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시민’으로 백년 살고 떠난 이종학 선생

종학씨가 부인 김옥희씨와 함께 찍은 사진. 부인은 2016년 작고했다. <사진제공: 셋째 아들이철순씨>
종학씨가 부인 김옥희씨와 함께 찍은 사진. 부인은 2016년 작고했다. <사진제공: 셋째 아들이철순씨>

 

충북 옥천의 큰 어른 이종학 선생이 한 세기의 삶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옥천신문과 손잡고 2018년부터 ‘은빛자서전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자체가 역사이고 작은 박물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80세가 넘은 어르신들의 구술(口述)을 풀어낸 자서전을 옥천신문 지면에 게재하고 자녀와 손주 등 후손들이 감사편지를 작성하여 화답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다섯 번째 은빛자서전의 주인공이 되어주셨던 선생의 백년 인생을 정리해보았다.

이종학 선생은 1922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년시절 학교에 다니지 않고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뒤늦게 12세의 나이에 죽향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다. 17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공업학교(현 한밭대학교)에 진학했다. 졸업하고 철도청 대전사무소에 입사해 토목기사로 일하던 선생은 23세 때인 1945년 해방을 맞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고향으로 피난을 왔던 선생은 민족 비극의 현장을 목격했다.

1950년 7월 초순경의 일이다. 선생은 소를 몰고 논으로 일하러 나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몰려오더니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다 보니 언덕에 약 20m 길이의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잠시 후에 트럭 두 대가 전깃줄로 포박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싣고 왔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서 그들을 총살시킨 다음 묻어버렸다. 선생은 그렇게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독재시대가 시작되었다. 선생은 서울에 있는 교통부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고 있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양심은 숨기고 침묵을 지켜야 했다. 가장으로서 평안한 가정을 지키고 일구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하면서,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군인 출신들의 간섭이 횡행하는 직장 생활에 넌덜머리가 났다.

1969년 서울에 살던 시절 아내, 오남매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사진제공: 셋째아들 이철순씨>
1969년 서울에 살던 시절 아내, 오남매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사진제공: 셋째아들 이철순씨>

1974년 고향 옥천으로 돌아온 선생은 평산리 서원골에 밤나무 과수원을 조성했다. 민둥산에 직접 묘목을 심고 접도 붙이며 조금씩 황무지를 개간해나갔다. 집 한 채 없던 그곳에 오두막을 지었고, 진입로를 닦으며 악착같이 일했다. 이렇게 생활의 근거지를 마련한 다음 보다 가치 있는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정했고, 이것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첫째, ‘공부하고 연구하는 농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습관은 풍력과 태양광 등 대안에너지 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다. 2001년 11월 소형 풍력발전기를 세우고 가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심한 관찰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사람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듯이 바람도 대체로 낮에는 불지만 해가 넘어가면 불지 않는다는 현상을 발견한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런 발견이 그로 하여금 2002년부터 풍력만이 아니라 태양광발전기까지 공부하고 연구하게 만들었다.

공부하고 연구하자 태양광발전기도 진화를 거듭했다. 선생은 태양에너지를 보다 많이 받기 위해 일명 ‘해바라기 발전기’라 불리는 태양추적 장치를 개발했다. 2002년 12월 처음 설치한 것은 손으로 움직여야 했던 수동식이었다. 하지만 6개월 후에는 타이머만 맞춰놓으면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상하 좌우로 모두 6번 움직이는 자동식으로 개선했다. 그러자 기존 방식보다 최고 80%가 넘는 태양에너지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2006년 햇빛발전소를 세우면서 기념하여 찍은 사진 <사진제공: 이철순씨>
2006년 햇빛발전소를 세우면서 기념하여 찍은 사진 <사진제공: 이철순씨>

둘째, ‘시민의 기본권을 누리는 농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지만 억눌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다수 국민이 누리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귀농하며 자유인으로 살기로 다짐한 선생은 이 기본권을 마음껏 행사했다. 농사를 짓거나 사업을 하면서 불편한 것이나 요구할 것이 있으면 청산면사무소, 옥천군청, 충북도청은 물론이고 산림청, 한국전력, 산업자원부 등 중앙정부와 공공기관에 수시로 전화를 걸었고 공문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옥천신문, 대청호주민연대, 충북과학대, 에너지대안센터, 지방분권국민운동본부 등 수많은 동반자를 얻었다.

셋째, ‘역사와 동행하는 농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2000년 출범한 ‘조선일보반대옥천시민모임(일명 옥천독립군)’에 최고령 회원으로 가입했다. 민족에 반하는 짓을 많이 했던 조선일보를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까지 얻었으니 친일을 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시민들의 ‘소극적 친일’과 조선일보의 ‘적극적 친일’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대안에너지 활동을 하면서 타 지역 사람들과 만날 때도 항상 옥천독립군임을 자랑했다.

1997년 7월 6일이었다. 전날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개간을 하느라 파헤쳤던 집 앞 언덕이 무너지면서 다량의 사람 뼈가 발굴됐다. 선생은 47년 전 대량 학살된 보도연맹 관련자들의 유골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곧바로 군청과 면사무소에 신고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은 채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당시만 해도 사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죽은 사람의 뼈조차 건드리지 않으려는 피해의식이 강했다. 옥천신문이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한 뒤에야 겨우 여론이 형성됐고, 군청이 나서 정식으로 공원묘지에 안장해주었다. 오래 묵은 마음의 부채를 청산한 순간이었다.

옥천신문은 1999년 창간 10주년 기념식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 역사발굴에 기여한 선생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옥천군도 2006년 선생을 옥천군민대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시상했다. 민주공화국 ‘시민’ 이종학 선생의 명복을 빈다.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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