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단질서’ 로 왜곡된 한국교육의 자화상

1989년 5월 군사정권의 폭압을 뚫고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약칭)가 출범했다. 전교조는「민족교육, 민주교육, 인간화교육」을 표방하며 ‘참교육’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자주적인 교사노동조합이다.

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서 기습적으로 30분만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전교조 교사들 2,000여 명이 결성대회 제2 예정지였던 건국대에 모여 교원노조 결성식을 축하하는 장면이다. 교사대중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지도부 교사들이 미처 들어오질 못했다. (출처 : 민통련 보도자료, 교육희망)
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서 기습적으로 30분만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전교조 교사들 2,000여 명이 결성대회 제2 예정지였던 건국대에 모여 교원노조 결성식을 축하하는 장면이다. 교사대중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지도부 교사들이 미처 들어오질 못했다. (출처 : 민통련 보도자료, 교육희망)

그러나 「전교조」창립이라는 벅찬 감격 못지않게 희생 또한 컸다. 100명이 넘는 교사들이 구속되고 1,500명 넘는 교사들이 파면, 해임되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도종환, 안도현 시인이나 노옥희 울산교육감을 비롯해, 이석문(제주), 박종훈(경남), 김지철(충남), 민병희(강원), 김병우(충북), 장휘국(광주), 최교진(세종), 장석웅(전남), 도성훈(인천) 교육감도 그때 모두 해직되었다.

2018년 인천시교육감 선거 당시 88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인천 촛불교육감 추진위원회> 단일후보로 도성훈 현 인천시 교육감이 후보로 선출됐다. (출처와 해설 : 한겨레 이정하 기자)
2018년 인천시교육감 선거 당시 88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인천 촛불교육감 추진위원회> 단일후보로 도성훈 현 인천시 교육감이 후보로 선출됐다. (출처와 해설 : 한겨레 이정하 기자)

「전교조」 창립은 박정희 군사쿠데타(1961)로 해체된 「4‧19 교원노동조합」을 28년 만에 부활시킨 것이다. 「4‧19 교원노동조합」의 본래 명칭은 「한국교원노조 총연합회」이다. 1960년 4월 학생혁명의 피 값으로 60년 그 해 388개 노동조합이 새로 생겨났다. 그 가운데엔 은행, 신문사, 교사 등 화이트칼라 노조도 등장했다.

「4‧19 교원노동조합」을 가장 먼저 출범시킨 주체는 대구지역 초중고 교사들이다. 그 중에서도 고등학교 교사들이 제일 먼저 노조창립에 나섰다. 이유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맨 먼저 저항한 대구 2‧28 학생데모(1960)와 관련이 깊다. <대구 2‧28 데모> 당시 대구지역 교사들은 고등학생들 시위를 가로막았던 부끄러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박정희 쿠데타 직후 가장 혹독하게 탄압이 집중되었던 공간 역시 「4‧19 교원노동조합」을 주도한 대구 지역 교사노조였다.

「전교조」가 그 정신을 이어받은 「4‧19 교원노동조합」은 해방 공간 최초로 구성된 자주적인 교사단체인 「조선교육자협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교육자협회」- 「4‧19 교원노동조합」- 「전교조」로 그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전교조가 세월호 7주기를 맞아 실천한 피켓팅 장면(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교조가 세월호 7주기를 맞아 실천한 피켓팅 장면(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그런데 해방공간 이만규 선생이 주도한 「조선교육자협회」가 「국대안 반대투쟁」(1946-1947) 당시 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의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 1947년 하반기 「국대안 반대 투쟁」이 좌절되자 미군정당국은 1947년 9월 학원 내 ‘빨갱이 색출’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서청(서북청년단의 줄임말)은 1947년 2차 「국대안 반대 투쟁」 당시 학원 내 빨갱이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서울대학교를 비롯해 서울시내 중등학교에 6,000명이 넘는 서청 회원들을 편입학시켰다. 「국대안 반대 투쟁」이 진압되고 1947년 빨갱이로 분류돼 복교가 불허된 서울대학교 학생 천명 넘게 쫓겨난 그 자리에 서청 출신 학생들이 대거 편입해 들어간 것이다.

편입학 시험은 형식적이었다. 미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유길준의 아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 학력을 인정해 주는 증명서와 서청위원장 선우기성의 확인증만으로도 편입학이 가능했다. 대학가를 비롯해 학원을 장악한 우익청년들은 서울대학교 사범대 신기범 교수를 살해했다. 1947년 11월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친일경찰들은 서울대 사범대 교수 장형두를 고문 끝에 죽였다. 그 당시 경위 계급 중간간부급 가운데 일제 경찰 출신들이 전체 80%를 넘었다. 1949년 11월 이승만 정권에서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심지어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 정권은 눈이 뒤집혀 국문학자 조윤제(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장)조차 체포했다.

실제로 백색테러가 횡행하던 시절 동아일보 옛 사옥 옥상에선 서북청년회로 추정되는 우익 청년들이 빨갱이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다 매일 린치를 가했다. 광화문 옛 동아일보 사옥 큰 길 가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자지러진 비명소리를 듣곤 했다. 동아일보 사옥엔 서북청년회 사무실이 있었는데 옥상에서 구타당하던 사람들이 내지르던 비명소리였다.

의열단장 김원봉이 북행길에 오르고 진보적 민족주의자 이만규 선생도 황급히 일부 가족만 데리고 북행길에 올랐다. 6‧25 전인데도 남북이산가족이 돼버렸다. 이만규의 외손자가 가수 서유석이다. 서유석의 어머니 이철경, 이모 이미경 두 자녀를 남겨둔 채, 한 때 친분이 있었던 장택상(당시 미군정청 수도경찰청장)의 도움으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38선을 몰래 넘은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민족주의 한글학자 정열모, 조선 최고의 한글운동가이자 국어학자 이극로 역시 전혀 좌파적 색깔을 띠지 않았음에도 북을 선택했다.

‘빨갱이 색출’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가 창궐하는 속에 대학을 비롯해 학원가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경직돼버렸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11월 말까지 ‘좌익 자수 기간’을 일방적으로 지정해 놓고 ‘빨갱이 색출’에 골몰했다. 이 기간 동안 서울대에서만 문리대 교수 14명, 사범대 교수 23명, 법대 교수 9명, 상대 교수 8명, 공대 교수 4명, 의대 교수 2명, 농대 교수 1명을 자수시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우리가 잘 아는 한글운동가이자 국문학자 이병기, 국문학자 양주동,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윤동주가 흠모했던 시인 정지용, 문학평론가 백철, 소설가 염상섭, 박태원, 시인 김기림 등이 활동 공간은 달랐지만 모두 「보도연맹」출신들이다. 이들 가운데 박태원을 제외하곤 모두 우익 쪽 학자이자 문인들이다. 그만큼 이승만 정권시절 <빨갱이 사냥>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해방 공간 자주적 교사조직인 「조선교육자협회」는 한반도 전체 초중고 교사 1/3이 가입할 정도로 조직력이 탄탄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과 그들의 비호를 받은 서북청년회의 탄압으로 1947년 10월 지도부 58명이 체포되자 11월 지하화 했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영락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1946년 11월 결성되었다.

2015년 8월15일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열린 <해방 70년 감사 예배 모습>.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 즉 한기총은 이 자리에서 <1회 대한민국 건국 공로대상> 시상식도 가졌다. 한경직 목사는  1989년 한기총 창립을 위한 창립준비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기총 창립에는 당시 안기부 종교담당요원이 관여하였다. 한기총 역대 회장들은  독재자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주도하거나 참석한 인물들이며  상당수가 교회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한  인물들이다. 이승만 반공국가의 탄생에는 서북청년회 등 월남 인사들의 역할이 컸다. 전광훈 목사가 한기총 회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태극기 부대를 비롯해  반공이념이 한국 기독교 저변에 흐르는 큰 흐름이었다. 다만  전광훈 목사가 한기총 회장이 된 이후 강렬한 사회여론에 부딪혀 현재 한기총은  대다수 주류 교단이 탈퇴해 극히 쇠락한 처지로 전락했다.(출처 : 조현 한겨레 기자)
2015년 8월15일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열린 <해방 70년 감사 예배 모습>.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 즉 한기총은 이 자리에서 <1회 대한민국 건국 공로대상> 시상식도 가졌다. 한경직 목사는  1989년 한기총 창립을 위한 창립준비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기총 창립에는 당시 안기부 종교담당요원이 관여하였다. 한기총 역대 회장들은  독재자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주도하거나 참석한 인물들이며  상당수가 교회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한  인물들이다. 이승만 반공국가의 탄생에는 서북청년회 등 월남 인사들의 역할이 컸다. 전광훈 목사가 한기총 회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태극기 부대를 비롯해  반공이념이 한국 기독교 저변에 흐르는 큰 흐름이었다. 다만  전광훈 목사가 한기총 회장이 된 이후 강렬한 사회여론에 부딪혀 현재 한기총은  대다수 주류 교단이 탈퇴해 극히 쇠락한 처지로 전락했다.(출처 : 조현 한겨레 기자)

결성 초기 서청 사무실은 한민당 사무실이 있던 옛 동아일보 사옥(광화문 누렇게 빛바랜 건물)에 있었다. 이승만은 서북청년단 청년들을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한껏 치켜세웠다. 게다가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서청이 없으면 치안유지가 안 된다”고 실토할 정도로 드러내놓고 비호했다.

백범 김구는 서북청년단 창립대회에 참석했고 이승만, 한민당처럼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백범을 살해한 안두희 역시 서청 출신이었는데 서청이 분열할 때 평안청년회 소속 김구 계열이 아닌 이승만 계열에 속했던 월남한 청년이었다.

그렇게 한국교육이 일그러지는 첫 시발점인 「국대안 사건」은 서북청년단과 관련이 깊다. 「국대안 사건」이후 한국 교육은 ‘자주성’과 ‘중립성’을 상실한 채, 반공 일색의 이데올로기 교육으로 편향되었다.

1947년 11월 「조선교육자협회」가 지하화 된 그 시점에 미군정청 문교부장 오천석은 친일교육자 조동식을 사주해 관변교원단체를 창설했다. 이른바 「조선교육연합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으로 최규동을 앉혔다. 「조선교육연합회」는 일제 강점기 시절 친일교육자 단체인 「조선교육회」가 해방 직후 해체되고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결성되었다.

「조선교육연합회」는 이듬해 「대한교련」으로 명칭을 바꾼 뒤 독재시절 철저히 권력에 밀착한 채, 학교교육을 통제하는 외곽장치로 기능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5월 「전교조」 창립에 충격을 받고 조직을 쇄신하면서 그 해 12월 「한국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약칭)으로 다시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웃픈 일은 2015년 박근혜 정권 시절 교육부와 「한국교총」의 황당한 교육행사였다. 친일교육자이자 관변단체인 「교총」 초대 회장 최규동(제3대 서울대 총장)을 <이 달의 스승>으로 선정해 논란을 자처한 것이다.

최규동은 일제강점기 시절, “죽음으로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강변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절 조선 청년학생들을 “황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제국 군인으로서 내선일체를 강조”한 뻔뻔한 친일교육자였다.

그런 인물을 교육부와 한교총은 ‘헌신적인 교육자의 표상’으로 둔갑시켰다. 더군다나 친일교육자 최규동을 ‘민족운동가’, ‘민족의 사표’, ‘조선의 페스탈로치’라는 화려한 문구와 함께 포스터 수만 장을 전국 1만 개 넘는 초중고 학교와 도서관, 그리고 주민센터에 배포했으니 한국교육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모두 교육정의가 무너진 결과였다.

1989년 「전교조」 창립으로 해직되자 글쓴이는 거리의 교사가 되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구로 지부」 사무실에서 구로고등학교 제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남부지검으로부터 검찰 소환장을 받았다. 조사를 받는 도중 검사가 비아냥대듯이 말을 툭 던졌다.

“교사가 왜 노동조합을 만드냐고! 일교조가 노동조합이 아니잖아! 미국도 노동조합이 아니라 연맹이잖아!”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일교조는 「일본 교직원조합」의 약칭이지만 분명 일본 교사노동조합이었다. 50-80년대 일교조는 사회당 외곽조직으로 학교장도 가입할 정도로 탄탄한 조직력을 갖췄고 일본 교육개혁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80년대 말 조직이 흔들리면서 90년대 중반 이후 사회당의 몰락과 함께 일교조도 지리멸렬되었다. 오늘날 일교조가 몰락한 모습은 학교에서 히노마루(국기)가 게양되고 기미가요(국가)가 공식적으로 제창되는 모습과 관련이 깊다. 균형을 상실한 채 우경화로 치달았던 게 90년대 이후 현재 일본의 모습이다.

미국 교원노조 역시 명칭은 미국교사연맹(AFT)이지만 교사노동조합으로서 미국노동총동맹 - 산업별조합회의 (AFL - CIO)에 가입해 있었다. 사법시험 2차 시험 선택과목으로 <노동법>이 아무리 점수가 잘 나오지 않는 과목이라 선택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너무 막가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한 마디로 논리가 서지 않으니까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이해했다.

반박하면 없는 죄도 더 그럴 듯하게 포장해 기소할 것 같았다. 그 공안검사는 1년 뒤 부장검사로 승진해 있었다. 30년이 지났지만 그 검사 이름이 잊히지 않는다. 모두 분단 질서가 낳은 슬픈 코미디이다. 그런 슬픈 코미디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페스탈로치는 스위스 교원노동조합을 만든 인물이자 초대 회장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선 금기시된 사실이다. 오로지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가르친 성자로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페스탈로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제1의 권위자인 김정환 명예교수(고려대, 2019년 작고)는 페스탈로치를 낡은 교육질서를 해체시키려고 고군분투한 <전투적 교사상>으로 표현하였다.

그렇게 기술하는 것이 페스탈로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그분의 진면목을 읽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역설했다. 1970년대에 펴낸 『교육의 철학과 과제』에서 낡은 질서를 해체시키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펴낸 『인간화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와 『전인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페스탈로치를 <전투적 교사상>으로 표현했다.

 

90년대 고 김정환 명예교수(고려대)가 펴낸 <전인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책 표지 (출처 : 내일을 여는 책)
90년대 고 김정환 명예교수(고려대)가 펴낸 <전인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책 표지 (출처 : 내일을 여는 책)

대학에서 교직과목을 이수할 때 이 땅의 모든 예비교사들은 ‘조선의 페스탈로치’ 이만규는 몰라도 존 듀이(J. Dewey)를 배운다. 아동중심교육, 진보주의 교육 사조를 공부하면서 존 듀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 교사노동조합이 만들어졌을 때 듀이가 최초로 노조에 가입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대학에서 가르쳐주질 않기 때문이다. <미국교원노동조합 제1호 가입자>라는 사실은 듀이의 교육관을 이해하는 지름길임에도 왜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모두 분단이 낳은 학문 왜곡이자 비극일 따름이다.

그런 학문의 왜곡 가운데엔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격언도 들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후대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농간임에도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두 분단 질서가 낳은 기형적인 학문의 소산이다. 아인슈타인이 순수과학자가 아님에도 한국인들 머릿속엔 그런 이미지로 가득한 게 우리네 현실이다. 강제 이식된 허상을 마치 진실인 양 받아들이는 것은 <이데올로기 교육>이 잘못된 때문이다. 우리 의식 속에 박힌 왜곡되고 굴절된 것이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아인슈타인은 1949년 5월 미국 좌파월간지 『Monthly Review』창간호에 「왜 사회주의인가?」(Why Socialism?)를 기고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무정부상태가 진정한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런 근원적인 악을 제거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확신하면서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사회주의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1929년 미국대공황을 맞아 ‘보이지 않는 손’이 실종되면서 드러난 근대자본주의의 맹점을 비판한 것이리라!

아인슈타인은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혐오했고 반전평화를 부르짖은 존경할 만한 ‘인도주의 과학자’였다. 1931년 <국제반전주의자협회>에 보낸 편지글에서 아인슈타인은 전 세계 과학자들로 하여금 무기개발에 참여하지 말 것을 호소했던 인물이다.

생의 말년엔 영국의 지성, 버트란트 럿셀과 함께 핵무기 개발 중단을 강대국들에 촉구했다. 바로 핵무기 개발 중단을 촉구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1955)을 발표한 게 그것이다. 실제로 생의 마지막까지 미연방수사국 FBI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분류돼 사상을 의심받은 인물이자 인생의 말년까지 지속적인 감시와 미행을 당했던 게 아인슈타인이다.

헬런 켈러를 이야기하면 더욱 한국 사회 왜곡된 인식에 놀랍다. 한국 사회 어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헬런 켈러 여사는 설리번 선생님과의 일화와 함께 3중 4중의 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화신’ 내지 ‘성녀’로 기억한다.

그런 면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헬런 켈러의 진정한 모습만도 아니다. 오히려 헬런 켈러는 1909년 미국 사회당에 입당한 사회주의자였다.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요구하며 여성 참정권을 열렬히 옹호했던 인물이자 전투적인 여성 참정권론자였다.

나아가 제국주의 전쟁으로 치닫는 미국의 태도를 비판했던 반전주의자이자 일체의 파시즘을 경멸했던 평화주의자였다. 특히 그녀는 미국 사회 내에 소외된 약자와 사회적 소수집단의 권리를 위해 평생 투쟁했던 사회운동가였다. 1917년 차르체제가 붕괴되고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열광했던 인물이자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읽었던 사회주의자였다.

러시아 혁명 당시 미국인 기자(존 리드)가 숨가쁘게 전개된 혁명의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해 기록한 <세계를 뒤흔든 10일> 책 표지(출처 : 하성환)
러시아 혁명 당시 미국인 기자(존 리드)가 숨가쁘게 전개된 혁명의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해 기록한 <세계를 뒤흔든 10일> 책 표지(출처 : 하성환)

분단 질서는 이토록 한국 사회 대중의 의식을 편향된 한 쪽 방향으로 고정시킨 측면이 크다. 이제 선악의 흑백논리에 갇힌 일천한 의식에서 벗어나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우리들 의식을 풍요롭게 해야 할 시기이다. 우리 교사들이 앞장서서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변화할 때 아이들도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성숙해 갈 것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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