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재 선생은 1951년 9월과 12월에 각각 ‘육군 하사관학교’와 ‘육군경리학교 경리하사관 후보생 과정’을 수료하셨다. 올해가 70주년이다.

1951년 5월 1일, 19세 소년은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3월 17일, 전남 화순군에서 수복 및 빨치산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제3대대가 빨치산 혐의로 마을 주민인 청장년 남자 15명의 목숨을 빼앗았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9.17, 242-244쪽). 우연히도 그 시점에 첩첩산중으로 피란을 가는 바람에 겨우 화를 면했구나. 1년 전에 발발한 6·25사변은 한창이다. 홀어머니와 여동생과 헤어져 군대에 가야 한다. 목적지는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별칭은 모슬포 훈련소;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이다. 집결지는 어디이고, 제주도로 가는 배는 어디서 타지, 등등.

청재 선생은 생전에 어디 어디를 경유하여 제주도에 갔는지는 말씀하지 않았다. 당신이 남긴 기록에는 ‘1951년 5월 16일에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 입대’라고 쓰셨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집을 나서서 제주도에 도착하기까지 보름이 걸린 셈이다. 공적 기록인 병적 증명서(면사무소 발급)와 거주표(居住票; 병무청 발급)에 나오는 입대일은 1951년 5월 25일이다. 입대일은 청재 선생의 기억과 공적 기록이 서로 다르다. 그 차이는 약 10일이다.

출처: 형선기·형광석, < 보랏빛 길목에 서서 – 청재 형선기 80년을 걷다>, 2011.4.
출처: 형선기·형광석, < 보랏빛 길목에 서서 – 청재 형선기 80년을 걷다>, 2011.4.

청재 선생은 ‘1951년 하사학교 입대’라는 기록을 남기셨다. ‘육군하사관학교의 수료증’과 ‘육군경리학교 수료증’을 잘 간직하여 손자(형남일)에게 전했다. 제6기 육군하사관학교 수료증을 보면, 수료증 수여일은 1951년 9월 15일이고 계급은 하사이다. 훈련 시작일과 훈련 기간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수료증 수여자는 육군제1훈련소 소장이다. 육군하사관학교는 육군제1훈련소에 설치됐다고 보인다.

제6기 육군하사관학교 교 수료증
제6기 육군하사관학교 교 수료증

 

청재 선생은 ‘1951년 5월 부산에서 육군경리학교에 응시하여 합격’ ‘1951년 10월 21일: 육군경리학교 입학’이라고 기록을 남기셨다. 당시 육군경리학교(설립: 1949년 8월 1일)는 응시 지원자 중에서 선발하는 제도를 뒀다고 추정된다. ‘육군경리학교 수료증’을 보면, 분류는 ‘경리하사관 후보생’이고 수료일은 1951년 12월 30일이다. 훈련기간은 70일 정도로 보인다. 부산이 육군경리학교와 어떤 연관을 띄는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당시 육군경리학교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그렇다.

제8기 육군경리하사관 후보생 수료증
제8기 육군경리하사관 후보생 수료증

어떤 연유로 청재 선생은 육군경리학교에 선발됐을까? 청재 선생은 1946년 6월 28일 광주서석공립국민학교(현 광주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한 광주상업중학교(1945년 11월 13일 유은 최선진이 6년제로 설립, 1951년 9월 1일 학제 변경에 따라 광주상업고등학교와 광주동성중학교로 분리, 2001년 3월 광주동성고등학교로 개명)에서 삼개년의 전 과정을 1949년 6월 10일 수료하셨다. 그런 배경인지라, 청재 선생은 일상생활에서 계산 도구인 주판(籌板, 珠板; abacus)을 능숙하게 활용하셨다. 특기할 바는 첫째, ‘졸업증서’가 아니고 ‘수료장’이다. 생각건대, 6년제 졸업 과정과 3년제 수료 과정으로 구분하여 운영했다고 보이는 대목이다. 둘째, 당시 초등학교 졸업증서와 중학교 수료장에 나타난 교장은 ‘김창석’으로 동일하다. 그 배경이 상당히 궁금하다. 더 찾아볼 숙제이다.

광주상업중학교 3개년 수료장
광주상업중학교 3개년 수료장
광주서석공립국민학교 졸업증서
광주서석공립국민학교 졸업증서

“나는 1951년 5월에 군에 입대하였다. 열아홉의 나이였었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았다. 겨울로 기억된다. 제주도에도 눈이 많이 내렸었다. 팬티 바람으로 눈 위에서 무릎 꿇린 채로 여러 시간 단체 기합을 받았다. 겨우 일어섰으나 무릎에는 두꺼운 얼음덩이가 붙었었다. 나는 그 뒤로 계속 무릎이 시럽아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무릎 통증으로 내장이 뒤집히는 기분이다. 이제는 진통제의 약발도 듣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약물 부작용도 심해서 온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그게 바로 군대생활이 내게 준 처절한 선물이었다.”(형선기·형광석, < 보랏빛 길목에 서서 – 청재 형선기 80년을 걷다>, 2011.4.) 청재 선생의 이러한 회고담은 육군경리학교 훈련과정 때  겪은 내용으로 보인다.

농촌진흥청의 쑥 표본
농촌진흥청의 쑥 표본

청재 선생은 육군경리학교를 1951년 12월 30일 수료한 후 곧바로 1952년 1월 2일 ‘육군본부 재무감실(財務監室) 전속(轉屬)’이라고 기록했다. 육군본부는 6·25사변 때 퇴각을 거듭해 1950년 6월 28일 시흥, 7월 3일 평택, 7월 14일 대구, 9월 5일 부산까지 밀려났다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3일 대구로 복귀했고, 마침내 1955년 3월1일 서울로 복귀했다(매일신문, 2007-03-01). 청재 선생은 생전에 대구 육군본부에서 복무할 때 이질(痢疾; Dysentery)에 걸려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회고하시곤 했다. 주변에서 뜯어온 쑥을 달인 물을 자주 마셔 효험을 봤다. ‘쑥에는 각종 세균의 번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습진은 물론 세균성 이질과 피부 가려움증에도 효과적이다’(경북도민일보, 2007.04.03).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뤄졌다. 청재 선생은 ‘1954년 5월 16일, 광주육군병원 재무계에서 제대’라고 기록하셨다. 그 병원은 군 후송병원이고, 국군광주병원이라는 명칭으로 있다가 2007년 함평으로 이전하면서 국군함평병원으로 개칭되었다. 공적 기록인 병적 증명서에는 1954년 5월 1일 가사 사정으로 전역했다고 나온다. 계급은 병장이다. 반면에 육군하사관하교 수료증에는 계급이 ‘육군 하사’로 나온다. 왜 이렇게 다른지는 공부가 부족해서 아직은 모르겠다.

청재 선생의 군 복무기간은 대체로 3년이다. 당신의 기록으로는 1951.5.1.~1954.5.16.이다. 병적 증명서로는 1951.5.25.~1954.5.1.이다.

청재 선생은 형고열 선생과 하기순 선생의 둘째 아들로 1932년 3월 14일(음력) 이 세상에 소풍 나오셨다가 2012년 12월 27일 정오경 영원한 고향 하늘로 돌아가셨다. 향년 81세이다. 하느님이시여, 청재 형선기 선생께 평화의 안식을 주소서!

청재 형선기 선생은 나의 선친이시다. 2021년 마지막 날 저녁, 육군 하사관학교 졸업 70주년을 마주하니, 신산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실천하신 선친의 일생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눈앞을 스쳐 간다. 선친을 닮지 못한 불초자(不肖子)인지라, 더더욱 선친이 그립다.

대한민국 103년 12월 31일

편집: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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