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대만. 브런치 카페에서 바라본 거리. 대만에서는 남녀노소 오토바이를 탄다. 그래서인지 20도만 되어도 다운재킷을 입고 다님.
12월의 대만. 브런치 카페에서 바라본 거리. 대만에서는 남녀노소 오토바이를 탄다. 그래서인지 20도만 되어도 다운재킷을 입고 다님.

위기 다음에 기회라는 말이 스포츠 세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0여 년 가까이 꾸려오던 무역회사를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막다른 상황에서 IMF 위기를 맞았습니다. 저에겐 그 위기가 기회가 되었고, 무역회사를 유지하며 스틸 볼 수출만으로도 연 매출 10억을 초과하였는데 홀로그램까지 가세를 하자 법인으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기존의 개인회사 이름을 버리고 새로 회사명을 취하였습니다. 또한, 분양받은 아파트형 공장으로 이전하는 성장을 하였습니다.

홀로그램 섬유와 비슷한 시기에 천안에 있는 담배인삼공사 공장에 홀로그램 박(Hot Stamping Foil)을 납품했습니다. 20여 년 피우던 담배를 끊었던 때라 ‘디스’라고 하는 담배가 천원이 넘어가는 고급담배인지도 몰랐습니다. 미색 바탕에 약한 줄무늬가 있던 거로 기억하고 하드케이스에 ‘디스’라는 상호를 홀로그램 박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개발단계에서 일정 시기까지는 을지로 인쇄공장과 천안 공장에서 작업하였습니다. 납품은 담배인삼공사에 벤더로 등록한 업체를 통하였습니다. 대만 회사에서는 한국 시장의 비약적인 성장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임대공장을 사용하던 대만회사는 근처 요지에 자체 사옥을 지어 이전하였고, 더 큰 자본을 끌어들이려고 상장을 추진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자고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내가 자본을 더 투자할 거 없이, 기존 재고와 한국 시장 가치를 인정 25%의 지분을 소유하고, 75% 지분은 대만에서 현금으로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대만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CEO는 내가 맡지만 형식상 부사장 역의 직원 한 명을 대만에서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대만 상황을 잘 아는 저에게 한국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묻기에 초창기 나를 많이 도와주었던 더글라스를 추천했습니다. 후에 상술하겠지만 더글라스는 당시 다른 대만회사로 이직하여 중국 책임자로 파견되어 중국 천진에서 근무 중이었습니다. 더글라스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한국에 와서 도와달라고 했더니 아주 기뻐하였습니다. 조건은 대만 본사와 협상하라고 하고 대만에 더글라스를 한국 지사 직원으로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지사는 제 사무실을 사용하여 설립하기로 하였습니다. 전 월급도 받고, 10여 명의 직원과 창고를 겸할 수 있는 조건의 제 사무실에서 임대료도 챙길 수 있어 누가 봐도 룰루랄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지사 설립과 동시에 한국에서 홀로그램을 생산하려고 공장 부지를 알아보고 경기도 모 공단에 계약도 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까요? 한국지사를 설립한 후 몇 개월 지나서 담배인삼공사에 납품하던 홀로그램 박이 중단되었습니다.  담배인삼공사 천안공장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가의 기계를 독일에서 수입하였는데 우리 제품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불량이 나온다며 미국제품으로 교체했습니다. 예를 들면 1분당 5천 개의 담뱃갑에 박을 칠 수 있는 기계로 3천 개밖에 못 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 속도를 내면 불량률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국 영업실적이 뚝 떨어지고, 아침마다 대만 본사와 회의를 하는 더글라스는 담배만 거듭 피웠습니다. 더글라스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외국인 회사라고 기대하며 들어온 젊은 직원들에게 본사의 지시를 전한다고 하루아침에 영업이 늘어날 일도 없고, 나이로나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고려하면 나에게 함부로 대들거나 말을 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누구의 지시나 눈치도 안 보고 살아왔던 저는 제가 지명해서 데려온 직원이 맨날 욕먹고 고생하는 것이 내가 당하는 것보다 더 화가 났습니다. 갑자기 누가 나를 감시하고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의 성격도 그렇지만 능력도 부족한 제가 버거운 감투를 쓴 초라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이대로 머리를 굽히고 월급과 임대료만 좇는다면 내 인생 비참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글라스에게 이쯤에서 지사 접고 중국에서 함께 할 사업을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더글라스는 퇴사 후 한국에서 준비한 아이템으로 중국 선전(심천)에서 회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중국인 부인과 먼저 이주하였습니다. 저는 한국에 남아서 회사 지분을 정리하고 선전으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6~7년을 이어온 대만 회사와의 합작은 1년여 CEO 생활로 마감합니다.

비록 결말은 Sad Ending이었지만 그동안의 다양한 경험과 인간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기에 항상 고마운 마음입니다.

중국 선전으로 옮긴 이유를 덧붙입니다. 중국 쑤저우(蘇州) 호텔에서 각국 지사장이나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 어떤 꾀죄죄한 중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국어 억양도 다르고 차림이 워낙 1960년대 남루한 복장에다 까치집 머리라서 말을 해도 누가 귀담아듣지도 않더군요.

저는 잘 못 알아들으니까 오히려 귀를 기울이고, 알아듣는 말이 나오면 그게 고마워서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물론 남에게 무시당하는 안쓰러움이 컸지요. 그 이후로는 잊어버렸습니다.

몇 년 후에 새로운 비즈니스를 위해 심천의 한 공장을 방문했는데 그 공장의 오너가 까치집 머리였습니다. 알고 보니 중국의 홀로그램 연구 1세대이며 박사였습니다. 기억을 못 하는데 저를 보자마자 쑤저우 호텔을 언급하며 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습니다. 비록 저의 손을 떠났지만 지금도 그 박사와 한국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딸과 심천에 갔을 때 그 부인과 가족들까지 데리고 나와 식사자리를 만들어주더군요.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donghokim7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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