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으로 나뉜 최운산 장군의 업적

봉오동 신한촌을 무장독립군기지로 건설하고 장기간 무장독립군을 양성한 최운산 장군은 1919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사병부대를 즉시 대한민국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전환했다. 192067일의 봉오동전투에서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중심에서 각 부대를 배치하고 참호를 파는 매복 작전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휘부는 사령관 최진동, 참모장 최운산, 참모 최치흥을 비롯한 전 대한군무도독부 지휘부라는 사실이 이제야 재조명되고 있다.

그동안 후손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최운산 장군과 鳳梧洞 독립전쟁에 대한 사료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2015년 최운산 장군이 사용한 8개의 이명으로 남긴 기록을 확인하던 중 최운산 장군이 최문무라는 이름으로 일제에 검거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후손들이 가족사를 통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사료에서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은 언제나 새로운 경이로움이다

당시 최문무라는 독립군 대장에 대한 기사는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세 신문이 동시에 기사화할 만큼 중대 사안이었다. 다음은 최문무의 재판에 대한 1925410일자 매일신보 보도 내용이다.

무장단의 괴수(魁首), 8년 징역에 불복항소, 함북 온성군 유포면 하탄동 최문무와 동군 남면 북창평 최태여, 두 명은 지나 간도 도독군부의 주요 간부로 만 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모집한 사건으로 청진지방법원에서 최문무는 징역 8년 최태여는 징역 오년의 판결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는데, 이제 그 사실을 물은 즉 최문무최태여 두 명은 모두 극단적 배일사상을 품고 대정 8년에 지나 간도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에 가서 그곳 독군부에 가입하여 부하 650여 명의 무장단을 거느리고 독군부 수령으로 있는 최명록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최문무는 모연대장 최태여는 재무부원으로 임명되야 혹은 공모 혹은 각각 나누어서 수십여 명의 무장한 부하를 인솔하고 권총, 장총, 폭탄 등을 휴대하고 간도 일대로 횡행하며, 대정 8(1919) 11월부터 작년 십일월 중순까지 촌리의 부호를 협박하고 전후 십여 차례에 합계 9,272원을 강탈하였고 그중 대정 99(1920)에 일본 관헌의 토벌대가 간도에 주둔하게 되매 그들은 모두 노령 방면으로 가서 의연히 조선독립운동에 노력하다가, 작년 9월에 다시 간도로 가서 일본관헌의 경비상황 조사와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다가 검거된 것이라는데, 이들과 같이 사십 명의 무장단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며 만원이란 거금의 군자금을 강탈한 사실은 드물게 보는 큰 사건이라더라.” (매일신보 1925410)

1925년 4월 10일 매일신보 기사
1925년 4월 10일 매일신보 기사
해당 기사 부분 확대
해당 기사 부분 확대
해당기사 확대
해당기사 확대

이 기사는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명록이 이름을 최진동으로 바꾼 것도, '무장단의 괴수' 최문무가 최운산이란 것도, 최진동과 최문무가 친형제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최문무는 최명길, 최만익, 최빈, 최풍, 최고려, 최운산, 최복 이란 여러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다. 이 기사에 최문무의 부하 재무부원으로 등장한 최태여는 최운산의 큰아버지 최준권의 손자로 최운산과 나이가 동갑인 장조카다. 일반적으로 자금을 관리하는 일은 어디서나 가족 중에서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일이다.

최운산 장군도 그랬다. 군자금을 관리하던 삼촌과 조카가 함께 체포가 된 것이었다.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최운산 장군은 경성복심법원에서 감형이 되어 3년 간 투옥 당했다. 조카인 최태여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최씨 집안에서는 최운산의 조카 최태여 외에도 종제 최광보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일가친척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구체적 기록을 찾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1920년4월10일자 동아일보
1920년4월10일자 동아일보
1925년 4월 10일자 조선일보
1925년 4월 10일자 조선일보

2008년 정부에서 최문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후손들이 서훈을 신청한 것이 아니라 보훈처에서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세 신문이 보도한 최문무의 재판 기록과 중국 사료에서 대한군무도독부 제1대대장 최문무의 활동을 확인해 서훈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운산과 최문무가 동일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따로 서훈을 진행했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최문무는 최운산 장군의 이명이니 동일인이 이중으로 서훈된 것을 알렸다. 보훈처는 처음엔 놀라고 당황했으나 곧 최운산과 최문무는 동일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후손이 따로 있다고 한다.

2009년 보훈처 직원이 연변에 가서 최문무의 후손을 찾아 10년 이상 유족연금을 이중으로 지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최문무의 외손자라는 사람이 연금수급권자이고 한국에 나와 살고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후손이 있다니... 어찌된 일인지  정말 궁금했으나 보훈처는 개인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우연히 연변 출신 독립유공자 후손모임에서 활동하는 고종사촌을 통해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류모 씨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그 집안에서 최문무의 친손자가 있는데 외손자인 류씨가 유족 연금 수급권자로 지정된 것에 대해 보훈처에 가서 항의도 하고 사촌들 간에 분란이 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18년 가짜 독립유공자에 관한 취재를 하던 모 방송사 제작진이 류씨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류씨가 최문무의 업적도 잘 모르고 자신의 어머니가 외동딸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등 문제를 드러내더니 보훈처 담당자와 통화를 한 후 자신은 보훈처와 역사학자 박 모 교수가 인정해준 사람이니 그들에게 가서 따지라고 하면서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훈처의 담당자는 제작진의 정식 취재요청에 답을 주지 않았다. 더 많은 추가 취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방송 일정에 쫓겨 더 이상 추가 취재를 못하고 멈추었다.

최문무가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대한군무도독부 부하 중에 같은 이름을 쓴 부대원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손이 뒤늦게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 인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훈처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한 최문무의 업적은 최운산 장군의 활동이다. 이에 대해 2019년 이계형 교수(국민대학교)최운산과 최문무는 동일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공한 역사학자들도 사료를 검토하고 최문무가 최운산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보훈처는 요지부동이다.

사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고 독립을 이뤄낸 최운산 장군은 대한민국의 보훈 행정과는 오랜 악연에 시달리고 있다. 1960년 박정희 정부가 독립유공자 서훈 작업을 시작할 때 총무처에서 서훈 업무를 관장했다. 1961년 최운산 장군의 아들에게 서훈심사위원회를 통과했으니 총무처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당시 총무처 담당 공무원이 최운산 장군의 서훈을 조건으로 뒷돈을 요구했다. 온 일생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최운산 장군의 헌신을 인정받으려면 뇌물을 바치라는 요구였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최운산 장군의 아들 최봉우는 그 자리에서 담당 직원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서훈이 취소되었다. 이후의 서훈 신청이 계속 거절당하는 등 정말 지난한 시간이 이어졌다. 1969년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가 대한북로독군부의 사령관인 최진동 장군과 간도 제일의 거부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업적과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는 진정서를 요로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도록 최운산 장군의 서훈이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16년 후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현재 최운산 장군의 서훈 등금은 애족장, 최하등급이다부산의 6배에 달하는 토지와 대구모 러시아 무역업, 수많은 생필품 기업을 운영한 모든 재산을 바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하고 봉오동과 청신리 독립전쟁의 승리를 조국 대한민국에게 안겨준 위대한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헌신에 대한 대한민국의 응답이 너무나 초라하고 옹졸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최운산과 최문무 이중서훈이라는 오류에 대해 확인하고 수정하기까지는 또 다시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일시적 역사가 왜곡되기도 하고 굽어지기도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진실의 편이었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