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순님 기리는 조카의 글

1995년 6월 필자 가족이 작은고모와 함께 부산 기장 해변으로 나들이를 갔을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고 김영순님, 큰아이, 필자.
1995년 6월 필자 가족이 작은고모와 함께 부산 기장 해변으로 나들이를 갔을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고 김영순님, 큰아이, 필자.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창 밖으로 기차가 지나갑니다. 결혼한 지 스물일곱 해를 맞은 오늘, 저는 아내와 여행 중입니다. 당신이 떠나간 지는 열아홉 해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제 아내를 몹시 귀하게 여기셨지요. 제 아이들조차 당신의 품을 찾았습니다. 평생 홀로 살아왔고, 가족과도 어느새 멀어져버린 당신에게는 꼭 살아야겠다는 열망이 없었을까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그 열망을 데우지 못했습니다. 위암 판정을 받은 후 몸도 마음도 급속히 쇠약해져가는 모습을 저는 끝까지 보아야 했습니다.

2002년 여름, 쉰 살에 눈을 감은 그때의 당신이 어느덧 저보다 어린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당신이 세상과 작별할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진한 감기를 앓듯, 잠깐의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항시 그랬듯 투박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줄 거라 착각했습니다. 그때까지만 잘 견디면 된다고 가시기 전날 저녁까지도 저는 병상 머리맡에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옆 병상의 불이 취침시간이 지났음에도 꺼지지 않은 것에 대한 당신의 불평도 그냥 넘겼지요. ‘죄송하지만 불 좀 꺼주세요’라던 당신의 말이 내가 들은 마지막, 생생한 당신의 음성이 될 줄 몰랐습니다. 옆 병상의 불은 투덜거리며 꺼지고, 보조침대에 누운 내 의식도 잠들어 꺼졌을 때, 당신의 흩날리던 시간도 안녕을 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급히 나간 간호사의 뒷모습을 기억한 이후, 내 기억은 잠시 멈춰 버렸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던가요. 여러 사람이 바쁘게 병실로 처음 보는 기계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소란스러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저는 담당 의사를 찾아 복도를 돌았습니다.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던 의사는 저를 보더니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임종하셨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내뱉었습니다. 저는 아직껏 그 표정의 변화 과정을 잊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일상이었겠지만 제게는 일상이 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은 지금은 그 일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괴로운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 미처 오지 못한 형제자매들을 위해 병원에서는 당신을 ‘살려놓기로’ 결정했나 봅니다. 제가 다시 병실에 돌아왔을 때 당신의 육신은 반복적인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불꽃은 이미 꺼져버렸습니다. 감긴 눈이 다시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멀리 살았던 막내 고모가 도착해 당신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고 오열할 때까지 그 움직임은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훗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제를 마치고 났을 때 아버지는 꿈에 당신이 나타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꽃들에 둘러싸인 채 환한 표정으로 멀리 있는 구름을 향해 가고 있더라고 말씀하셨지요. 남은 사람들은 죽은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위안을 얻습니다. 그 위안도 행복의 한 가지라 부를 수 있을까요.

할머니 묘소에서 필자의 큰아이를 안아주고 있는 작은고모(김영순).
할머니 묘소에서 필자의 큰아이를 안아주고 있는 작은고모(김영순).

사랑하는 작은고모(김영순). 위암으로 좋아하던 커피를 몇 달간 끊고 지낸 어느 날, 당신은 내가 사는 아파트 앞 쉼터에서 단 한 잔의 즉석커피를 마시며 연신 ‘맛있다’라며 음미하셨지요. 병색이 완연했던 홀쭉한 볼 위로 배어나온 그 만족스런 미소를 어찌 잊을까요. 그것은 더운 계곡을 흔들고 지나가는 산바람 같았고, 구도의 꿈을 작게나마 이룬 수행자의 표정인 것도 같았습니다. 당신과 장난을 나누던 큰 아이는 기억을 간직한 채 성인이 되었고, 당신을 기억 못하는 작은 아이는 이제 여자 친구를 자랑합니다. 당신이 아직 살아 계셨다면 ‘아이구, 요것들이’라며 걸걸한 목소리로 웃으실까요.

노래가 아직 그치지 않았습니다. 중학생 때, 매일 새벽에 일어나 같이 아침 해를 보러 운동을 나섰던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다시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그 때의 일들을 기억하실는지요, 죽은 이들이 만난다 하더라도 그 관계가 지금 이 삶의 관계와 같을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지금의 생에서 당신이 주신 기쁨과 슬픔을 기억합니다. 저와 아내, 아이들, 나아가 당신을 아는 모든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서, 그 기억이 잊히지 않을 만한 모습으로 자리했으면 합니다. 당신의 흔적이 그렇게라도 남아있었으면 합니다. 그 꽃 속에 묻혔다는 당신의 모습이 정말로 그러했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안녕하소서.

부산/조카 김해인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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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00843.html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해인 객원편집위원  logca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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