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고 오재만님 그리는 아들의 글

추모공원에 놓아둔 부친 고 오재만님의 사진.
추모공원에 놓아둔 부친 고 오재만님의 사진.

가난 탓 초등학교만 다녔던 ‘한’
이발사로 3남1녀 키우느라 고생
자녀들 안정된 직장 다니길 ‘소원’

장남으로 뜻 이뤄주지 못해 ‘죄송’
별세 2년전 전화로 ‘사랑해요’ 인사

“아버지 사랑해요.” 어느새 떠나신 지 9년이 지났지만 문득문득 아버지에게 혼잣말처럼 해드리곤 하는 말이다. 10여년 전 제주도에서 찻집을 하던 시절 처음 전화로 했던 고백이다. 그 시절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도 새삼 떠오른다.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돌로 쌓은 벽 위 지붕에 새를 얹은 초가. 작은 찻집에 손님 세 분이 들어옵니다. 찻집에 남자 손님 셋은 드문 일이지만 광어양식을 하는 친구들로 단골입니다. 평소처럼 내려주는 차를 마시면서 친구 아버지의 문상을 다녀왔다고 얘기합니다. 굉장히 건강하시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면서 사는 게 참 허무하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슬며시 끼어들었습니다.

“혹시 세 분은 아버지한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 있어요?”, “……?”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한테도 하기 힘든 말을 어떻게 아버지한테 할 수 있겠어요?”, “그러게. 뭐 전혀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어떻게 말로 합니까? 우!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네요.” 손바닥으로 팔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면서 너스레들을 떱니다.

3남1녀 중 맏이인 필자(뒷줄 왼쪽)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가족 사진.
3남1녀 중 맏이인 필자(뒷줄 왼쪽)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가족 사진.
중학교 졸업식 때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왼쪽)와 부친 오재만님. 
중학교 졸업식 때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왼쪽)와 부친 오재만님. 

그 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살아 생전에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뭔 줄 알겠어요?”, “……?”.

“전 3남1녀의 맏이에요. 아버지 어머니는 가난한 환경 때문에 겨우 초등학교만 마치셨어요. 그래서 네 자식을 키우느라 엄청 고생을 하셨지요. 그래, 꼭 성공해서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리고 싶었지요. 그런데 정작 부모님 소원은 따로 있었어요. 소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바람이었지만 전 그것도 이뤄주질 못했고, 그게 늘 마음 아파요.”

“그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대학을 나와서 보너스와 퇴직금이 나오는 직장에 취직하는 거였어요. 평생 이발소를 하셨던 아버지로서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불안정한 일이 아니라 교사같은 안정적인 직장이 그만큼 부러우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전 공부에 재능이 없었어요. 중학생 땐 시를 쓰고 싶었고, 고등학생 땐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요. 선생님도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반대에 부딪쳐서 그만두었어요. 그때 ‘내가 장남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원하는 일이 아니라 책임감으로 하다 보니 이도저도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맞습니다. 뭐든 저하고 싶은 걸 해야지요. 그래서 전 제 아이들한테 공부하라는 소리도 안 합니다.”

2010년대 초 필자가 제주도에서 찻집을 할 때 내려와 여행을 즐겼던 부친 오재만님의 말년 모습. 폐암으로 갑작스레 별세하기 이전이다.
2010년대 초 필자가 제주도에서 찻집을 할 때 내려와 여행을 즐겼던 부친 오재만님의 말년 모습. 폐암으로 갑작스레 별세하기 이전이다.

“제주에 내려와 살다보니 ‘늘 당신 곁에서 지켜주기를 바랐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래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때 안양에 사시는 부모님께 문안 전화를 드렸어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번은 꼭 전화를 하려고 했어요. 어느 핸가 겨울에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자식들이 다녀갈 때마다 ‘기름값 아끼지 말고 따뜻하게 주무세요’라고 말해도 요 밑에 손을 넣어서 확인하는 건 너밖에 없더라. 그래서 네가 온다고 하면 미리 보일러를 틀어놔.’ 하면서 웃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한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더라고요. 어머니 말씀대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통화할 때마다 말할까? 말까? ‘에이!’하는 동안 시간만 흐르더군요. 그러다가 하루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아버지 사랑해요’ 했지요. 그리고 짧은 침묵 속에서 아버지가 움찔하셨다는 것과 기뻐하신다는 걸 동시에 느낄 수 있었어요. 잠시 뒤에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술 마셨냐?’ 하고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같이 웃었어요. 뭐든 처음이 어렵지 한번 하고 나면 별 것 아니게 돼요. 그뒤부터 통화할 때마다 ‘아버지 사랑해요’ 하니까 ‘그래 잘하고 있어라’던 아버지가 한 달쯤 지나서는 ‘그래, 나도 사랑한다’ 하시더라고요. 그게 제가 자식으로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세 분도 아버지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우리가 어릴 때 아버지는 힘센 어른이지만 우리가 성장할수록 늙고 힘없는 노인이 돼가잖아요. 말씀은 안하셔도 많이 외롭고, 기대고 싶을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꼭 말해보세요.”

그러자 갑자기 한 친구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해드렸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제 곁에 아버지가 안 계시네요.”

고양/오성근 주주통신원

편집 : 김경애 편집위원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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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057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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