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새벽녘이었다. 새벽에 스마트폰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서울 삼성병원 중환자실에서 밤새도록 부친 건강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던 아내의 전화다. 촉각을 다투는 부친의 임종을 앞두고 목회자인 남편에게 마지막 기도를 부탁하는 아내의 전화였다.

필자는 마지막 생을 앞둔 부친을 위해 전화상으로 임종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부친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엄중한 시간에 이보다 더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보다 더 간절한 기도, 심장이 타는 기도, 절실한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다.

물론 지난주에 필자는 며칠간 병원에 머물면서 부친의 병세가 호전되기만을 기도하며 간병하는 기간을 보냈었다. 그러나 주일이 다가와 예배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담임 목사의 역할 때문에 토요일에 여객선을 타고 어청도 섬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주일 예배 후 월요일 새벽, 이렇게 갑자기 부친의 건강이 악화되실 줄은 몰랐다.

부친은 월요일 아침 8시경에 주님 부르심을 받으셨다. 부친은 목회자 아들의 기도를 받으신 후, 두 시간이 지난 뒤에 주님 부르심을 받으신 것이다. 일주일 전 화요일, 부친의 수술이 순조롭게 잘 마쳐지게 되었지만 그 이후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채 일주일 만에 소천하게 되었다.

부친은 그동안 여든 여섯 연세에도 불구하고 자식들 고생시킨다고 생각하셨던지 전화도 잘 안하셨다. 건강이 안 좋으실 때마다 자식들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으시고 혼자 입퇴원을 반복하시던 일까지 있었다.

부친은 13년 전에 어머님과 사별하신 뒤에 주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13년 동안을 혼자 사셨다. 6명의 자녀를 두신 아버지는 혼자 힘든 세상을 살다가 영원한 길을 떠나셨다. 병이 들어 아프시고 힘들어 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 웬만해선 내색하지 않으시고 홀로 힘들게 사신 것이다. 그러나 부친은 슬하에 육남매를 잘 키우셔서 자식들이 한결 같이 잘 된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부친은 연로하셨지만 홀로 살아가시는데 항상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사신 분이다. 농촌에서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활발하게 일하셨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움직여야 된다면서 때로는 소소하게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셨으며 염소 몇 마리를 최근까지 키우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한편으로 필자는 부친에게 아들 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불효자식이라는 사실을 소천하신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부친 손으로 13년 동안 매일 자신의 식사를 손수 끓여 드시게 한 것은 자식으로 참으로 불효하고 죄스럽다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작년 추석 때의 일이다. 여느 때 추석날과 마찬가지로 추석 아침에는 부친과 함께 모든 형제가 고향 집에 모여 추석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감사예배 후 둘러앉아서 미리 준비해 놓은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 우리 집 추석 명절의 아침 풍경이다. 그런데 작년에는 달랐다. 예전 같으면 감사예배 후에 곧 바로 식사를 하게 되는데 갑자가 부친께서 모두 잠시 자리에 앉으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부친의 말씀이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교회 안 나가는 자식들도 모두 교회 나가거라.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고 살아가라는데 왜 안하느냐. 내 말을 모두 따라주기를 바란다” 부친의 훈계이며 당부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면서 부친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자식들에게 명령조로 말씀하신 일이 없는데 그날따라 부친이 유언같은 말씀을 추석날 아침에 하신 것이다. 그동안 부친께서는 자식들에게 축복의 말씀 외에는 그 어떤 말씀도 절대 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작심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친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4형제와 함께 어려운 가정에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많은 고생을 하셨다. 부모님은 결혼하게 된 이후에도 가정 형편이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향을 등지기로 결심하시고 필자와 바로 아래 동생,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 때가 1960년대 중반이다. 필자의 나이 여섯 살, 어린 동생은 3살배기, 부모님은 두 형제를 집에 사는 청년에게 맡긴 채 아침 일찍부터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세 들어 사는 집 주인 청년이 우리 형제와 놀아주던 때가 생각난다. 나중에 필자가 성장해서 부모님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부모님은 열심히 일해야 하기에 어린 두 형제를 집주인 청년에게 맡기고 아침 일찍부터 일을 나가신 것이다. 일찍 집을 나가셔서 하신 내용은 대략 두 가지 일로 요약된다. 먼저 부친이 하루종일 하시는 일은 숯을 굽는 일이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숯을 구워 가정에서 연료용으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부친은 여느 산에 올라가서 화전민으로 하여금 벌목하고 불을 지른 다음, 산판을 마치게 되면 구워낸 숯을 서울 인근 시장에 가셔서 내다 팔고 오는 일을 반복하신 것이다. 그리고 모친은 화전민의 야산에서 채소를 키워 내고 산에 오르셔서 산나물을 뜯어다가 아침 일찍 열차를 타고 서울 인근에서 채소나 나물을 파는 일을 하시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부친에게 심한 질병이 찾아왔다. 그 질병이 무엇인지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백방으로 병원 의원을 찾아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질병에 전혀 차도가 없었다. 결국 부모님은 가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새롭게 출발했던 가평에서의 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이모부의 권유로 다시 고향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부모님은 몇 년 만에 전라도 고향에 다시 내려오셨는데 확실한 사실은 부친이 그렇게도 힘들어 했던 질병이 깨끗이 낫게 되었다.

부친은 손재주가 참 많으신 분이다. 생전에 부친에게 자랑할 만한 솜씨있는 기술이 몇가지가 있다. 목수, 이발, 보일러 수리, 두부를 만드는 기술 등이다. 지금 현재 살고 있는 30여평 되는 집도 부친이 직접 부친 손으로 지으신 집이다. 부친은 무슨 일이든지 손기술이 좋고 재주가 참 많으시다. 동네에서 부친이 필요로 하는 일은 얼마든지 많았다.

대부분 동네 주민들의 연세가 노년에 해당하여 여러 가지 생활에 불편한 일이 발생하면 고치고 수리할 사람이 없기에 부친이 동네에서 매우 유용한 일을 처리하고 수리해 주는 일을 도맡아 하신 것이다. 주민이 부르면 부친은 그 즉시로 보수 없이 친히 잘 감당하셨다. 보일러를 수리하는 일, 전기를 배선하고 스위치를 고쳐주는 일, 가전제품을 연결하고 고쳐주는 일, 수도를 고쳐주고 하수구를 뚫어 주는 일 등 어떤 일이든지 동네 주민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신 분이었다. 최근에 부친이 소천하시기 2주 전의 일이다. 옆집에 있는 블록 담장을 부친께서 무보수로 친히 쌓아 주신 것이다. 옆집에 계신 분이 직접 필자에게 알려줘서 알게 된 사실이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몇 번에 걸쳐 아들 되는 필자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내 친구들은 벌써 증손주를 무릎에 앉혀 자랑하던데 나는 언제쯤이나 될는지 모르겠구나” 부친은 혼자 말씀처럼 당신의 친구들을 시샘하는 듯 말씀하셨다. 필자에게는 작년 여름에 결혼한 큰아들이 있다. 아버지 생전에 증손주를 당신 무릎에 앉히는 일이 그렇게도 좋아 보이셨던가 보다.

마침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비로소 손자며느리가 임신하게 된 기쁜 소식이었다. 조금 있으면 그토록 기다리던 증손주를 보게 될 것이라고 손자며느리 임신 소식을 부친에게 알려 드렸다. 부친께서 그 소식을 듣고는 이제 증손주를 보게 되었다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몇 달이 지난 후, 부친은 갑자기 담석증으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하시고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부친의 생애가 여기까지라는 사실을 필자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부친은 수술 후에 회복을 못하시고 일주일 만에 소천하셨다. 주님께서 부친을 부르신 뒤 칠십구일 만에 증손자, 새 생명이 태어났다. 그렇게도 선친이 원하셨던 증손주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도 부친이 돌아가신 직후의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아버지의 생애는 바로 증손주가 태어나기 팔십여 일 전까지만 해당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이 “카이로스”라고 하는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있는 시간은 우리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함부로 바꿀 수가 없고 그 어떤 명분으로도 변경 불가능한 원칙이다. 필자는 가족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원칙을 다시한번 교훈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부친이 그토록 생전에 보고 싶어 했던 증손주는 부친이 소천하시고 팔십여 일이 지난 후 태어나게 되었다. 손자를 부친 무릎에 앉히기를 그렇게도 원하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소망은 소망 자체로만 끝나버린 것이다.

필자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이 생각하는 차원과 하나님 예정하신 시간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친은 자신의 바람과 자식들의 소원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 소천하시게 된 것이 아닌가? 부친이 소천하게 됨으로 그동안 남겨두신 영적, 물적인 유산(遺産)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소천하심을 계기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유산이란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유산이 과연 있는가. 만일 나에게 주어진 유산이 있다면 어떤 유산이며 특별히 주님 앞에서 믿음의 가문이 되는 유산, 가장 생산력 있는 유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맡긴 유산에 대한 진지한 물음 앞에 서 있다. 더군다나 올해 일어난 두 가지 가족사, 즉 부친의 소천과 손자의 탄생 사이에서, 중간에 서 있는 나에게 과연 우리 가족의 진정한 유산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유산(遺産)”이란 무엇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첫째, 죽은 사람이 남겨 놓은 재산. 둘째, 앞 세대가 물려준 사물 또는 문화. 셋째, 법률에 있어서 상속에 의하여 상속인이 피상속인으로부터 물려받는 재산을 뜻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산”이란 죽은 사람이 남겨 놓은 재산이나 앞 세대가 물려준 사물 또는 문화, 법률에 해당하는 상속인이 물려받는 재산을 말한다.

이 같은 재산은 모두 유물론적인 재산이고 유형적인 재산이다. 부친이 필자 및 자식들에게 남겨준 재산이 있었다. 전답으로 땅 몇 마지기와 얼마간의 현금이었다. 필자 부모님은 살아 계실 때 젊은 날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이른 새벽부터 밤 늦도록 피땀 흘리신 보람으로 육남매 자식들을 모두 교육시키고 잘 성장하게 하셨다. 그리고 남은 재산이 있기에 재산에 대한 유산까지 물려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물리적인 유산은 유한한 유산이며 끝이 있는 유산이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유산이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 있다. 이 유산은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고 재물로 치환할 수 없는 가장 가치있는 유산이다. 그것은 바로 부친께서 물려주신 믿음의 가문으로 이어가게 한 영적인 유산이다. 추석날 아침, 여든 다섯, 결코 적지 않은 연세에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 부친의 강렬한 열망이었다. 부친은 모든 자녀들에게 믿음의 가문으로 살 것을 유산으로 남기셨다. 필자에게는 태어난 지 채 두 달밖에 안된 손자가 참 예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예쁜 손자를 무릎에 앉혀보았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그토록 무릎에 앉히고 싶어 하셨던 증손자를 할아버지가 대신하여 무릎에 앉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쁜 손자를 우리 가정에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며 매우 아름다운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선물이 믿음의 가문이 되기를 기대하며 소망한다.

박  명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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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 완주은천교회 담임목사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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