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안업님께 올리는 아들의 글

1965년 둘째 누나 결혼식 때 6남매 가족 사진이다. 앞줄 오른쪽 셋째가 필자의 어머니 정안업님, 아버지는 병환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1965년 둘째 누나 결혼식 때 6남매 가족 사진이다. 앞줄 오른쪽 셋째가 필자의 어머니 정안업님, 아버지는 병환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어릴적 제목도 모른채 들었던 노래들
나도 모르게 입과 몸에서 저절로 나와

병든 남편·6남매 보살피며 시집살이
고달픔·슬픔·아픔도 실어 보내신듯
누님들 기억 따라 가사 적어보니 ‘먹먹’

내 어머니, 정안업님께서 생전에 자주 부르시던 노래가 있었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노래로 어머니를 기억한다. 1991년(72살)에 작고하셨으니 노래의 음률은 아련하고 가사도 가물가물하다. 70대 후반이 되신 누님들께 전화로 여쭈었더니, 수화기를 통해 나지막한 노래와 가사가 들려왔다. 누님들이 부르시는 노래와 함께 어머니의 모습도 안개처럼 뿌옇게 다가왔다. 어머니가 그리워질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이 노래들이다.

이 노래들을 흥얼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우수에 젖고 마음과 가슴이 촉촉해진다. 노래는 조용하면서도 애잔하다. 누님들 말씀으로는 이 노래들 말고도 어머니는 많은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내아이라 그랬을까, 배운 적이 없고 들은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생각나는대로 가사를 적고 노래 제목은 임의적으로 붙여봤다.

‘기차는 떠나간다, 구슬 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임이여!/ 간다고 아주 가고 아주 간들 잊으랴 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임이여 술을 걸러 아픈 마음 달래라 공수래 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기차는 떠나간다’)

‘강원도 산골짝은 들어 갈수록 깊어지고 우리네 부부 정은 살아갈수록 깊어진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 간다.’(‘강원도 산골짝’)

‘여보하고 부르면 여보하고 대답하네/ 우연히 엿본 여관 즐거운 표정/ 여보세요 날 보세요 왜 그래요/ 하늘은 푸른 하늘 우리들은 젊은이/ 날 좀 봐요 부르면 날 좀 봐요 대답하네./ 온천으로 신혼여행 정다운 풍경/ 날 좀 봐요 날 좀 봐요 뭘 그래요/ 바람은 맑은 바람 우리들은 젊은이/ 이리와요 부르면 이리와요 대답하네/ 온천으로 신혼여행 그리운 풍경 이리와요 저리와요 왜 그래요/ 다음은 말 못해 우리들은 젊은이’(‘여보하고 부르면’)

주로 바느질을 하시거나 홀로 앉아서 찬거리를 다듬으실 때 흥얼거리시던 노랫가락들이다. 노랫말에서처럼 구슬비가 내리는 날에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고, 어머니 노랫가락과 함께 칙칙폭폭 꽥~ 꽥~ 울리는 기적소리는 몸과 맘을 더욱 스산하게 하고 쓸쓸했다. 1950~60년대는 환경이 청정해서였는지 지금보다 기적소리가 더욱 컸고 멀리까지 들렸다. 우리 마을은 기찻길에서 직선거리로 약 3km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비가 올 때는 바로 옆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필자의 모친(정안업·1991년 작고)과 부친(김북술·1976년 작고)은 슬하에 2녀4남을 뒀다. 
필자의 모친(정안업·1991년 작고)과 부친(김북술·1976년 작고)은 슬하에 2녀4남을 뒀다. 

어머니께선 살아갈수록 삶이 팍팍하고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가면 부부간의 정도 돈독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김북술)는 10년 넘게 병치레를 하시다 1976년 훌쩍 떠나버리셨고…, 시집살이는 그렇게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식구는 늘어나고 일은 더 복잡해졌다. 생각과 현실이 일치할 때가 어디 있던가. 시부모님과 시댁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친지들과 이웃들까지 챙겨야 하는 등, 새롭게 맺어야할 인간관계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운 친정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2남4녀 자식들 돌봄과 일군들 뒤치다꺼리 그리고 집안 살림과 논밭 일까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부담과 스트레스를 풀고 달래는 데는 노래만큼 적절하고 효과적인 게 없었지 않았을까?

어릴 때 나는 어머니께서 그냥 심심해서 흥얼거리시는 노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삶이 답답하고 복잡하실 때마다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달래셨던 것 같다. 듣기에 거북하지는 않았지만 다소 서글프고 구슬픈 음조였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오는 여인의 외로움과 고달픔이 묻어 있었다.

단순한 노랫말과 가락 같지만 이 속에는 나름대로의 삶에 대한 철학이 있었고, 인생을 대하는 슬기와 혜안이 담겨 있었다. 고달픔과 한을 노래 속에 녹이고, 슬픔과 아픔도 노래에 실어 보냈던 것이다. 노래를 부르시면서 만인에 대한 서운함을 달래시고, 만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해소하셨던 것이다. 피폐해진 몸과 맘도 추스르고 다졌을 것이다.

1990년께 남원 광한루로 생전 마지막 나들이를 갔던 필자의 어머니, 고 정안업님. 
1990년께 남원 광한루로 생전 마지막 나들이를 갔던 필자의 어머니, 고 정안업님. 

애초 노래 제목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노래를 배우려고 한 적도 없고 배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수시로 들었으므로 귀와 몸에 배어있어 익숙하고 친근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나도 모르게 입과 몸에서 저절로 새어나왔다. 노래를 정확히 몰라 아쉬웠는데, 누님들을 통해 가사를 받아 적고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늘도 그때 그날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나는 어머니의 노래 속에서 그렇게 커왔고, 지금도 그 곳에 머물러 있다. 아마 숨이 멈출 때까지 그러지 않을까? 목메어 불러보는 우리 어머니~!.

편집 : 김경애 편집위원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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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00849.html

김태평 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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