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락다운이 다시 시작되었다. 6월 지나 레스토랑, , 운동시설, 학교 그리고 직장을 열자 코로나환자는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9월을 지나면서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폭등했다. 퀘벡주에서만 700, 800, 1,000명을 찍었다. 퀘벡 주지사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앞으로 한 달간 슈퍼마켓, 약국, 병원 등 필수업소 외 모든 상업시설, 심지어 친구들, 가족 간 모임도 금지한다는 엄격한 규정을 발표했다. 자기가 사는 지역 밖 여행도 금지되었다. 다행히 직장은 금지되지 않았지만 다시 시작된 락다운은 코로나로 인해 지쳐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어려서 동생과 싸우고 난 다음날 일어나면 싸웠던 기억을 까먹고 동생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동생은 그런 점이 싫었다고 한다. 자기는 아직도 화가 나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누나를 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라고 생각했단다. 나는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그 다음날은 항상 새롭고 활기차게 시작한다. 너무나 단순해서 다~ 까먹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작된 락다운은 단순쾌활한 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인생 처음으로 우울감과 고립감을 느꼈고, 활력소가 다 빠져나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정신상태가 며칠 지속되자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 없는 번아웃 상태가 되고 말았다.

코로나가 시작되자 연구기관은 활력을 잃었다. 기관에서 개최하던 Pizza and Beer 파티, 할로윈 파티, 학회, 외부강연자 초청 발표 등은 전부 다 취소되거나 줌으로 대체되었다. 학교 캠퍼스에서 하던 학술 이벤트도 취소되고 줌으로 대체되었다. 우리 실험실에선 금요일마다 같이 맥주를 한잔 했었는데 그런 시간은 코로나 이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 바쁘고 활기차게 돌아가던, 시끌시끌한 대화가 오가던 연구기관은 핏기를 잃은 듯 음산해졌다. 서로 간 활발한 교류도 없어지고, 협력연구도 줄었다.

이는 나를 비롯한 모든 연구원에게 영향을 미쳤다. 연구원들의 반짝이고 날카롭던 눈빛은 사라졌다. 외부강연자 강의나, 학회를 다니면서 들었던 새로운 지식이 주는 자극은 사라졌고, 이벤트에 대한 기대도 없어졌다. 6월 지나 그나마 파트타임으로 출근하게 되었지만 지적 자극과 활력을 받지 못한 연구원들 눈에 초점은 없어지고 기계처럼 일만 했다.

실험실 밖에서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운동시설이 다시 문을 닫자, 집에서 홈트레이닝을 시작해야했다. 하지만 홈트레이닝을 전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즐거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부담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졌다. 주말엔 그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친구들과 드라이브도 갈 수도 없었다. 친구 한명만 집에 초대할 수 있었고, 밖에서 친구 한명하고만 산책 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관람, 미술관 관람, 축제, 외식을 했던 시간들은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하루하루 코로나가 걸리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시간은 흘러갔다.

무엇보다 크게 정신적 영향을 준 것은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올 4월에 한국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부모님도 올해 캐나다에 오시기로 계획했지만 오실 수 없었다. 잡히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 한국여행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기약은 점점 길어져 가는 것만 같아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3~4주 멍한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글도 쓸 수 없었고 일도 집중하지 못했다. 엄격한 락다운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환자는 여전히 하루에  퀘벡주에서만 1,000명을 찍고 있었다. 퀘벡 주지사는 락다운 기간을 올 12월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큰 결정을 내렸다. 다음 날 보스 스테판을 찾아갔다.

스테판, 현재 코로나 상황이 안 좋은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한국에 꼭 가고 싶어요. 가게 되면 한국에서 2주 자가격리, 돌아와서 2주 자가격리를 해야 해요. 적어도 한 달 반은 실험실에 나오지 못할 거여요. 이렇게 긴 시간을 한국에 갔다 오는 게 저 또한 마음이 무거워요. 그리고 무리한 부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가족을 못 본지 벌써 2년이 다 돼가요. 그래서 이번엔 꼭 가고 싶어요.”

스테판은 의외로 침착하고 밝게 답해 주었다.

지산, 네가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 나도 안다. 코로나로 인해 네가 한국에 가지 못하고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은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인생에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 살아야지? 걱정하지 말고 한국에 다녀와. 어차피 조금 있음 크리스마스와 새해라 다들 쉴 거야. 네가 추가로 한 달 더 쉰다고 해서 데이터가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야. 걱정하지 말고 언제든 다녀와

사실 그동안 한국에 가고 싶었지만, 한 달반 넘게 실험실을 비우고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데이터 도출에 지연을 줄까, 일 진행이 느려지는 게 아닐까, 박사를 늦게 졸업하는 게 아닐까, 한국에 가겠다고 이야기하는 게 철없는 행동이 아닐까 등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코로나가 수그러들길 기다렸지만, 외국은 2차 웨이브로 인해 코로나는 걷잡을 수 없어졌다. 점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멀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속된 락다운은 나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들었다.

일이냐? 사랑하는 사람들이냐?

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막상 결정을 내리자 스테판이 말한 것처럼 실험실에 나가지 못하더라도 연구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진 않았다. 그날 저녁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부모님한테 전화를 드렸다. 한국에 드디어 가게 된다고... 곧 보게 된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러자 신기하게도 우울하고 고립된 감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래라는 걸 기대할 수 있었고, 계획할 수 있다는 사실에 삶의 주체를 찾은 기분이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고 흥분되었다. 요새는 한국에 가서 무엇을 할지, 누구를 만날지 계획하고 고대하며, 줄어드는 날짜를 세며 행복을 느끼고 있다.

사실 나는 외로움이나, 우울감을 잘 느끼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기에 꿈을 이루기 위해 아무 망설임 없이 혼자 캐나다로 공부하러 올 수 있었다. 캐나다에 오고 나서 종종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가 있었지만, 연구에 대한 재미, 다양한 이벤트들로 인해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락다운은 모든 인간관계에 제약을 주었다. 특히 타지에 혼자 사는 외국인들은 더욱 고립되었다. 고립감이라는 정신적 상태는 전반적인 일상 활동까지도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은 다행히 코로나블루를 조금 이겨낸 상태다. 운동도 다시 시작했고, 외부강연자 인터넷 강의를 점심시간마다 들으며 새로운 지식이 주는 즐거움도 느끼고 있다. 락다운 동안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산책을 하며 캐나다 가을을 음미하고 있다.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지난 10월 몬트리올 가을

 

그리고 이렇게 글도 쓴다. '코로나블루'가 조금 사그라진 요즘 나는 또다시 희망을 꿈꾼다. 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새롭게 펼쳐질 미래를... 일상으로 돌아갈 미래를... 그리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미래를...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이지산 주주통신원  elmo_part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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