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에서 보낸 5일간 학회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에게 ‘어떤 확신’을 주었다. 그 당시 나는 박사 졸업 후 갈 수 있는 두 가지 길 사이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첫 번째 길은 '포스트 닥터  과정(이후 '박사 후 과정')'이다. 박사 후 과정은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대부분 무조건 밟아야한다. 보통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까지 걸린다.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주체적으로 연구를 하면서, 이 연구를 바탕으로 수준급 논문도 써야한다. 국가나 특정단체의 연구비를 따기 위해 연구비 신청도 해야 한다. 더불어 학부생, 석·박사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거나 연구에 대해 교육도 시켜야 한다. 즉 다방면에서 완벽한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과정이다.

이 진로의 장점은 내가 주관하는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면서 원하는 분야를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가 잘 진행되면 업적이 될 만한 논문도 게재할 수 있다. 단점은 임금이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다는 것과 자칫 좋은 논문을 쓰지 못하면 교수가 될 가능성이 낮고, 오갈 데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길은 생명공학회사 연구원이다. 생명공학은 4차 산업에 속해 있어 미국, 독일, 일본, 스웨덴, 우리나라까지 정부와 기업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생명벤처기업도 기하급수적으로 탄생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맞춰 특히 미국에서는 생명공학연구원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연구원으로 취직했을 때 장점은 높은 연봉과 보장된 워라밸(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다. 생명공학산업 분야의 빠른 변화를 적기에 파악할 수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팀을 이루어 연구할 기회가 많아 시야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단점으로는 회사가 지정해주는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일차로 고려하여 연구를 진행해야 하기에 주체적 연구를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회사는 ‘논문’을 목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 목적의 신약개발 연구를 진행하기에 내 이름으로 논문을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 나의 꿈은 박사를 따고 박사 후 과정을 밟은 후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추가로 3~6년 더 공부하는 것도, 저임금을 받는 것도, 보장이 없는 꿈을 위해 달리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 성격과 적성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교수라는 직업과 잘 맞을 거라 생각했고, 꿈을 이루기 위해선 끈기와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사과정 3년차 무렵 현재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재미있었지만 순수과학에 가까웠다. 좀 더 실용적인 연구에 자꾸 관심이 갔다. 간신히 월세를 마련하고 세일 상품만 찾아 헤매는 가난한 학생의 삶이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가만 보니, 대학교수는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양성’이라는 의무도 있어 새로운 학생들을 매년 영입하고, 교육시키고, 졸업시켜야하는 부수적 일들도 많았다. 이런 점들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 동안 간직한 꿈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도 내가 박사 과정 후 교수가 되길 은근 바랬다. 그 길이 과학자로서 성공하는 길이라고 모두 믿었다. 또한 박사과정을 올 때 했던 나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듯해서 ‘내가 인내심과 끈기가 부족한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시간이 흘렀다. 서서히 주위에 박사과정을 마친 친구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박사 후 과정과 회사에 취직하는 비율이 반반이었다. 취업한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의 많은 제약회사와 스타트업 기업들이 박사졸업생들의 능력을 굉장히 높이 평가해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해주고, 성장할 기회도 많이 제공한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회사 취직도 고려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기막힌 타이밍으로 플로리다 학회에 가게된 것이다.

플로리다 학회에서 제약회사 연구원이나 임원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한 분은 “내가 처음 취직한 회사는 ‘Merck’라는 대기업이었어.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지. 회사의 연구 스타일이나, 다양한 팀과의 협업연구 등 대학에서 했던 연구와는 정말 달랐지. 그렇게 8년 동안 Merck와 일한 뒤, 작은 스타트업 회사의 팀장으로 이직해 새로운 약물개발부터 임상실험까지 모든 과정을 진행시켰지. 정말 의미 있는 일이야, 내가 하는 일이 환자의 생명이나 일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임원은 “이 분야에서 일한지 20년 넘었어. 큰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시작했고, 중소기업 팀장으로 갔다가 지금은 다른 중소기업 임원으로 있지. 매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정보를 교환해. 그래서 항상 배울 수 있어. 매일 학생이 된 느낌이지. 참 재밌고 신나는 일이야”라고 말해주셨다. 그러곤 나에게 큰 질문을 던지셨다 “너는 5년 뒤에 어떤 모습을 꿈꾸고 있지? 네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계하면 방향성을 잡는데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질문은 나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사실 5년 뒤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없다. 두루뭉술하게 ‘과학자’라는 것밖에. 과연 어떤 길이 내 적성, 성격과 맞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떨 때 가장 행복한가? 나의 장점은 무엇인가?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5년 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30대 전에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을 지금에야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답을 찾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묻기도 했고, 스스로 어떨 때 행복한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같이 박사과정 중인 클라우디아는 “지산, 너는 연구실에 오자마자 정말 고민 없이 척척척 연구를 실행해 갔어. 난 사실 이 연구가 실패하지 않을까 두려워 고민하다가 시간이 많이 가버렸는데, 너는 그런 게 없더라고. 넌 도움이 필요할 때 다른 사람한테 가서 쉽게 물어보고 일을 빨리 빨리 진행시켜. 그런 점을 보고 나도 ‘생각은 그만하고 실행에 옮겨야겠다’라고 널 따라하게 됐어!”라고 말했다.

공동연구를 진행했던 친구 조이(빨간 티셔츠)
공동연구를 진행했던 친구 조이(빨간 티셔츠)

나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다른 실험실 친구인 조이는 “지산,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네가 연구를 잘하는 것도 있지만, 연구만 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을 잘 챙기고 잘 어울린다는 거야. 네가 연구에만 몰두하고 우리 모임에 오지도 않았다면 아마 너랑 이 자리에서 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겠지?” 라고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이 말했듯이 난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일을 팍팍 진행한다. 필요시 재빠르게 공동연구를 요청하고, 공동연구자와도 끈끈하게 잘 지낸다. 박사과정 중 가장 보람된 순간은 내 이름이 들어간 논문이 나왔을 때보다 공동연구를 통해 좋은 결과를 만들고 공동연구자와 데이터를 공유할 때다.

객관적으로 나를 보니 범생이 연구원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엄청나게 똑똑하지도,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브 호킹처럼 한 우물만 파지도, 홀로 연구하는 것이 재미있지도 않다. 난 다양한 연구원들과 일할 때 재미있고, 서로 의견을 공유하면서 배울 때 신난다. 보통 회사가 원하는 인재는 똑똑한 사람보다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팀웍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사 과정 후 교수의 길은 기막히게 똑똑해야 하며 고집불통과 같은 고집도 있어야 한다. 모든 걸 종합해봤을 때 회사 연구원이 나와 더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로리다에서 돌아 온 한 달 후 나는 회사에 맞는 이력서와 cover letter를 준비해나갔다. 새로운 시작에 설렜고 미래가 기대되었다. 그리고 12월부터 “Glass door"이나 "Linkedln" 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이력서를 하나둘 넣기 시작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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