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 20. 순진의 편지

안지애 편집위원l승인2020.09.21l수정2020.09.2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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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원들이 모연중 일당을 단숨에 제압하자 초순진이 나에게 달려왔다.

“진정한 왕이 되셨군요. 모두의 소리를 듣게 되셨습니다.”

초순진은 모연중 일당에게 벗어나게 된 것보다 그것이 더 즐거운 듯 보였다.

“이미 경지를 넘으셨고 도달하셨으니 제가 더 이상 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

“지금 이르신 경지 말입니다.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라고 했고 중국에서는 관세음(觀世音), 관자재(觀自在)라고도 했지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저희 세계에서는 이를 초인(超人)이라고 하지요. 저는 산스크리트어인 아발로키테슈바라의 어감을 더 좋아하지만요. 아발로키테슈바라는 서로를 알아봅니다. 이를 우리는 ‘관지음(觀知音)했다’라고 합니다. 아까 당신도 저를 관지음했겠지요. 제가 했던 것처럼.”

나는 갑작스러운 순진의 설명에 당혹스러웠다. 주위에서 모연중 일당을 처리하는 동안 순진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왕께서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어 더 이상 왕에게 저의 속마음과 제가 처한 기이한 처지를 감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이실직고하고자 합니다.

백일 후 저와의 합방은 없던 일로 했으면 합니다. 제가 왕비가 되어 후에 왕위를 물려받을 일 또한 없을 것입니다. 사실 호태종과 나는 당신이 왕의 재목이 되는지 내기를 했는데, 이는 상상이상이군요. 호태종이 당신을 알아본 것이겠지요. 지금 경찰이 오고있으니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우리 존재가 이번 일로 많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원칙대로 비공개로 진행합니다. 궁에 가 계시면 일주일 내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모연중 일당을 큰 밴에 태운 후 초순진과 호태종은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나는 며칠 후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안녕하신지요. 

제왕학을 배운지 오래되어 서체의 예를 잃었으나 마음속 새긴 성은의 진심만은 망극하오니 넓은 아량으로 서신을 봐주소서. 내 아버지이자 선왕이신 호태종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습니다. 지난번 선유도 정자에서 제가 말씀 드린 학창시절 이야기 중 못 다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미혼인 것은 맞습니다만 또한, 미혼모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알게되셨으니 당신은 저의 당나귀숲이 되시는 겁니다. 백일기도와 합방까지 예정되어있고, 왕비가 된 후 왕권을 노릴 수도 있는데 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가 무언지, 선유도 정자에서 나눈 정은 과연 진심이었는지 궁금한 것이 많으실 겁니다. 

모든 답은 당신 마음 안에 이미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확히 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모든 것은 연극이었습니다. 호태종과 다른 원로들이 예상하지 못한 패가 하나 있었으니까요. 백제 8성 귀족 계루파의 후손과 고주몽 직계손이 결혼해 왕자를 낳을 경우 그 아이의 왕위 계승 순위는 1위로 올라갑니다. 어떠한 제례의 결정도 이를 바꿀 수 없습니다. 각 종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왕이 될 테니까요. 아들의 왕위 승계 순위가 1위인데 왜 당신과의 혼례까지 계획했냐고 물으신다면, 아이가 너무 어려 제가 먼저 여왕이 되어 왕권을 강화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당신이 왕이 되셨기에 가장 쉽게 왕위를 물려받는 방법은 선례를 찾아보니 현왕과 결혼해 왕위를 물려받는 방법이었지요. 당신 또한 동의했고요.

그렇다고 선유도에서 나눈 정마저 연극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과 뜨겁게 키스한 그 순간만은 진심이었음을 믿어주소서. 당신의 순수한 마음에 감동받은 나머지 저의 격정을 이기지 못했다고 해두지요.

아버지가 누군지도 짐작이 되시겠지요.

호태종 재위시절 나의 왕위를 저지하는 제례의 결정이 나왔을 때 나를 옆에서 지켜주고 지금도 지켜주고 있는 호위무사 백상훈입니다. 백제 8성 귀족 계루파의 직계손. 어떻게 아이의 아버지조차 아이의 존재를 모르고 호태종과 협회에도 숨길 수 있었는지 궁금하시겠지요. 다 말씀드리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간단히 종파간의 분쟁을 최소화하고 안전하게 제 아이를 지키는 방법을 택했다고 해두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왜 당신에게만 밝히는지도 궁금하실 것입니다. 저나 선왕 호태종은 저의 차후 왕위계승 여부와 상관없이 당신이 진정 글로벌제왕협회를 잘 이끌어 나갈 재목인지 계속 지켜봐야했습니다. 당신께 다가간 의도 자체가 당신을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내기였지요. 이 오랜 세월 지켜온 선조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함은 당신도 이미 아시겠지요. 

모연중의 반역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빠르긴 했지만 모두 예견된 것이었고 당신의 안전을 해칠 일은 전혀 일어날 수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다치더라도 나와 호태종에게 칼을 가하도록 했고, 모연중의 조직원 또한 상당수 저희가 심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옥새 또한 맨눈으로 구별할 수 없는 재질로 복제해 두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도 괜찮았습니다. 모연중이 10가지를 계획해 두었다면 우리는 100가지 대비해두었다고 보면 됩니다. 한 가지 의외의 상황이 있었다면 당신께서 아발로키테슈바라로 깨어난 부분입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지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시험할 필요도 없었고 당신을 견제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보다 더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제 당신을 믿고 안 믿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당신이 아발로키테슈바라인 것을 알리면 당신을 향한 의심이나 종파간의 미묘한 분쟁을 금방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79대 한강왕이 아발로키테슈바라로 깨어난 것을 다시 한 번 경축 드리옵니다. 호태종과 저의 주요 관심은 발해의 신녀 훤희(萱禧)의 예언을 이룰 자가 한강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모연중의 반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당신에게 잠재된 능력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더 이상 저의 조언이나 협력이 필요하지 않을 듯 하여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선대의 뜻을 지켜나가는 힘든 길이 될 터이나 당신께는 어쩌면 모든 것이 순리인 듯 살아가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시기이고 2026년을 전후로 대한민국의 국운이 크게 융성하는 시기입니다. 그 이후 2076년까지 통일된 한민족이 되어 문화적으로는 물론 영적으로 세계의 지도국가가 되고,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를 되찾아 한민족이 크게 융성하도록 이끌어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왕께서는 이미 아발로키테슈바라로 깨어나고 관지음(觀知音)하신 분이니 이 모든 일을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일을 해내실 분으로 아차산의 고주몽 제례에서 이미 점지했는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제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만의 비밀이었으면 합니다. 아이의 재목도 지켜봐야 할뿐더러 이 큰 무게를 아이에게 짊어지게 해야 할지 또한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발해의 마지막 신녀 훤희(萱禧)의 예언이 실현되고 한반도가 통일이 될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기원하며

다음 만날 그날까지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이렇게 끝난 편지 뒤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석양이 드리워진 어느 시골 강가에서 와인잔을 기울이며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남녀의 사진이었다.

그 후로 나는 순진을 보지 못했다.

석양이 아름다운 강가 어디 커피향이 고소한 그곳 카페 주인이 순진을 닮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왔고,

미국 위스콘신 이름 모를 작은 마을 어딘가에 퍼진 역병에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도 들렸다.  

하지만 발해의 마지막 신녀 훤희(萱禧)의 예언이 실현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순진이기에 통일이 된 어느날 불쑥 나를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기는 했다. 편지에도 그런 암시와 언질이 있었기에 순진과의 만남이 언젠가는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한강을 유유히 산책하며 밤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려본다. 

* 심창식 편집위원이 시작한 연재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중간에 안지애 객원편집위원이 '순진의 회상'편을 쓰며 교차 집필을 하다 마지막 편을 공동 집필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안지애 편집위원  phoenic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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