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34)] 후회하지 않으려면 말해주세요 "고마워, 사랑해, 미안해"

이수일(80, 옥천읍 구일리)씨 정지환 옥천신문l승인2020.06.19l수정2020.06.1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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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구일리에 사는 이수일 씨(80)입니다. 죽향초, 옥천중, 옥천농고(옥천상고 전신)를 졸업한 그는 20대 젊은 나이에 이장이 되어 마을을 위하여 7년 동안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마흔 살이 되던 해인 1979년 이장으로 3년 이상 활동한 사람을 대상으로 공무원을 특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그는 늦깎이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안내면 산업개발계장, 옥천읍 사회계장이 그의 19년 공무원 생활의 마지막 임무였습니다. 1998년 지방선거에 옥천군의회 의원으로 출마해 채 100표가 되지 않는 근소한 표차로 낙선했지만 4년 뒤인 2002년 마침내 제4대 옥천군의회 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이장 7년, 공무원 19년, 군 의원 4년의 공직 생활을 합쳐보니 3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수일 씨는 "그 30년의 시간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면서 "협조해준 주민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 부모는 효도할 기회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는 1940년 옥천군 옥천읍 구일리에서 태어났다. 구일리는 귀화리, 귀죽리, 귀현리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 집은 귀죽리에 속해 있다.

아버지(이봉하)와 어머니(이분남)는 슬하에 8남매(2남6녀)를 두었지만 홍역으로 3남매를 잃었다. 나에게 유일한 존재였던 형도 이 와중에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 네 살이었다. 그때 고비만 넘겼다면 아마 형은 오래 살았을 것이다. 장수(長壽)가 우리 집안의 내력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83세, 어머니는 82세까지 사셨다. 큰누나는 90세까지 사셨고, 작은누나는 92세인 지금까지 생존해 계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흔 살을 넘겨서야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나는 그렇게 '외아들 아닌 외아들'로 태어나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아들 선호 사상이 강했던 시대였기에 가정 형편은 풍족하지 않았지만 누나들에 비해서 호강하며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갈 때는 어머니가 나에게만 엿과 오징어를 싸 주었고,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초콜릿'과 '센베이'를 사 먹을 수 있는 동전을 챙겨주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겨울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랫목 이불 속에서 따뜻하게 덥혀진 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아들 막내동생 때문에 누나들이 늘 뒷전으로 밀린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하고 가슴이 아프다. 두 명의 누나는 아예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제 와서 보니, 나도 왕자 대우를 자꾸만 받다 보니 그것을 고맙게 여기지 않고 당연히 여기는 버릇없는 아이가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은혜를 갚으려 했으나, 이번에는 부모님이 오래 기다려주지 않고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채독(菜毒)과 6.25전쟁의 역경을 넘어서

여덟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 십오리 길을 걸어서 등하교했다. 등교할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해야만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방이 없어서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당시엔 '벤또'라는 일본말을 썼다)을 싸서 어깨에 둘러맸다. 하교할 때는 빈 도시락이 달그락 소리를 냈는데, 친구들과 함께 그 소리에 박자를 맞춰가며 마을까지 달려오곤 했다. 학교에 책상이 없어서 각자 집에서 사각형 소반을 가져다 놓고 마루에 앉아서 공부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이 쳐들어오니 피난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원면까지 갔을 무렵 이미 인민군 대열이 우리 피난민을 앞지르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그들은 "동무"라고 부르며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개전 초기의 인민군은 반공 영화에 나오는 잔인한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피난을 가야 할 이유를 상실한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채독(菜毒)으로 3~4년 동안 고생했다. 회충 같은 벌레가 위벽을 갉아먹는 병이라고 들었다. 옥천의 유일한 병원이었던 삼산의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바람에 한약방에서 처방을 받았다. 아버지가 바위에서 채취해온 검은 이끼 같은 것과 소기름을 섞어서 나에게 먹였는데 냄새가 고약했다. 그래도 이 민간요법 덕분인지 채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옥천중학교에 진학한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폭격으로 학교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학생들은 천막 교실 바닥에 앉아 공부하다 틈만 나면 학교 건물 짓는 일에 동원되었다. 우리는 반별로 도열해 벽돌을 날랐다.

옥천중을 졸업한 나는 옥천농업고등학교(나중에 옥천상업고등학교로 개명)에 진학했다. 옥천농고에는 농과와 축산과가 있었는데 나는 농과를 선택했다. 3학년 재학 중 나를 포함해 세 명의 학생이 결혼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에는 외아들인 경우 부모들이 빨리 대(代)를 잇게 하려고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시키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 고교 3학년 시절에 동기생 누나와 결혼

나의 신부는 군서면 동평리에 사는 처녀 윤정순이었다. 그녀는 옥천농고 동기인 윤태근의 누나로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다.

어머니 친척의 중매로 옥천읍에 위치한 중화요리 식당에서 첫선을 봤다. 양가 어머니가 동석한 첫선 자리에 아내는 당시 유행하던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나왔는데 첫인상이 좋았다. 그날 특별한 날만 먹는 귀한 음식으로 취급받던 짜장면을 시켜서 먹었다.

여름에 첫선을 보고 나서 한 계절을 보낸 다음 혼례식을 치렀다. 그 기간에 동기인 윤태근이 날마다 누나의 근황을 예비 매형인 나에게 전해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교생이 소풍을 가는 날, 윤태근이 삶은 계란 10개가 담긴 보자기를 나에게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나가 매형에게 꼭 전해 주라고 했어."

순간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미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마음이 호수처럼 편안해졌다. 당시 나는 문득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아, 이것이 연인(戀人) 사이에 느끼는 사랑이라는 건가.'

결혼식은 처갓집 마당에서 전통혼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자 아버지가 포 하나와 작은 술잔을 올려놓은 소반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상님에게 절을 하거라."

이렇게 조상님에게 결혼하는 것을 고한 다음 부모님께 큰절을 했다. 어머니는 집에 남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옥천읍 민씨네가 제공한 화물차에 교복 입은 친구 11명을 태우고 군서면 동평리를 향해 떠났다. 친구들은 결혼 선물로 거울을 사 가지고 왔다.

처갓집 앞마당에서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례를 치르고 초야(初夜)를 보냈다. 한 이불에 들어야 했지만 어린 신랑과 신부는 너무 어색하고 부끄러워 서로 등을 돌린 채 이불 끝을 꼭 쥔 채 잠이 들었다. 이미 문풍지에는 손가락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고교 3학년 시절 결혼했던 나머지 두 친구는 황광성과 신득우였다. 신득우는 규율반 부장이었는데, 나는 8명의 규율반 대원 중 한 명이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등교해 교문에서 학생들의 복장을 단속했다.

▲ 이수일씨 가족의 가훈은 '일심'이다.

 

■ 돼지 잡고, 부고장 돌리고, 마을길 넓히고

고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군에 입대할 때까지 야당 국회의원 후보 이용희 씨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했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권유도 있었지만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다. 3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한 직후에도 총선거가 실시되는 바람에 다시 야당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봉사했다.

두 차례의 야당 선거운동 경력 때문에 나는 지역에서 완전히 '민주당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관권 선거에 익숙하고 야당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던 시절이라 그런 낙인은 취업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나는 25세가 되던 해에 마을 이장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이장 직무를 7년 동안 지속하였다.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이장협의회의 총무라는 직책도 겸직하였다.

이장으로 활동하는 기간에 마을의 화합을 위하여 솔선하고 헌신했다. 마을에 애경사가 있으면 돼지를 도살했는데, 그런 궂은 일들은 모두 나의 몫이었다. 당시에는 초상이 나면 부고장을 일일이 사람이 돌려야 했는데, 마을별로 젊은 사람들을 배치해 빈틈없이 배포하도록 조치하는 일도 나의 몫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다음 마을길을 넓혔다.

1971년까지 이어진 7년간의 이장 업무를 마친 나는 농사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마흔 살이 되던 해인 1979년 이장과 새마을지도자로 3년 이상 활동한 사람을 대상으로 공무원을 특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나는 늦깎이 공무원이 되었다. 당시 합격한 신규 공무원 230명이 교육을 받을 당시 나는 교육생 대표로 선출되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기에 보다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었다.

안내면 산업개발계장, 옥천읍 사회계장이 내 19년 공무원 생활의 마지막 임무였다. 1998년 지방선거에 옥천군의회 의원으로 출마했지만 채 100표가 되지 않는 근소한 표차로 아깝게 낙선했다. 하지만 4년 뒤인 2002년 마침내 군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장 7년, 공무원 19년, 군 의원 4년의 공직 생활 30년은 내 인생의 큰 보람이었다. 그 30년 동안 협조해준 주민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남에게 악하게 하지 않은 사람 되어야

나는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훈을 '일심(一心)'으로 정했다. 후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타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악한 일은 절대 하지 말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선한 일도 다 못하고 떠나는데, 악한 일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남에게 악하게 하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인생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나는 '후회'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팔십 평생 살아보니 후회밖에 할 것이 없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별(死別)하니 희망이 사라졌다. 시각이 비관적으로 바뀌니 어디에도 가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 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고마워, 사랑해, 미안해'라는 말을 아낌없이 해줘야 한다.

나는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장남 대종, 장녀 미자(1남1녀), 차남 정종(1남1녀), 삼남 수종(3녀), 사남 호종(2남), 오남 선종이 9명(4남5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직업 때문에 고향을 떠나 있는 장남을 제외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고향 옥천에서 살고 있다. 며느리들도 잘 하지만 외동딸 미자가 1주일에 2회 정도 반찬도 만들어 오고 청소도 해준다. 자식과 후손들이 무엇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효도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글 ·사진 정지환 객원기자

 

■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외동딸이 보내온 감사편지

오랜 세월 가까이에서 살아오면서도 말로 직접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은빛자서전 덕분에 지면을 통하여 표현해봅니다. 삶이 거칠고 힘들던 시절에 아버지는 외아들로 자라오면서 주위의 여러 가지 유혹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나아가 5남1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단정하고 깔끔하게 공직생활에 매진하셨습니다. 퇴직한 이후에도 온화하고 인자하신 성품으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게 하셨으며 4대 옥천군의회 의원직도 성실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열심히 살아오는 동안 인생의 반려자를 병마로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외롭고 허전한 일상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잊고자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오늘 이 순간이 아버지에게는 가장 젊은 날이고 행복한 시간이리라 믿습니다. 남은 인생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고 재미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자식과 후손들도 아버지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부(富)와 권력과 명예는 없지만 우리 자식과 후손들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외동딸 미자 올림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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