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고 안석재 선생님 그리는 제자의 글

 

별세 2년 전인 지난 2017년 서울 휘봉고 안석재(왼쪽) 선생님이 필자 김보경(가운데) 학생 등이 연 그림전시회를 축하 방문해 함께 인증샷을 찍었다. 김보경씨 제공
별세 2년 전인 지난 2017년 서울 휘봉고 안석재(왼쪽) 선생님이 필자 김보경(가운데) 학생 등이 연 그림전시회를 축하 방문해 함께 인증샷을 찍었다. 김보경씨 제공

지난 11월 16일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가신 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진정한 스승이 더는 없다고 하는 시대에 나는 운좋게도 참 좋은 스승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안석재 선생님이다. 쉰다섯살,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나신 안 선생님의 기억을 이렇게 글로나마 나누어 공동의 기억으로 만들고 싶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자리한 휘봉고등학교, 대부분 학생들이 기억하는 선생님의 첫 인상은 입학식 날 모습일 거다. 인자한 미소에 안경. 푸른색 조끼에 왠지 작은 나무 한 그루 같았던 분. 국어 담당인데 손에 꼭 쥐고 있던 카메라. 어쩌면 마법도 부리실듯 <해리포터>에 등장해도 될 것 같았다. 나와 친구는 그때부터 그 분을 ‘눈돌가루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때 혁신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딴짓만 한다고, 동네에서 ‘똥통’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 ‘딴짓’이 선생님 보시기에는 잠재력이었고 생기였다. 학생들이 학생회장 선거운동을 하고, 학교 앞마당에서 힙합과 밴드 공연을 하고, 공들여 만든 연극을 무대 올리며 직접 기획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곳에 선생님은 늘 카메라를 들고와 그 모습을 꼼꼼히 기록해주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어린아이처럼, 마치 한순간도 놓치면 안 된다는 듯이…. 선생님이 있는 곳이면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멋지고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고 안석재 선생님이 2017년 휘봉고 학생들이 서울 종로에서 주최한 행사를 살펴보고 있다. 2019년 11월16일 별세한 고인은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제자들의 활동을 기록해주었다.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활동하며 <문학 수업의 길 찾기>(나라말 펴냄·2010)도 펴냈다. 김보경씨 제공
고 안석재 선생님이 2017년 휘봉고 학생들이 서울 종로에서 주최한 행사를 살펴보고 있다. 2019년 11월16일 별세한 고인은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제자들의 활동을 기록해주었다.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활동하며 <문학 수업의 길 찾기>(나라말 펴냄·2010)도 펴냈다. 김보경씨 제공
고 안석재 선생님이 생전에 서울 동대문구 휘봉고의 교내 텃밭에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보경씨 제공
고 안석재 선생님이 생전에 서울 동대문구 휘봉고의 교내 텃밭에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보경씨 제공

한번은 학생회 간부로서 학교 축제에서 주최하는 좋은 행사들에 대해 의논을 드렸다. 선생님은 ‘축제 끝나면 우리 학교만의 문화를 제대로 꽃피워보자’며 나보다 더 들뜨신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선생님과 교문에서 다시 마주쳤다. 내가 다녀간 뒤로 계속 심장이 두근거리셨다며 2학기 때 할 행사들을 다시 짚어보자고 하셨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보이며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마음이 아플 정도로 티 없이 맑게 웃으셨다. 학생들 행사를 이토록 당신 일처럼 생각해주시다니…, 선생님의 밝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훗날 내가 만약 선생님이 된다면 선생님처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참사가 터지자 나는 친구 한 명과 틈만 나면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집회 현장은 암담하고 치열하고 무서웠다. 그렇게 교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수많은 인파 틈새에서 선생님을 마주쳤다. 그때의 안도감이란…. 선생님은 밤 10시만 되면 우리를 집으로 보내려 하셨다. 우리가 안 돌아가겠다고 버티면 끝내 당신도 가겠다며 함께 귀가했다. 낙담과 실망을 안고 지하철에 타면 선생님께서는 에너지바를 슬며시 꺼내주셨다. ‘내 옆에 출출해 보이는 사람이 있을 때 줄 수 있는 간식으로는 에너지바가 최고야’라고 하시며 선생님은 늘 가방에 에너지바를 한아름씩 넣고 다니셨다.

지난 2015년께 서울 휘봉고 시청각실에서 안석재 선생님이 학생들과 함께 학교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김보경씨 제공
지난 2015년께 서울 휘봉고 시청각실에서 안석재 선생님이 학생들과 함께 학교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김보경씨 제공

선생님은 희망을 가르치는 분이었다.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아픔을 보셨지만,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고 희망으로 나아가려 하셨던 분이었다. 2019년 1월 7일 선생님과 주고받은 마지막 메시지에서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주고 염려해준 덕분인 듯, 조금은 나아지는 듯한데…, 병세와 관계없이 여전히 나아감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 나이가 들어도 몸이 아파도 희망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오늘 오전 산책이 준 선물이야. 나중에 보경이가 선생님 만나면 조금 놀랄 거야. 선생님은 후두를 떼어내 이제 말을 못 하거든. 그렇지만 보경이 만났을 때도 나아감과 희망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싶어.” 그 뒤로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선생님은 치료를 받으면서도 계속 꿈을 꾸셨다. 한평생 사진을 찍어오셨으니 언젠간 사진전도 열고 싶다 하셨고, 더 나은 교육을 위한 연구도 계속 하셨고, 독일의 학교 현장이 궁금하다면서 ‘좋은 독일어 교재를 아느냐’고도 물으셨다. 독일 교육현장 답사도 예정되었지만 선생님 병세가 악화해 취소되었던 듯하다.

선생님의 별세는 내게 과제를 남겨주었다. 선생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는 세상에서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것들을 내 삶에 지켜나가고 싶다. 학생들과 학교 현장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교육에 대한 열정을, 사람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옆 사람의 배고픔에 마음 쓰는 일을 많은 사람이 함께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제자/김보경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인물팀(People@hani.co.kr).

* 이글은 11월 26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 원문 보기 :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20881.html

*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김경애 편집위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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