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표(師表)가 된 어느 선생님을 추억하다

90년대 중후반 영등포여고에서 겪은 사건입니다. 학년 초 정부반장 선거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당시엔 반장 입후보자격에 성적제한이 있었습니다. 상위 30% 이내 학생들만 출마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마디로 공부를 못한 아이들은 출마 기회 자체가 박탈되었던 시절이었지요. 수십 년 묵은 교육계 적폐였습니다. 공부를 못하면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논리가 교육현장을 지배했으니까요. 사실 교직경험으로 볼 때 성적과 리더십은 전혀 무관한데도 말이지요. 아마도 한국 사회 지배이데올로기인 학벌주의의 폐해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남긴 재동초등학교 졸업생.

이 중에는 역사의 빛이 된 인물도 있지만 역사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성적과 무관한 인물도 있다.(출처 : 하성환)

제가 아는 어느 선생님은 성적을 무시하고 반장을 선출했습니다. 그리곤 임명장 수여를 위해 학교당국에 아이들 선거로 뽑힌 그 아이 이름을 적어냈지요. 학교당국은 후보자격 미달이라는 이유로 임명장을 주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었지요.

그 담임 선생님은 학교의 처사를 이야기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뽑은 학급회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데 다시 회장 선거를 할까 아니면 그대로 우리 학급의 회장으로 인정할까를 물었지요. 아이들 반응은 교육적이고 정답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30대 후반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의 뜻을 받들고 교육자로서 소신을 지키기로 했지요. 낡은 교육관행을 거부하고 학교당국의 횡포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교육적 신념을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임명장 없이 담임선생님은 그렇게 1년을 아이들과 잘 지냈다고 했습니다.

누가 교육자이고 누가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쳤을까요? 굳이 많은 이야기가 필요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성찰 없이 관행처럼 행해지는 많은 학교업무 속에서 그 젊은 선생님은 자신의 교육철학으로 저항하며 교육자로서 소신을 지켰던 것이지요.

저는 그 담임 선생님을 20년이 훌쩍 넘어서 2017년 우리학교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여전히 전교조 조합원 교사로서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지요. 그리고 이듬해 8월 정년을 맞아 학교를 떠났습니다.

영등포여고 시절, 어느 날 1교무실 그 넓은 공간의 선생님들에게 갑자기 그 담임선생님이 요플레(?)를 돌리셨지요. 그러자 주변 선생님들이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답변은 싱거웠습니다. ‘그냥 날씨가 좋아서 하 하 하...’

교육자로서 뚜렷한 원칙과 소신을 실천으로 보여준 그 선생님의 작은(?) 저항과 실천은 오늘날 우리 젊은 교사들에게 가르침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학교일상이 미친 듯이 바쁘기도 하지만 저 자신부터 그렇습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성찰 없이 학교생활을 해왔던 적이 너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연 교사인가?’ 라고 스스로 되묻곤 합니다. 성찰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 스스로 놀란 적도 많았습니다.

우리 현대사가 선생노릇 제대로 하기 어렵게 만든 시절의 연속이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그 선생님의 당당함과 소신 있는 태도는 학급운영이든 학교생활이든 무한한 원천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아이들 인격을 존중했던 페스탈로치는 중세 유럽처럼 아이들을 체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루소의 교육 사상에 입각하여 아이들의 자발성과 노작활동을 중시했지요. 노작활동의 기초 위에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자율성을 길러준 최초의 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스위스 시민혁명의 와중에서 낡고 봉건적인 학교질서를 거부하고 당당히 학교장과 맞서고 때로는 학부모와 갈등을 빚었던 교사였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교육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당대 낡은 교육 질서에 맞서 스스로 선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나아가 교사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스스로 「스위스 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지요. 페스탈로치 연구의 권위자 김정환(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은 페스탈로치를 스위스 ‘교원노조의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를 그렇게 책에서 기술했습니다.

교육계 잘못된 오랜 관행에 맞서 젊은 날 교육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던 그 선생님이 오늘따라 무척 그립습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