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쓸이 지나가는 학생의 날

오늘은 광주학생운동기념일이다. 91년 전 16살 전후 어린 중고생들이 ‘일제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외치며 식민통치에 항거했던 날이다. 해를 넘기면서 감행된 항일시위는 1600명이 투옥되고 3천 명 가까이 퇴학 또는 무기정학을 당했으며 5만 4천명에 이르는 조선의 학생들이 참여한 일대 사건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3•1 시민혁명 다음으로 그 시위규모나 저항의 강도가 컸던 사건이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물었다. 학생의 날이 언제인지 아느냐고! 교실엔 짧은 침묵만이 흘렀다. 아는 아이가 없었다. 중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냐고 물으니 역시 침묵만 흘렀다.

요즘 통합사회 <세계화> 단원수업을 하다가 신자유주의를 설명하기에 좋은 영화 『브래스트 오프』를 보았냐고 물었다. 한 명도 없다. 물어본 교사가 잘못이다. 세대 차이를 감안하지 않은 채 무심히 질문을 던진 탓이다. 다시 『빌리 엘리어트』를 보았냐고 물었다. 몇몇이 손을 든다. 아이들에게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세 얼간이』 못지않게 좋은 수업 자료이다.

신자유주의가 한 가정을 어떻게 파괴해 가는지 왜 광산 노동자들은 파업에 나서게 되었는지 설명하기에 좋은 교육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세계화나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기보다 ‘참된 교사상’을 이야기하기에 딱 좋은 영화이다.

발레를 배우고 싶으면 교육비를 가져오라고 이야기하는 평범하게 보이는 발레 교사가 어느 날 빌리에게 대가없이 발레를 가르친다. ‘사내아이가 무슨 발레냐’며 ‘그런 것은 여자아이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이 통하지 않던 아버지를 찾아가 정성을 다해 설득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교사다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스스로를 성찰하게 한다.

가부장제 질서에 찌든 빌리에게 발레를 공부하는 것은 너무도 험난한 과정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발레교사 윌킨슨 부인은 빌리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자발적으로 발레를 가르친다. 집에 찾아가 아버지를 설득하고 무시를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영국 왕립 발레학교 추천서를 써주고 오디션을 보라고 여비까지 쥐어준다. 그저 평범한 발레교사가 아니다. 진정한 교사의 모델이다. 발레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재능을 지닌 아이를 위해 편견과 어려움에 맞서 싸우며 아이를 가르치고 길러낸다. 그 정도면 참으로 멋진 교사상이 아닐까 싶다

광주학생운동의 성지 광주에선 오늘 초중고 할 것 없이 모두 <학생의 날> 기념식을 교육행사로 치른다. 글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학생회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훌륭하게 치러낸다. 교육운동의 활화산 서울 남부지역 중고교에선 조촐하지만 선생님들이 돕고 학생회가 나서서 등교하는 아침에 깜짝 이벤트를 진행하는 곳도 적지 않다. 거기까지이다. 그리곤 서울 어느 곳에서도 그리고 전국적으로 어느 곳에서도 학생의 날 기념행사는 거의 없다.

▲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등이 1926년 11월에 조직했던 학생비밀모임 ‘성진회’ 회원들. <성진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끈 조선인 학생 비밀결사체였다. 원안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 선생.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훈장 대신 감옥에 갇혔고 한국전쟁 발발 당시 총살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제공(한겨레 신문에서 재인용)

기념행사가 없으니 자라나는 아이들도 학생의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왜 11/3일인지 더더욱 알지 못한다. 하물며 비밀독서서클 ‘성진회’를 어떻게 알 것이며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장재성’을 어떻게 알 것인가! ‘장재성’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훈장 대신 학살당한 것이다. 그 억울한 죽음도 신원되지 못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성평등교육을 누구보다 앞장서 실천했고 학생인권을 위해 30년 삶을 오롯이 바친 교사에게 교육청은 학부모 민원이 들어오자 성비위를 저지른 교사로 곧바로 경찰에 고발했다. 해당교사에게 소명할 기회조차 주질 않았다. 심지어 해당학교 성고충 심의위원회에서 ‘성희롱이 아니라’고 결론이 났음에도 교육청은 이를 기다려주지도 않았고 무시했다. 자신들은 교육부에서 내린 성범죄 대응 매뉴얼대로 처리했다며 아무 잘못이 없단다. 그리곤 경찰에 고발되었으니 직위해제 조치를 내렸다. 자신들이 앞장서서 경찰에 고발해 놓고선!

그 교사는 1년이 넘도록 교육청 앞에서 피켓을 들어야했고 몸과 마음이 서서히 부서져갔다. 어느 날 고등학생 아들이 물었다. “아빠 힘들지 않으세요?” 이미 그 교사는 간과 콩팥이 망가져버렸다. 그 교사가 수업시간에 도입단계에서 보여준 『억압받는 다수』란 영화는 야동이 아니다. 누구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11분짜리 프랑스 단편영화이다. 미러링 기법으로 가모장제 사회의 차별을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교사를 고발한 교육청 관료들은 “검찰의 판단을 기다려보자”며 해당교사를 사갈시했다. 1년이 지나 검찰은 “성비위로 볼 수 없다”며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엔 사과를 해야 할 교육청 관료들이 사과는커녕 다른 학교로 발령을 내면서 교육청 징계위에 중징계를 요구했다.

▲ 광주광역시 교육청의 행정폭력을 규탄하며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 장면(출처 : 성평등교육과 배이상헌 교사를 지키는 시민 모임)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직위해제를 단행했다. 혁명의 도시 빛고을 광주에서 벌어진 참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아우성을 치니까 다행스럽게도 직위해제를 내린 지 몇 시간 만에 직위해제를 풀어줬다. 직위해제를 할 정도는 아니란다.

우리 아이들이 <학생의 날>이 언제인지 왜 11/3일이 <학생의 날>인지 그 유래를 모른 채 살아간다. 몰라도 굳이 살아가는 데 커다란 지장은 없다. 그런 세상이 돼버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식의주가 편안하면 만족하며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라 <생각하는 동물>이고 <가치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위 사건은 우리 교육계 일단을 가늠해 보게 하는 사건이다. 관료행정이 폭력적으로 자행되고 그 와중에 현장 교사는 고립된 채 고통을 겪는다. 우리 교사들은 어느 순간 위에서 시키는 일이면 지성의 작동을 멈춘 채 자신에게 닥친 일을 처리해 버리곤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부터 그래왔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상이었음을 고백한다.

교육의 본질을 무질러버리고 학교현장을 황폐하게 만든 교원성과급제도나 학교폭력예방 우수교원 가산점 제도도 모두 그런 영혼 없는 교육 관료들이 만들어 낸 작품들이다. ‘교육 아닌 것을 교육인 것’처럼 위장하는 데 능숙한 것에 우리 교사들은 오래 전 구토 증세를 느껴왔다!

물질이 인간의 영혼을 압도하는 사회를 살아간다지만 어느 순간 교육의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사회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우리의 마지막 영혼마저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선 그리고 교사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는 모순된 현실 앞에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했다. 그게 살아 있다는 증표라며!

우리학교는 점수에 연연해하지 않는 순한 교사들만 있는 것 같다. 가산점 신청을 호소할 정도이니까. 그러나 서울 어느 학교에선 폭력예방 우수교원 가산점 신청을 두고 서로 다투는 볼썽사나운 광경을 연출했다고 한다.

우리 학생들이 부모님 생신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알고 기억하듯이 우리 학생들이 오늘이 <학생의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갔으면 한다. ‘자기주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아이들이야말로 세상을 건강하게 살아가고 또 건강하게 가꾸어 갈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본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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