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우크라이나 강이리나님 기리는 글
거기 여전히 버리지 못한 조국 , 버리지 못한 민족이 있다. 지난 2009년부터 2년 가까이 머물렀던 우크라이나의 고려인 동포들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운 기억들이 있다 . 어머니 아버지의 나라, 한반도에서 8천Km나 떨어진 머나먼 땅에서 태어나 68년 평생을 살다가 묻힌 강이리나 할머니와 짦은 인연은 그중에도 가장 애절하다 .
그해 3월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우크라이나로 파견된 나는 초기 6개월간 니콜라예브와 연수과정을 마친 뒤 크림자치공화국의 작은 도시인 에파토리아에 도착했다. 크림반 도의 2500 년이 넘은 고대도시 에파토리아에서 고려인 한글학교 교사를 맡은 나는 현지 고려인들에겐 최초의 한국어 선생이자 거의 처음으로 본 한국 사람이었다 .
한글학교는 주말에 열고 평일엔 내내 휴가처럼 현지인들을 만나러 다닐 수 있었다. 강이리나 할머니는 그해 10월20일 고려인협회 회장님과 함께 나를 집으로 초대해주었다. 강 할머니는 처음 만난 맛난 음식을 대접하며 제게 서툰 우리말로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혼혈인 손녀 사비나가 한국말을 배우고 노래를 곧잘 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 며칠 뒤 열린 ‘2009년 고려인 문화축제’에서 사비나는 춤을 춰서 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무대에 올라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사비나와 또 다른 한 아이는 다른 출연자의 한복을 빌려 입었던 까닭에 커튼콜에 나가지 못했다. 애써 모른 척 한 뒤 수업시간에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그날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더니 너무나 좋아했다. 그 모습이 더 안타까워 불혹 넘은 사내의 눈시울이 붉어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11월7일 강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함께 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튿날 집으로 달려가보니 장례절차를 물었다. 만난 지 불과 보름 만이었고, 두번째 만남이 장례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37 ~38 년 스탈린 치하에서 중앙아시아 여러 공화국으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의 후손들이어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사는 동생들이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기디린 뒤에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
어쩌면 사람의 인연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있는 것일까,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 정신을 차리고 영정을 준비하려는데 사진이 없었다 . 가족사진 중에서 할머니 모습만 카메라에 담아 다음 날 근교에 사는 화가를 수소문해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덕분에 영정 속 강할머니는 젊은 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만나는 고려인들에게 두루두루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 특히 한글학교 학생들에게는 모두 이름을 지어주었다 .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반갑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는 사비나에게는 한국이름 ‘하늘꽃’을 주고, 할머니는 더 좋은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으로 가셨다고 위로해주었다 . 그래서 강 할머니의 이름을 ‘강하늘’로 지어드렸다 . 강처럼, 하늘처럼 주유하면서 생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고국 산천도 둘러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는 지금도 우리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며 살아야할 우리 동포가 있다 . 오늘 강하늘 할머니를 기리며 다시금 내 동포의 역사를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 지난 8·15 광복절 때 모셔온 홍범도 장군에 이어 ‘동포의 귀환’ 을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야 하겠다 . 그것이 하루속히 통일된 조국을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
대전/김형효 주주통신원 제공
편집 : 김경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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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hani.co.kr/arti/society/media/1009334.html#cb#csidx31cca2cebca76b0ac6c99c0ffaa63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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