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원(天園) 오천석 박사’를 회고하다

“주여, 저로 하여금 교사의 길을 가게 하여 주심에 감사하옵니다. 저에게 이 세상의 하고 많은 일 가운데 교사의 임무를 택하는 지혜를 주심에 대하여 감사하옵니다. 언제나, 햇빛 없는 그늘에서 묵묵히 어린이의 존귀한 영을 기르는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데 대하여 감사 하옵니다 (중략)

주여! 저로 하여금 어린이에게 군림하는 폭군이 되지 않게 하시고, 자라나는 생명을 돌보아주는 어진 원정(園丁)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제가 맡고 있는 교실이 사랑과 이해의 향기로 가득 차게 하여 주시고, 이로부터 채찍과 꾸짖음의 공포를 영원히 추방하여 주옵소서. 모른다고 꾸짖는 대신에 동정으로써 일깨워 주고, 뒤 떨어진다고 억지로 잡아끄는 대신에 따뜻한 손으로 제 걸음을 걷게 하여 주옵소서. (중략)

주여! 저로 하여금 교사라 하여 어린이의 인격과 자유와 권리를 유린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교사의 자리를 이용하여 어린이를 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지 않게 하여 주시며, 저의 의견을 무리하게 부과하는 대상물로 삼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어린이의 올바른 성장을 돕는 협력자요, 동반자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고, 그의 올바른 성장이 곧 저의 영광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이하 생략)” - 오천석(1972). 『스승』. 배영사. 12-15쪽.

이 글은 천원(天園) 오천석 박사가 쓴 책 『스승』 (배영사, 1972)에 나오는 「敎師의 기도」이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오천석 박사가 꿈꾸었던 교사의 모습, 즉 사도(師道)의 길을 기도문 형식으로 쓴 산문시이다.

천원 오천석 박사가 쓴 <스승>(배영사, 1972) 책 표지 (출처 : 하성환)  천원 오천석 박사는 <한국의 페스탈로치>로 추앙받는 교육자이다. 그는 해방 직후 미군정기 시절 미군정 통치자들의 통역과 <한국교육위원회>  중간 연락을 담당했다. 그는  반공의 제일선에서 미군 극동사령부 정보부에도 참여했다.  당시 미 극동사령부에는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정경모,  오천석, 장리욱 교수 등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천원 오천석 박사가 쓴 <스승>(배영사, 1972) 책 표지 (출처 : 하성환)  천원 오천석 박사는 <한국의 페스탈로치>로 추앙받는 교육자이다. 그는 해방 직후 미군정기 시절 미군정 통치자들의 통역과 <한국교육위원회>  중간 연락을 담당했다. 그는  반공의 제일선에서 미군 극동사령부 정보부에도 참여했다.  당시 미 극동사령부에는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정경모,  오천석, 장리욱 교수 등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천원(天園)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당시엔 듀이(J. Dewey)의 진보주의 교육사조가 미국 사회 전체를 풍미했던 시절이었다. 천원(天園)은 ‘민주주의와 교육’을 공부하면서 교육자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깊이 있게 사색했던 것 같다. 실제로 듀이의 저서 『민주주의와 교육』을 1948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오천석 박사의 「敎師의 기도」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교사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기도문으로 와 닿는다.

고 정원식 전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생전에 오천석의 『스승』에 나오는 서사(序詞)인 「교사의 기도문」을 자주 암송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실제로 정원식 교수는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어머님의 소원을 서울대 사범대학에 진학해 ‘사회의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에는 오천석 박사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오천석 박사가 1960년 문교부 장관 시절  정원식 교수는 오천석 장관의 비서로 재직했다.

▲ 1989년 전교조 탄압 당시 교사 1,500여 명을 파면, 해임시킨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 민자당 후보로 나올 당시 선거 벽보(출처 : 중앙선관위)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1946-1947년 <국대안 반대 투쟁> 무렵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인물이다. 이후 미국 유학 후 1960년 문교부 장관 오천석의 비서관으로 활동했고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와 사범대학장, 그리고 노태우 군사정권 당시 제30대 문교부 장관, 그리고 제2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퇴임 이후에도 89년 당시 <전교조는 불법단체이고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전교조 교사 징계에 대한 자신의 결정은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김구 선생 암살법 안두희, 민중신학자 안병무처럼 서북청년단 출신이라는 의혹을 안고 있다. 서청은 월남한 한경직 목사가 영락교회에서 만든 북쪽에서 월남한 지주 집안 출신 청년들이 주축이 된 극우반공조직이다. 제주 4,3 항쟁 당시 무고한 제주도민을 학살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2014년 박근혜 정권 시절 서북청년단이 공개적으로 재건을 선언한 일이 있었다.
▲ 1989년 전교조 탄압 당시 교사 1,500여 명을 파면, 해임시킨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 민자당 후보로 나올 당시 선거 벽보(출처 : 중앙선관위)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1946-1947년 <국대안 반대 투쟁> 무렵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인물이다. 이후 미국 유학 후 1960년 문교부 장관 오천석의 비서관으로 활동했고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와 사범대학장, 그리고 노태우 군사정권 당시 제30대 문교부 장관, 그리고 제2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퇴임 이후에도 89년 당시 <전교조는 불법단체이고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전교조 교사 징계에 대한 자신의 결정은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김구 선생 암살법 안두희, 민중신학자 안병무처럼 서북청년단 출신이라는 의혹을 안고 있다. 서청은 월남한 한경직 목사가 영락교회에서 만든 북쪽에서 월남한 지주 집안 출신 청년들이 주축이 된 극우반공조직이다. 제주 4,3 항쟁 당시 무고한 제주도민을 학살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2014년 박근혜 정권 시절 서북청년단이 공개적으로 재건을 선언한 일이 있었다.

그런 그가 노태우 정권 문교부장관 시절,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1,500명이 넘는 젊은 교사들을 길거리로 내쫓은 것은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전교조 교사들 역시 ‘민족교육, 민주교육, 인간화교육’을 열망하며 촌지거부운동을 주도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여 강제 야간자율학습과 강제 방과후 수업을 거부하는 등 교사로서 소명을 다하지 않았던가!

▲ 1989년 5월 28일 역사적인 전교조 결성대회 당일 서울 동부경찰서에 연행된 교사들이 경찰서 안에서 전교조 결성대회 구호를 외치고 있다(출처 : 교육희망)
▲ 1989년 5월 28일 역사적인 전교조 결성대회 당일 서울 동부경찰서에 연행된 교사들이 경찰서 안에서 전교조 결성대회 구호를 외치고 있다(출처 : 교육희망)

권력의 탄압과 세상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오직 아이들이 올곧게 성장하도록 학교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전개하지 않았던가! 선(善)을 이야기하면서 선(善)을 몽둥이로 내치다니 이 무슨 고약한 심보인가! 이 무슨 위선이란 말인가!

해방 직후 한국 교육계에 불어 닥친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사조는 대학뿐만 아니라 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연수를 강행하면서 현장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오천석 박사를 앞세워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을 학교현장에 뿌리내리려는 미군정의 정책적 시도는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한국화하려는 시도였다. 한 마디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한국 사회에 이식(移植)하려는 교육활동이었다. 그런 영향의 이면에 천원 오천석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천원 오천석은 해방 공간 미군정 통치 하에서 한국 현대교육을 핵심적으로 주도했던 교육계 인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황해도 백천에서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기 직전 9월 8일자로 영자신문 ‘The Korea Times’를 발간했다. 영자 신문 발간을 계기로 당시 미군정 하지사령관 정치고문인 이묘묵 박사를 통해 오천석은 미군정과 접촉하였다. 이후 오천석 박사는 8월 16일, 바로 해방 이튿날 한국 교육계 저명인사들의 회합인 ‘북아현동 모임’과 8월 하순 ‘천연동 모임’을 주도했다. 이들 모임에 참여한 인물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적극적인 친일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반민족적인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오천석 박사는 오늘날에도 우리교육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우리교육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린 ‘한국현대교육의 아버지’로 존경받는다.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를 지낸 학자 가운데엔 천원 오천석을 ‘민주주의 교육을 이 땅에 전파한 선구적인 인물’로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미군정 통치 시절 ‘한국교육위원회’와 ‘조선교육심의회’, 그리고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의 약칭) 파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오천석 박사를 ‘청사에 빛날 민주교육행정의 구현자’로 찬양하였다. 또 다른 교육학자는 ‘87년 온 생애를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새로운 씨앗을 뿌린’역사적 인물로 오천석을 극찬했다.

미군정기 시절 대한민국 교육을 실질적으로 주물렀던 준행정기구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한국교육위원회’ 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교육심의회’ 이다. 모두 미군정청 교육자문기구임에도 초중고 각급 학교의 장과 각 도의 학무국 관료를 임명하는 데 결정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한 실질적인 의결기구였다. 초기 ‘한국교육위원회’ 구성원 다수가 친일파였음은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미군정 통치 기간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김활란의 동상. 김활란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부역자로 반민족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화여대 본관 옆에 세워진 김활란 동상은 김활란의 친일 행적으로 철거를 주장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놓인 적이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
▲ 미군정 통치 기간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김활란의 동상. 김활란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부역자로 반민족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화여대 본관 옆에 세워진 김활란 동상은 김활란의 친일 행적으로 철거를 주장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놓인 적이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

김성수, 김활란, 최규동, 백낙준, 유억겸이 그들이다. 그러나 미군정당국은 “위원회에 친일파는 없다”고 선언하며 그들을 적극 비호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 통치를 받았을 때 오천석 박사는 초기에 미군정청 문교 차장이었다. 문교 부장은 유억겸(유길준의 아들)으로 그는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이후 오천석 박사는 문교부장이 된다. 그러나 문교부장 이전 차장 시절부터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는 일찍이 일제 강점기 시절 미국 유학을 떠나 아이비리그인 코넬대와 노스웨스턴대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인물이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 시절 듀이의 제자이자 동료 킬 패트릭(W. Kilpatrick)의 지도를 받았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에서 영어와 철학, 그리고 심리학을 가르쳤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 문교책임자는 포병장교 락카드(E. L. Lockard) 대위였다. 실제로 해방 당시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미군은 전투부대였지 민정부대가 아니었다. 급조된 미군정 담당자들은 조선의 교육 사정에 매우 취약했고 대부분 중하위급 장교들이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미군정청 과장에 해당하는 직책은 중위였고 국장의 직책은 대위나 소령이 맡았다. 이들의 학력은 사관학교나 정규대학 출신이 드물었다.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시 상황에서 급속히 승진한 직업군인들이 대다수였다. - 손인수(1992), 『미군정과 교육정책』 서울 : 민영사, 218쪽.

그런 연유로 락카드 대위는 해방 직후 학무국을 접수하러 9월 14일 오천석 박사와 함께 조선총독부를 찾았다. 일개 미군 대위가 일국의 문교행정을 쥐락펴락하던 시절이었다. 락카드는 미지의 나라 해방조선에 교육학 박사 학위를 소지한 인물을 만난 것에 감격했다. 그것도 아이비리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니 그에 대한 신뢰는 매우 크고 두터웠다. 그것은 그만큼 해방 공간 오천석의 높은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천원 오천석이 누구인가? 그는 1946년부터 1947년 초까지 지속된 「국대안」 파동 당시 실질적 책임자이자 정책 추진자였다. 「국대안」파동은 우리현대사에서 대한민국 교육을 왜곡시킨 근원으로 작용한 일대 사건이었다. 「국대안」반대 투쟁 당시 초대 서울대학교 총장은 미 육군대위 앤스테드였다. 1946년 8-9월「국대안」반대 투쟁 초기에 서울대학교 단과대 교수와 학생 90% 이상이 반대 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으로 1947년 3월 5일 현재 서울대학교 9개 단과대학 8,040여 명 중 4,956명(61.6%)의 학생이 제명된 상태였다. 서울대학교 9개 단과대학 총 429명의 교수 가운데 380여 명(88%)이 대학 강단에서 쫓겨났다. 이는 서울대학교가「국대안」 강행 이전의 12% 기능밖에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朝鮮通信社(1948), 『朝鮮年鑑』, 280쪽

심각한 사실은 「국대안」반대 투쟁 당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미군정청이 강행한 「국대안」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쪽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안」(약칭 「종대안」) 당시 북을 선택했다. 특히 남쪽 사회의 경우 이승기(화공학), 도상록(양자물리학), 한인석(물리학) 교수 등 과학기술계 고급인재들 절반이 탄압을 피해 월북함으로써 민족 지성이 남과 북으로 양분된 현상은 「국대안」 사건이 초래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국대안」파동으로 해방 직후 자생적이고도 자주적인 교원-학생조직이 모두 파괴되었고 경성제국대학이 국립 서울대학교로 변신하면서 미군정 관료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 「국대안」 파동의 본질은 학원 내 좌파 내지 진보적인 학자들과 학생들을 제거함으로써 학원의 자주성과 민주성, 그리고 민족성을 말살했다는 데 그 교육사적 의의가 있다. 심지어 민족주의 성향으로 일관한 학자들조차 ‘빨갱이’로 몰려 사상검증을 당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국대안」 반대 운동이 좌절된 1947년 9월 이후에도 ‘빨갱이’ 색출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1947년 11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신기범을 극우 청년학생이 테러를 가해 살해했다. 그런가 하면 1949년 11월엔 경찰이 서울대 사범대 교수 장형두를 체포해 고문하다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서울대 교수 고문치사’ 사건이다. 서울대 교수 고문치사’ 사건이 박정희 유신 시절 1973년 최종길 교수(법대)를 고문 치사케 한 중앙정보부의 만행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심지어 1949년 12월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장 국문학자 조윤제를 ‘빨갱이’ 혐의로 체포하기까지 했다. ‘빨갱이’ 색출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가 대학가를 공포분위기로 휘몰아갔다. 그런 속에서 1949년 11월 말까지 ‘좌익 자수 기간’이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 기간 중 서울대에서만 문리대 14명, 사범대 23명, 법대 9명, 상대 8명, 공대 4명, 의대 2명, 농대 1명이 자수하여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시켰다.

학원의 자주성과 민주성, 민족성을 말살한 「국대안」파동 당시 이에 적극 반대했던 학자들과 학생들은 심각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문교·경찰당국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빨갱이’로 내몰려 학원 내에서 철저히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공간 최초로 구성된 자주적 교원단체인 <조선교육자협회>는 「국대안 반대 투쟁」 당시 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1947년 11월 지하화하면서 해체되었다.

바로 <조선교육자협회>가 지하활동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천원 오천석은 친일교육자 조동식을 사주해 조선교육연합회(대한교육연합회, 약칭 대한교련)를 발족시켰다.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교육자 단체를 계승한 「조선교육회」를 잇는 것으로 관변 어용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대한교련 초대 회장에 친일교육자 최규동(3대 서울대 총장)을 옹립했고 이후 오천석 스스로 대한교련 회장에 취임했다.

대한교련은 이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 권력에 기생하면서 대한민국 교육을 왜곡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89년 전교조의 탄생으로 「교련」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약칭 한교총, 일명 「교총」)로 변신했다. 대의원을 교장-교감 일색이 아니라 평교사의 진출을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교총」은 2015년 박근혜 정권 시절 『한국사』교과서 국정제 강행 당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이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반교육적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대한민국 현대교육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천원 오천석!

그는 미군정기 「국대안」 파동을 일으킴으로써 자주적인 민족교육의 씨앗을 제거하고 극단적인 이념이 지배하던 냉전 시절, 「반공신민(臣民)교육」으로 한국 교육의 방향을 규정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이는 교육의 비주체성을 학교현장에 확산시킨 것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 민족 ‧ 민주 교육,  자주성 교육을 왜곡시키는 근원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오천석은 해방 직후 한국 현대교육계를 좌지우지한 미군정기 교육계 주도세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했어야 할 당면 과제는 식민지 교육을 일소하고 친일교육자들을 청산하는 일이다. 그러나 오천석은 최대의 민족적 과제인 <식민지 교육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망각했다. 오히려 친일부역자 중심으로 교육엘리트를 구성해 「한국교육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는 이후 한국교육계 질곡을 형성시킨 명백한 역사적 과오였다.

한 마디로 해방 후 역사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던 것이다. 해방 후 친일 부역한 교육엘리트들이 실세로 등장하여 ‘민주주의 교육’을 강조했다는 것은 교육모순의 심화를 넘어서서 교육 주체성을 훼손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중심에 천원 오천석이 있었다. 그는 친일 교육계 인물들 집합소인 ‘천연동 모임’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교육위원회」를 구성해 이후 한국교육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컬럼비아대학 교육학 박사, 미군정청 문교부장, 대한교련 회장, 이화여대 대학원장, 미국 극동 총사령관 자문, 한국교육학회장, 문교부 장관 등 화려하게 자신을 장식한 인물! 천원 오천석!

그는 과연 대한민국 교육계에서 칭송받을 만한 인물인지 오늘의 시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리교육을 한 걸음 전진시키기 위해선 왜곡된 관념과 가치체계를 바로 세우지 않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천원 오천석과 관련된 일화로 글쓴이가 겪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37년 전 구로고등학교에서 겪었던 일이다. 당시 교무주임(오늘날 교무부장)이던 57학번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나온 어느 선생님이 20대 젊은 교사들에게 지나가듯이 말을 툭 던졌다.

“우리교육을 망친 인물을 두고 참내...”

스승이 되라고 오천석이 쓴 「교사의 기도문」을 두고 쓴 소리를 던진 것이다. 우리는 그 선생님이 내뱉듯이 던지는 말에 순간 움찔했다.

오천석을 두고 “대한민국 교육을 망친 인물”로 표현했던 그 교무주임은 1960년 4‧19교원노조에 가입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 직후 움트던 구로고 평교사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교무주임을 하면서 교육자로서 자신의 양심대로 생활했던 분이다. 그런 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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