새벽밥을 먹고 자전거로 옥천역까지 달려가서 대전행 통근열차를 탔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면 다시 대전역까지 와서 통근열차를 타고 옥천역에서 내린 다음 자전거로 귀가했는데, 한밤중이 되어야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별을 보며 등교하고 하교하던 어느 날이었다. 늦은 밤에 주용이 대문을 박차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들의 설명을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옥천역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다 보면 중간쯤에 길이 외지고 험하기로 유명한 각시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주용은 개오지(호랑이 새끼를 이르는 방언이지만 살쾡이인 것으로 추정)를 만났던 모양이다.

"개오지에게 홀려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죽는다."

옛날부터 동네에서 전설처럼 떠돌던 말이다. 실제로 개오지는 주용의 주변을 맴돌며 으르렁거렸고, 뒷발을 이용해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주용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전력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개오지도 뒤에서 계속 따라왔다. 주용이 마을 입구에 있는 다리를 건널 무렵에야 개오지는 물러갔다.

"이것 보세요. 속옷과 교복이 땀으로 흠뻑 젖었어요."

녹초가 되어 쓰러진 주용의 옷을 벗기던 아내가 소리쳤다. 다음날 아들은 통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더 이상 말릴 수도 없었다. 아들은 대전에 사는 이종사촌 집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공부한 아들은 졸업과 동시에 제일은행에 취직했다. 첫 발령지는 서울의 청량리였고, 이를 계기로 서울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는 야간대학도 다녔다. 우리 부부에게는 당시 몸이 많이 허해졌을 아들에게 보약 한 첩 먹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다.

장남 주용(2녀), 차남 주옥(2녀), 3남 주덕(2남), 4남 주백(3남), 장녀 주란(2남), 차녀 주미(2녀)가 13명(7남6녀)의 손주를 낳아주어 나와 아내는 고맙고 행복하다.

▲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오늘도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선다.
▲ 마늘밭에 퇴비를 주고 돌아온 김양환씨가 마당에 들어서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시니어클럽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김시. 일자리 사업 참여자에게 지급되는 조끼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우리 6남매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게요

-장남이 보내온 감사편지-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 우리 6남매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시고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자녀와 후손들이 서로 우애를 나누며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아가 우리 자녀와 후손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몸소 본보기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큰 질병이나 우환 없이 즐겁고 건강하게 봉사활동 하면서 살아가시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실천하는 모습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편지를 쓰면서 평소 그냥 지나쳤던 고마운 생각 한 가지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와 우리 6남매가 부모님 때문에 큰 걱정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두 분은 팔십을 넘긴 노인이지만 크게 아픈 적 없이 건강하게 생활해오셨고, 인생을 늘 즐겁게 사시는 긍정적 모습을 후손에게 보여주셨으며, 친척이나 이웃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오셨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사와 행복의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두 딸 모두 결혼시키고 손자까지 보게 되었는데,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고 안부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어머니가 거의 먼저 안부 전화를 주셔서 불효자라는 자책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바쁜 자식보다 한가한 내가 먼저 전화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 오히려 위로해주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용기를 내어 두 딸에게 먼저 전화를 걸곤 한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막내아우와 비교적 고향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는 아우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아울러 전합니다.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우리 6남매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다 더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장남 주용 올림

글 정지환 객원기자·사진 박누리 기자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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