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그린 바른 지도, 고마워요 도올

<도올의 중국일기>(2015)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최근 1년 동안 중국 연변대에서 객좌교수로 있으면서 중국에서의 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총 1.2.3.4권이 나왔다. 지난 8일 한겨레주주통신원 수도권모임에서 고봉균 주주통신원이 이날 참석한 주주통신원 30명에게 각 1질씩 선물로 증정했다. [편집자 주]

2015년 12월 24일. 목요일. 싸늘히 흐림.

2권을 읽은 다음 “나의 일기2”를 쓴 날부터 이틀에 걸쳐 3권을 다 읽었다. 그러나 진도가 너무 빠르면 “나의 일기”를 읽는 이들이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쓴 뒤 다른 일로 멈췄다.

2016년 1월 1일. 금요일. 얼음 꽁꽁 맑고 고요한 새해 새날.

며칠 후 다시 쓰려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이 책들은 나 혼자 읽고 있지 않다. 서른 명이 책 선물을 받았다. 근데 글쓰기가 조금 단련되었다고, 나 혼자 너무 앞 서 나가는 건 실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른 명의 합창에서 누구의 성량이 돌출된, 그런 경우처럼 자성을 하며 미루었다.

연말 행사로 조금 분주했고, 마음이 상할 일이 거듭 있었다. 시의성을 가진 기사 두 편을 쓰고, 30일 오후부터 31일 종일 어딘가에 누군가가 보낼 중요한 탄원서 작성에 매달렸다.

나는 이 황홀한 색감에 반해 보고 또 보았다. 1600년 전의 색감 대비를 보라!

오늘은 경북신문에 보낼 칼럼 한 편을 쓰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벌써 지난해, 미뤄 둔 숙제를 오늘은 해야 한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오로지 소설작업에 몰두할 생각이다.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명함에 박고는 창작 외적인 일로 너무 분주했다. 그래서 집중이 안 된다는 연유로 많이 나태했다. 나 같은 무명의 작가에게 문학은 밥이 안 되어 직업이 아니다. 그렇다고 뽐내는 머리핀이나 목걸이 따위의 액세서리도 아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무의식의 잠조차 편치 않은 게 문학이 주는 질병증상이다.

나는 사소한 글을 쓸 때도 청소나 설거지를 다 미룬다. 31일, 예전처럼 대청소를 하고 말끔한 새 날을 맞으려던 계획도 의외의 일에 매달리느라 미뤄졌다. 몇 날 마음을 앓느라 지금 싱크대는 수북하고, 세탁실 바스켓도 거의 차고, 방바닥엔 먼지가 구른다. 이럴 때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아저씨들이 무척 부럽다. 오래 혼자 살아온 나는 누가 있어서 집중할 수 없다는 불만을 또 할지 모른다. 암튼 모든 게 다 변명이다.

이렇게 마음을 달래는 새해 첫날인데도 집안이 지저분해서 그런지 새날의 기분이 안 난다. 지난 한 해 동안 신춘문예당선 단편동화 하나가 전부다. 작품 아닌 다른 글은 꽤 썼지만 단편소설 한 편 못 쓴 자책이 더욱 무겁다. 나를 위한 업무가 아니라 간접적 관련된 일로 참 어수선한 한 해였다.

올해는 외출부터 줄여야한다. 시정잡배처럼 온갖 데 기웃거리면 늙어가는 나의 시간이 심하게 절룩거릴 것 같다. 이렇게 노후를 맞는 건 아니다.

어젯밤부터 도올의 중국일기3권을 다시 읽었다. 첫 읽기에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앎의 충만으로 불타오르던 그런 흥분은 사라졌다. 음울한 기분 탓을 할 게 아니다. 도올처럼 치열한 삶을 살지 못했던 지난해의 변명 따위가 더욱 구차하게 느껴진 것이다.

책상 앞에서 척추부터 곧게 편다. 심호흡을 하며 도올처럼...을 되뇐다. 감히 그의 학식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성실함 하나 만이라도 본받기다. 그래 도올처럼...

3권의 첫 장을 열면 조금 당황스럽다. 생전 처음 보는 지도가 나온다. 근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의 지도다. 단 거꾸로 그려져 생경해 보인다. 도올은 왜 우리에게 이 지도를 제시할까? 바로 고구려에 관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수정하기 위해서다. 지도 옆 설명을 읽고 나면, 수십 년 멍청했던 머릿속 뉴런이 넓은 대륙에서부터 꿈틀거리며 백제와 신라를 향한다.

--고조선의 사람들, 그리고 고구려인이 인식한 세계질서를 깨닫게 해주는 지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태평양 중심의 걸개 지도는 세상을 도착적으로 바라보게 강요한다. 그리고 민족이동이나 문화전래에 관하여 터무니없는 가설들을 회의적 시각이 없이 수용하게 만든다. (중략)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 지도를 놓고 우리 역사의 흐름을 생각해야만 고조선-고구려패러다임의 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환웅이 하강한 신시(神市)는 바이칼호 주변이었을 수도 있다.--

언젠가 바이칼 인근마을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다. 우리와 흡사한 생김새의 피부색과 유사한 관습들에 놀랐다. 그들의 언어 중 상당수가 우리의 어휘와 닮았었다. 야생의 순록 뿔을 본 뜬 그림과 장신구는 신라의 금관과 아주 흡사했다. 그래서 도올이 바이칼을 언급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

내가 읽었던 상고사의 기억을 더듬으면 고조선의 우리 영토는 만리장성 부근에서부터 송화강 주변까지 드넓었다. 지금 초라히 분단된 남북의 지도가 우리 민족이 뿌리내린 영토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도올이 목에 울대를 세워 함께 알고자하는 애정의 패러다임. 우리의 무심한 상식적 견해나, 왜곡되어 무지한 인식의 세계를 그는 바로 잡고 싶은 것이다. 나는 거꾸로 그린 바른 지도를 오래 들여다보며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릴 뻔 했다. 대신 목이 메어 이렇게 속말을 했다. 고마워요. 도올......

다음 장에는 “고구려역대군왕재위계통표”를 제시한다. 도올이 넓혀주는 정신세계는 북으로, 북으로 뻗치어 어느 혹한의 겨울바람 앞에 섰다. 살갗을 에는 바람결에 상고대로 맺힌 얼음꽃을 보듯, 동명성왕 시조님부터 28대 보장왕까지 불빛 아래서 녹았다. 너무 오래 찾는 이 없어 결빙에 갇혔던 이름들...

다음 장부터 50P까지 여러 설도 많고 유명한 광개토대왕비에 얽힌 방대한 분량의 해설을 세밀히 분석했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의 석비다.--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고소선의 조상은 위대하다.

51P에서 그는 김광석의 노래 “광야에서”를 읊게 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며

이 노래가 저 넓디넓은 대륙을 한 바퀴 휘돌아 오려면 혼자서 불러서는 안 된다. 남북 모두, 세계 곳곳에 흩어진 우리 동포들 모두, 고조선 우리 민족이 함께 일어나, 합창으로 부르면 얼어붙은 긴긴 역사도 뜨겁게 해동되어 강물처럼 흐를 것이다.

139P 미천왕의 무덤 앞에서 그는 말한다. --역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해석의 뒷받침이 없으면 사실은 의미를 상실한다. 해석은 “느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고구려를 느껴야 한다.--

33P--국인國人(성내에 사는 사람들. 당연히 신분이 높다)과 야인野人(성 밖에 사는 사람들. 이들도 자유민이다) ---

갑자기 50년도 더 된 나의 할머니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서라벌 “성내”에 살던 손녀들에게 “선 밖(성 밖의 고장말)”에 사는 애들이랑 어울리지 말라고 일렀다. 지금이라면 그런 차별의 경계는 온당치 못하다며 거절했을 것이다.

128P--역사는 사건이고, 사건은 실존의 계보를 말해준다. 고구려는 나의 현실이다. --

이 얼마나 명료한 역사의식인가. 매 끼의 밥을 먹고,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허비한 나는 그가 참 부럽다. 모르는 것을 깨우치는 즐거움은 가장 으뜸의 행복이다.

167P--이전복(중국)이 1980년 "집안고구려묘연구"에 보고한 것은 11,300여 좌로서, 1966년의 총수보다 조금 더 많다. 하여튼 마선지구에만 2,539좌가 있다고 하니 고구려무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가 있다.--

올해도 신년 사흘의 연휴로 인천국제공항은 무척 붐볐다고 한다. 도올의 길 안내를 따라 저 옛 땅을 밟아봤으면...침을 삼킨다.   

339P--현재 지리적으로 중국영토 내에 편입되어 있는 고구려의 가치를 중국이나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적 편협한 경계성을 떠나 동아시아의 새로운 보편적 가치로 부활시키는 어떤 새로운 인식의 틀이 필요할 뿐이다. (중략) 과연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포용하지 못하면서 일관된 동북아정책이 어떻게 가능하겠으며, 고구려정신 계승 운운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여기서 나는 그의 넓고도 심오한 시야를 본다. 천년도 더 지난 오늘의 국가 개념과 국경의 선을 건너 범아시아적 역사적 토대를 보자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절망한다. 70년 고착된 분단은 이미 고목의 형태로 자라 그늘이 깊다. 대박이라는 통일은 아직 요원해서 달나라 토끼그림처럼 희미한 실루엣이다. 남북 모두 질 좋은 이념의 지우개를 들고 아직도 실험 중이다. 누가누가 더 잘 지우나. 지우개밥처럼 너절해진 남북합의문.

이제 마지막 4권은 소설작업 중 환기가 필요할 때, 첫 장을 열고 도올의 꽁무니에 바싹 들러붙을 것이다. 가난한 작가에게 공짜여행은 대박요행이다.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이미진 편집위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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